[칼럼] 콘텐츠가 넘칠수록 비싸지는 것은 신뢰
팬·플랫폼·데이터·생성형 AI가 바꾼 미디어 산업…제작비 절감 뒤에 남는 발견과 관계의 경쟁
[KtN 최기형기자]콘텐츠 산업은 오랫동안 많이 투자한 작품이 더 큰 관심을 얻을 수 있다는 계산 위에서 움직였다. 유명 배우와 감독을 확보하고 촬영과 미술, 후반 작업에 막대한 비용을 투입한 뒤 극장과 방송,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의 주요 노출 공간을 차지하는 방식이었다. 관객 수와 시청률, 공개 직후 조회수가 투자의 성패를 판단하는 대표 수치로 쓰였다.
스마트폰 안에서는 계산법이 달라졌다. 수백억원을 들인 시리즈와 개인 크리에이터가 만든 짧은 영상이 같은 이용자의 시간을 놓고 맞붙는다. 소셜미디어 피드는 이용자가 작품을 찾아오기를 기다리지 않는다. 이전 시청 기록과 검색, 댓글, 공유를 학습한 알고리즘이 다음 영상을 먼저 제시한다. 콘텐츠의 규모보다 이용자의 손가락을 멈추게 하는 속도와 친밀감이 앞서는 순간도 잦아졌다.
딜로이트 인사이트가 펴낸 ‘글로벌 미디어&엔터테인먼트 산업 동향 및 트렌드’는 콘텐츠의 품질이 제작에 들어간 비용보다 소비자가 시청 과정에서 얻는 가치에 따라 평가될 가능성을 짚었다. 높은 제작 가치와 정교한 서사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공감과 적시성, 다양성, 개인화 추천이 제작 규모와 함께 품질을 구성하기 시작했다는 분석에 가깝다.
좋은 작품을 만드는 능력과 작품을 발견시키는 능력도 분리되고 있다. 조사에 참여한 팬의 52%는 영화와 방송 프로그램, 음악, 게임 등을 새로 알게 되는 주요 경로로 소셜미디어를 꼽았다. Z세대 팬에서는 73%까지 높아졌다. 팬의 44%는 소셜미디어에서 콘텐츠를 접한 뒤 전체 작품을 보거나 구매하기 위해 다른 플랫폼으로 이동했다.
작품을 만든 곳과 관심을 모은 곳, 결제가 발생한 곳이 모두 달라질 수 있다는 의미다. 짧은 영상의 광고 수익은 소셜 플랫폼이 가져가고, 본편 구독료는 OTT가 확보하며, 상품과 공연 매출은 유통사와 예매 사업자에게 나뉜다. 제작사는 IP를 제공했지만 어떤 게시물이 이용자를 불러왔고, 어느 관심이 실제 결제로 바뀌었는지 충분히 파악하지 못할 수 있다.
시청률과 조회수만으로는 콘텐츠가 만든 전체 가치를 계산하기 어려워졌다. 이용자가 몇 분 동안 머물렀는지, 다음 회차로 이동했는지, 다른 작품을 찾아봤는지, 구독을 유지했는지, 상품과 공연에 비용을 썼는지가 함께 집계돼야 한다. 같은 100만회 조회라도 한 번 보고 떠난 이용자와 반복 시청 뒤 구매까지 이어진 이용자의 가치는 다르다.
팬덤은 달라진 산업 구조를 가장 선명하게 드러낸다. 조사에서 팬은 비팬보다 하루 평균 51분을 더 미디어와 엔터테인먼트에 썼다. 구독형 주문형 비디오 서비스를 이용하는 팬은 평균 4개 서비스에 월 71달러를 지출했고, 비팬은 평균 3개 서비스에 56달러를 사용했다. 게임과 음악 유료 서비스에서도 팬의 가입 비율이 더 높았다.
