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elier] 최혜정 ‘액체정원’, 검은 표면에서 발아하는 빛의 군락

에폭시 수지와 안료로 구축한 원형 부조…응고된 꽃의 형상과 반사광이 교차하는 단색의 정원

2026-07-30     박준식 기자
액체정원 최혜정 Epoxy resin and pigments on panel

[KtN 박준식기자]검은 패널 중앙에 수많은 꽃 형상이 둥근 군락을 이룬다. 중앙에는 회백색 광택을 머금은 큰 꽃들이 모여 있고, 가장자리로 갈수록 크기가 작고 농도가 짙은 형상이 늘어난다. 하나의 검은 원처럼 응축된 전체 형태는 빛의 방향에 따라 개별 꽃잎과 주름, 투명한 가장자리를 차례로 드러낸다.

최혜정(CHOI HyuJung)의 ‘액체정원’은 에폭시 수지와 안료를 패널에 결합한 부조적 평면 작업이다. 꽃을 그려 깊이를 암시하는 대신 실제 굴곡과 두께를 가진 형상을 표면에 배치했다. 안료가 만든 명암과 돌출된 수지가 드리우는 그림자가 겹치면서 회화적 공간과 물리적 공간이 동시에 형성된다.

원형 군락은 중앙의 밝은 밀도에서 외곽의 짙은 농도로 이어진다. 비교적 큰 형상들이 모인 중앙부는 빛을 넓게 반사하고, 검은 꽃이 늘어나는 가장자리는 바탕과 경계를 공유한다. 중심과 외곽을 명확히 잘라 나누지 않고 밝기와 크기의 점진적인 변화로 원의 깊이를 만들었다.

꽃의 형태는 한 종류로 통일되지 않았다. 둥글게 말린 겹꽃, 넓은 꽃잎이 층층이 펼쳐진 형상, 가는 꽃잎이 방사형으로 퍼진 구조, 미세한 단위가 밀집한 형태가 함께 놓였다. 식물의 외형을 사실적으로 재현하기보다 개화 과정에서 나타나는 겹침과 확산, 응집의 구조를 추출한 구성이다.

큰 꽃 사이에는 손톱보다 작은 형상과 점 형태의 수지 입자가 촘촘하게 끼어 있다. 크기 차이가 큰 단위들이 간격을 거의 남기지 않고 이어지면서 군락은 꽃다발보다 하나의 복합적인 표면에 가까워진다. 개별 꽃을 따라가던 시선도 점차 검정의 농도와 광택이 이루는 전체 질감으로 옮겨간다.

에폭시 수지는 투명성과 경화성을 함께 지닌 재료다. 액체 상태에서는 흐르고 섞이지만 굳은 뒤에는 움직임이 멈춘다. 꽃잎 끝에서 얇아지는 투명한 층과 깊게 파인 중심부, 표면에 맺힌 광택에는 재료가 유동하던 시간과 응고된 결과가 동시에 남아 있다.

‘액체정원’이라는 제목은 재료의 물성을 작품의 구조와 직접 연결한다. 정원은 생장과 쇠퇴를 반복하는 공간이지만, 수지로 만든 꽃은 한 번 정해진 외형을 유지한다. 흐르던 재료가 굳고, 변화하는 식물의 형상이 지속되는 물질로 전환되면서 자연의 시간과 제작의 시간이 어긋난다.

굳어진 꽃은 실제 식물의 생명성을 모방하지 않는다. 줄기와 잎, 토양과 주변 풍경을 덜어내고 개화한 부분만 집중적으로 모았다. 자연환경을 축소한 정원보다 꽃의 형상을 채집하고 재배열한 인공적 군락에 가깝다.

색채도 식물의 종류를 구분하는 기능에서 벗어나 있다. 붉음과 노랑, 초록을 제거한 자리에 불투명한 검정과 반투명한 회색, 은빛에 가까운 반사광이 들어왔다. 색이 줄어든 만큼 꽃잎의 두께와 곡률, 표면의 거칠기와 투명도가 더 세밀하게 드러난다.

검정은 단일한 색이 아니다. 광택을 억제한 형상은 패널의 어둠 속으로 가라앉고, 매끄러운 수지 표면은 유리나 광물처럼 빛을 튕겨낸다. 같은 안료를 사용한 범위 안에서도 흡광과 반사, 불투명과 반투명의 차이가 꽃마다 다른 시각적 온도를 만든다.

밝게 떠오른 중앙부도 고정된 광원처럼 머물지 않는다. 관람 위치나 조명의 각도가 바뀌면 반사광이 다른 꽃으로 이동한다. 선명했던 꽃잎이 검은 바탕 속으로 물러나고, 보이지 않던 윤곽이 새롭게 나타난다. 형상은 물리적으로 굳었지만 작품의 가시성은 계속 달라진다.

원형의 외곽은 기하학적으로 잘라낸 테두리가 아니다. 작은 꽃들이 조금씩 돌출되고 후퇴하면서 미세한 굴곡을 만든다. 전체는 둥근 질서를 유지하지만 경계에서는 생물의 번식과 증식을 닮은 불규칙한 움직임이 이어진다.

군락 밖에 넓게 남겨진 검은 바탕은 중심의 원을 고립시키면서도 경계를 흐린다. 가장 짙은 꽃들은 배경과 거의 합쳐지고, 빛을 받은 일부 형상만 표면 위로 떠오른다. 안과 밖이 선으로 분리되기보다 꽃의 가시성이 줄어들면서 점차 소멸하는 구조다.

중앙의 밝은 꽃들은 시선을 한곳에 모으지만 완전한 좌우대칭이나 방사대칭을 만들지는 않는다. 큰 꽃의 위치와 종류, 밝기의 분포가 조금씩 어긋나 있어 원형 군락 안에 미세한 편향이 생긴다. 정연한 배열보다 밀집과 분산을 조절한 유기적인 균형이 앞선다.

고밀도의 꽃 형상은 장식적인 풍요로움과 맞닿아 있다. 다만 검은 단색과 제한된 반사광이 즉각적인 화려함을 억제한다. 모든 꽃이 한꺼번에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관람자는 밝은 윤곽에서 짙은 굴곡으로, 매끄러운 표면에서 입자가 두드러진 표면으로 시선을 옮기며 군락을 천천히 분별하게 된다.

작품의 깊이는 형상의 수보다 서로 다른 표면을 한정된 색조 안에서 조직한 방식에서 나온다. 크기와 높이, 투명도와 광택을 달리한 꽃들이 원형의 밀도를 유지하면서도 개별성을 잃지 않는다. 단색의 절제와 군집의 과잉이 같은 구조 안에서 맞선다.

검은 꽃을 애도나 소멸의 상징으로 곧바로 좁힐 필요는 없다. ‘액체정원’의 검정은 의미를 고정하는 색보다 형상을 숨기고 드러내는 광학적 조건에 가깝다. 어둠은 꽃을 지우는 동시에 미세한 반사광을 더 예민하게 만들며 표면의 깊이를 넓힌다.

액체였던 수지는 꽃의 굴곡을 간직한 채 굳었다. 개화의 외형은 멈춰 있지만 검은 표면을 지나는 빛은 꽃들을 계속 출현시키고 다시 잠기게 한다. 최혜정의 ‘액체정원’은 영원한 꽃밭을 재현하기보다 응고된 물질과 움직이는 빛이 서로 다른 시간을 지속하는 정원으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