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혜정 인사이트②] ‘Circle–geometry’, 증식하는 원과 충돌하는 두 중심

‘Circle1’의 방사형 생성에서 ‘Circle2’의 이중 회전까지…흑연과 여백, 반복된 손의 노동으로 구축한 2026년 기하학

2026-07-31     박준식 기자
최혜정(CHOI HyuJung)  사진=ATELIER AMIS

[KtN 박준식기자]여러 개의 원이 서로 겹치며 꽃잎꼴 교차부를 만들고, 교차부는 다시 원환과 방사형 배열로 번져 나간다. 최혜정(CHOI HyuJung)의 2026년작 ‘Circle1–geometry’는 완결된 원 하나보다 원이 다른 원과 만나는 과정에 무게를 둔다. 겹침에서 태어난 작은 형태들이 중앙과 외곽을 연결하며 커다란 원형 질서를 이룬다.

작품 중앙에는 꽃잎처럼 포개진 모듈이 높은 밀도로 모여 있다. 중심을 둘러싼 원환과 삼각형 띠, 넓은 곡선대가 바깥으로 이어지고, 외곽에서는 크기가 비슷한 원들이 서로의 둘레를 침범하며 사방으로 펼쳐진다. 안쪽의 응축과 바깥쪽의 확산이 한 장의 종이에서 동시에 진행된다.

꽃의 형상은 처음부터 독립된 도상으로 그려진 것이 아니다. 두 원이 겹친 자리에 생긴 렌즈꼴 영역이 꽃잎처럼 읽히고, 여러 교차부가 모이면서 방사형 꽃 구조로 바뀐다. ‘Circle1’의 꽃은 자연을 묘사한 결과보다 기하학적 관계에서 발생한 형상에 가깝다.

2021년 ‘액체정원’에 밀집했던 꽃의 군락도 이 지점에서 다시 연결된다. 에폭시 수지의 굴곡과 두께로 만들었던 개화의 형상은 ‘Circle1’에서 원의 중첩과 흑연선의 밀도로 전환됐다. 실제 부피와 반사광은 사라졌지만 작은 단위를 축적해 하나의 원형 집적을 만드는 방식은 유지된다.

최혜정 CHOI HyuJung Circle1 –geometry Circle1 –geometry Year2026 Medium Pencil on paper Dimensions 91x116.8 Category flat painting

에폭시 수지가 만든 물리적 깊이는 연필의 농담으로 바뀐다. 선이 여러 차례 겹친 부분은 짙은 띠를 이루고, 압력이 약해진 구간에서는 종이의 결이 드러난다. 윤곽은 정교하게 통제돼 있지만 흑연의 농도까지 기계적으로 균일하지는 않다. 측정된 원 안에 손의 속도와 압력, 반복 횟수가 남는다.

보조선과 측정의 흔적도 완전히 지워지지 않았다. 완성된 도형 뒤에 숨었어야 할 설계의 과정이 종이 위에 함께 놓이면서 작품은 결과만 제시하지 않는다. 원을 나누고 중심을 잡고 다시 겹치는 제작의 시간이 최종 형상 아래에서 옅게 이어진다.

중심과 외곽은 같은 생성 원리를 공유한다. 안쪽의 꽃잎꼴 모듈에서 시작한 시선은 원환과 띠를 거쳐 바깥의 중첩원으로 이동하고, 외곽의 교차부는 다시 중심부와 닮은 작은 꽃잎을 만든다. 하나의 중심이 주변을 지배하기보다 동일한 규칙이 크기를 바꾸며 반복된다.

‘Circle1’의 원은 완전성이나 영원을 상징하는 익숙한 기호에 머물지 않는다. 독립된 원은 닫혀 있지만 다른 원과 겹치는 순간 새로운 형상을 낳는다. 원의 성격은 하나의 윤곽보다 관계와 증식에서 선명해진다.

‘Circle2–geometry’에서는 하나였던 중심이 둘로 나뉜다. 종이의 양쪽에 자리한 두 회전축에서 넓은 곡선대가 뻗어나오고, 서로 다른 궤도는 중앙에서 겹치며 상대 영역을 가로지른다. ‘Circle1’이 하나의 중심에서 형상을 증식했다면 ‘Circle2’는 두 중심이 상대의 움직임을 바꾸는 관계를 다룬다.

왼쪽에는 넓고 옅은 회색 띠가 펼쳐지고, 오른쪽에는 짙은 흑연의 곡선대가 집중돼 있다. 두 회전축의 크기와 농도, 곡선의 폭은 서로 같지 않다. 좌우를 거울처럼 맞춘 대칭보다 무게와 속도가 다른 두 흐름이 한 평면에서 균형을 조정한다.

종이 바탕을 남긴 흰 곡선도 검은 면 사이의 공백으로 머물지 않는다. 흰 띠는 두 회전을 가르거나 이어주며 별도의 방향을 만든다. 흑연으로 채운 면과 비워 둔 종이가 번갈아 나타나면서 선과 여백이 서로의 형태를 완성한다.

한쪽 곡선이 넓어질수록 반대쪽이 차지할 공간은 좁아진다. 시선이 한 중심을 따라 안쪽으로 말려들면 다른 회전축의 곡선이 끼어들어 방향을 바꾼다. 균형은 좌우가 같은 상태보다 두 힘이 상대의 범위를 계속 조정하는 과정으로 나타난다.

작가가 제시한 하(Ha)와 타(Tha), 프라나(prana)와 아파나(apana), 태양과 달의 관계는 이중 회전의 움직임과 맞닿는다. 바깥으로 넓어지는 곡선은 확산과 상승의 흐름을 만들고, 중심으로 좁아지는 궤도는 수렴과 하강의 감각을 남긴다. 팽창과 수축은 한쪽에만 귀속되지 않고 두 회전축 안에서 반복된다.