팬의 소비는 신작 공개 일정에 맞춰 시작되고 끝나지 않는다. 다음 시즌이 나오지 않는 기간에도 과거 영상을 다시 보고, 크리에이터 콘텐츠와 팟캐스트를 찾으며, 커뮤니티에서 다른 팬과 관계를 이어간다. 상품을 사고 공연과 행사에 참여한다. 작품 공개가 끝난 뒤 남는 소비가 IP의 실제 수명을 늘린다.
콘텐츠 기업은 여전히 공개일을 중심으로 움직인다. 신작이 나올 때 광고비를 집중하고, 일정이 끝나면 홍보도 급격히 줄인다. 팬은 공식 채널이 조용해진 동안 외부 플랫폼으로 옮겨간다. 다음 작품이 공개되면 기업은 이미 다른 공간에서 활동하는 팬을 다시 불러오기 위해 광고비를 투입한다. 같은 소비자를 작품마다 새로 확보하는 비용이 반복되는 구조다.
팬의 40%는 좋아하는 IP와 관련된 콘텐츠를 한 공간에서 이용하기를 원한다고 답했다. Z세대와 밀레니얼 세대에서는 각각 49%였다. 최근 6개월 동안 팬덤 관련 상품을 구매한 비율은 전체 팬이 30%, 콘텐츠 통합을 원하는 팬은 37%로 집계됐다.
영상과 커뮤니티, 상품, 공연을 연결하려는 팬 플랫폼 경쟁이 커지는 배경이다. 팬에게는 여러 서비스를 오가는 불편을 줄이고, 기업에는 시청과 구매를 하나의 회원 정보 안에서 확인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플랫폼이 확보하려는 자산은 상품 한 건의 결제액보다 팬이 로그인 상태로 머무는 기간과 행동 기록에 가깝다.
편의가 커지는 만큼 권력도 집중된다. 팬이 어떤 작품과 인물을 좋아하고, 무엇을 보고 사고, 어느 행사에 참여했는지를 한 사업자가 파악하면 다음 소비를 직접 제안할 수 있다. IP를 만든 제작사보다 회원 정보와 결제 수단을 가진 플랫폼이 팬과 더 가까운 위치를 차지할 가능성도 커진다.
데이터는 콘텐츠 산업의 새로운 배급망이다. 과거 배급망이 작품을 극장과 방송 채널에 올려놓는 시설이었다면, 지금의 데이터는 누구에게 어떤 콘텐츠를 먼저 보여줄지 결정한다. 이용자의 시청과 중단, 반복 재생, 공유, 댓글, 구매를 연결한 기업은 추천과 광고, 상품 판매를 정교하게 조정할 수 있다.
현실의 기록은 소셜미디어와 OTT, 게임, 커머스, 공연 서비스에 흩어져 있다. 한 이용자가 소셜피드에서 작품을 발견하고 OTT에서 본편을 본 뒤 외부 쇼핑몰에서 상품을 구매하면 세 활동은 별도의 정보로 남는다. 통합된 이용자 정보가 없으면 관심이 결제로 이어지는 경로와 작품의 장기적인 수익 기여도를 판단하기 어렵다.
데이터를 많이 모았다고 이용자를 정확히 이해하는 것도 아니다. 비판하려고 본 영상과 좋아서 반복한 영상은 재생 기록에서 같아 보일 수 있다. 가족이 하나의 계정을 함께 쓰거나 자동 재생된 콘텐츠가 취향으로 분류될 수도 있다. 조회와 댓글, 공유를 맥락 없이 품질과 호감으로 해석하면 투자 판단도 흔들린다.
개인화라는 이름 아래 시청 기록과 검색, 구매, 커뮤니티 활동을 광범위하게 결합할 때는 더 큰 문제가 남는다. 이용자는 편리한 추천을 받지만 어떤 정보가 어느 광고와 가격 제안에 사용됐는지 알기 어렵다. OTT에서 작품을 보기 위해 제공한 정보가 외부 상품 광고와 제휴사 마케팅에 쓰이면 최초 동의와 실제 활용 사이의 간격이 벌어진다.
생성형 인공지능은 이미 복잡해진 구조에 콘텐츠 공급 증가를 더한다. 아이디어 구상과 스토리보드, 영상 생성, 편집, 후반 작업에 필요한 시간과 비용이 낮아지면 대형 스튜디오가 아닌 제작자도 더 많은 작품을 만들 수 있다. 소규모 제작사와 크리에이터에게는 제작 규모의 한계를 줄일 기회다.
제작비 절감이 콘텐츠 산업의 비용을 모두 낮추지는 않는다. 시장에 나오는 영상이 늘어나면 작품 하나가 차지할 수 있는 관심은 줄어든다. 촬영과 편집 비용이 내려가는 만큼 추천 공간과 마케팅, 검증된 IP, 신뢰받는 창작자의 가치는 높아질 수 있다. 누구나 만들 수 있는 시장에서는 무엇을 믿고 볼 것인지가 더 어려운 결정이 된다.
AI로 제작된 콘텐츠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릴지, 학습 데이터는 어디에서 왔는지, 배우와 가수의 얼굴·목소리를 어느 범위까지 사용할 수 있는지도 작품의 가치와 연결된다. 제작비를 낮춘 결과물이 권리 분쟁과 허위 정보, 낮은 완성도를 남긴다면 효율은 오래가지 못한다. 인간 창작자가 개입한 범위와 결과물의 책임 주체를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플랫폼에도 같은 기준이 적용된다. 추천 알고리즘이 이용자의 체류시간만 늘리는 영상에 노출을 몰아주면 정교한 작품과 새로운 창작자가 묻힐 수 있다. AI 생성물이 소셜피드와 플랫폼을 빠르게 채울 경우 이용자 피로가 쌓이고 고품질 콘텐츠의 발견이 어려워질 수 있다는 전망도 제시됐다. 콘텐츠 공급이 많아질수록 원하는 작품을 찾아주는 기능과 데이터 투명성, 이용자의 신뢰가 플랫폼의 차이를 만들 가능성이 커진다.
미디어 산업의 권력은 제작사에서 플랫폼으로 단순하게 넘어가는 중이 아니다. 제작 능력과 발견 기능, 팬 관계, 결제 정보, 데이터 분석, 권리 관리가 서로 다른 사업자에게 나뉘고 있다. 각 기업이 차지하는 수익도 작품의 제작비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제작사는 어떤 IP를 보유했는지, 플랫폼은 어떤 이용자 관계를 확보했는지, 데이터 기업은 관심과 결제를 얼마나 정확히 연결하는지, AI 사업자는 비용을 낮추면서 권리와 품질을 책임질 수 있는지가 중요해졌다. 콘텐츠를 만든 기업보다 이용자의 다음 행동을 예측하는 기업이 더 많은 수익을 얻을 가능성도 열려 있다.
제작비와 기술은 계속 중요하다. 정교한 작품을 만드는 데는 자본과 전문 인력이 필요하고, 새로운 제작 도구는 창작의 범위를 넓힐 수 있다. 다만 기술과 자본만으로 이용자의 선택을 보장하던 시기는 지나가고 있다.
콘텐츠 공급이 넘치는 시장에서 오래 남는 자산은 팬과의 관계, 투명한 데이터 활용, 창작자와 권리를 존중하는 제작 체계다. 기업이 공개해야 할 수치도 제작비 절감액과 조회수에 머물 수 없다. 구독 유지와 반복 구매, 창작자 보상, 데이터 제공 범위, AI 활용 표시, 권리 분쟁까지 함께 확인돼야 한다.
미디어 기업이 앞으로 확보해야 할 경쟁력은 더 많은 콘텐츠를 쏟아내는 능력만이 아니다. 이용자가 작품을 발견하고, 비용을 지불하고, 다음 공개까지 관계를 유지하며, 제작과 추천 과정을 신뢰할 수 있도록 만드는 능력이다. 콘텐츠가 많아질수록 희소해지는 것은 제작 도구가 아니라 믿고 머물 수 있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