왼쪽을 태양, 오른쪽을 달로 고정하는 식의 대응은 작품의 복합성을 줄인다. 양쪽 모두 밝은 여백과 짙은 흑연, 원심적 확산과 구심적 수렴을 함께 품고 있다. 하와 타, 프라나와 아파나는 분리된 두 영역보다 서로 침투하고 조정되는 힘의 관계로 읽는 편이 자연스럽다.

작가가 언급한 충돌과 균형, 해체와 결합, 긴장과 이완도 곡선의 밀도에서 구체성을 얻는다. 짙은 선이 중첩되는 구간에서는 시각적 압력이 높아지고, 흰 종이가 넓게 남은 부분에서는 흐름이 느슨해진다. 중앙의 교차부는 두 궤도가 충돌하는 자리이면서 하나의 형상으로 결합되는 지점이다.

최혜정 CHOI HyuJung Circle2 –geometry Circle2 –geometry Year 2026 Medium Pencil on paper Dimensions 91x116.8 Category flat painting

‘Circle2’에서도 손으로 그린 선의 편차가 남는다. 곡선대의 폭은 완전히 일정하지 않고, 검게 채운 면에도 연필이 오간 방향과 압력의 차이가 드러난다. 정교한 설계는 유지되지만 표면은 디지털 벡터처럼 매끈한 동일성을 갖지 않는다.

생성형 기술과 디지털 이미지가 빠르게 확산된 동시대미술 환경에서 최혜정은 원과 곡선을 손으로 측정하고 반복한다. 기하학은 계산된 도형으로 곧바로 완성되지 않고, 연필을 여러 차례 움직인 시간과 신체의 리듬을 통과한다. 정확한 외곽과 불균일한 농도가 공존하면서 수학적 질서와 인간의 편차가 한 표면에 남는다.

이 같은 수공성은 단순히 오래 그렸다는 사실보다 형식의 성격을 바꾼다. 완전한 원을 지향하면서도 손의 흔들림을 완전히 지우지 않고, 검정으로 채운 부분과 종이의 흰 면을 동일한 비중으로 다룬다. ‘Circle–geometry’는 기하학을 차갑고 균질한 질서로 고정하지 않고 축적과 호흡이 남은 형태로 전환한다.

한국 현대미술에서 반복과 단색, 여백은 오랫동안 다양한 방식으로 다뤄졌다. 최혜정의 연필 작업은 선행 형식을 그대로 되풀이하기보다 원의 측정과 중첩, 흑연의 압력, 지우지 않은 보조선을 통해 해당 감각을 다시 구성한다. 검정은 하나의 균일한 면이 아니라 손이 머문 시간에 따라 달라지는 농도로 나타나고, 흰 종이는 채워지지 않은 배경보다 곡선의 방향을 결정하는 요소가 된다.

K아트의 성격도 만다라나 연꽃을 닮았다는 외형적 유사성만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중심과 외곽을 오가는 시선, 채움과 비움의 교대, 정교한 반복 속에 남은 미세한 편차가 작품의 공간을 만든다. 한국적 감각은 전통 도상의 직접 인용보다 선을 축적하고 여백을 남기는 제작 태도에서 구체성을 얻는다.

한국 미술시장은 2021년 공개경매 거래액 2억3700만 달러를 넘기며 세계 6위까지 올랐고, 이후 거래액 조정 속에서도 서울을 향한 국제 갤러리와 미술계의 관심은 이어졌다. 빠른 팽창기를 지난 K아트는 일시적으로 주목받는 이미지보다 작가가 여러 작품에서 지속할 수 있는 조형 문법을 더 엄격하게 요구받는 단계로 옮겨가고 있다.

‘액체정원’에서 ‘Circle–geometry’로 이어지는 변화는 최혜정 작업의 지속성을 보여주는 한 축이다. 꽃은 수지로 만든 입체 형상에서 원의 중첩으로 바뀌었고, 검정은 광택을 가진 합성수지에서 흑연의 농담으로 옮겨왔다. 재료가 달라져도 반복된 단위를 모아 밀도를 만들고, 밝음과 어둠으로 중심과 외곽을 조절하는 방식은 이어진다.

세계 컨템포러리 아트 공개경매에서는 2024년 7월부터 2025년 6월까지 고가 부문의 거래가 줄어든 반면 5000달러 미만 작품은 전년보다 9% 증가했다. 연간 거래량은 14만6750점으로 최고치를 기록했다. 소수의 기록적 낙찰에 집중되던 시장의 바깥에서 더 많은 작가와 작품이 유통되는 흐름이 확대된 것이다.

작품의 유통 범위가 넓어질수록 한눈에 식별되는 이미지뿐 아니라 연작을 관통하는 형식도 중요해진다. ‘Circle1’의 중첩원과 ‘Circle2’의 이중 회전은 서로 다른 구성을 이루면서도 원, 흑연, 여백, 반복이라는 공통 문법을 유지한다. 개별 작품의 차이와 작가 작업의 연속성이 동시에 드러난다.

최혜정이 작업 세계를 설명하며 사용한 “신과 인간의 시·서·화의 놀이터”라는 문구는 넓은 사유의 범위를 제시한다. 다만 ‘Circle–geometry’의 구체적인 성격은 포괄적인 선언보다 원이 겹치는 방식, 곡선대가 서로의 궤도를 침범하는 과정, 흑연의 농도와 반복된 손의 노동에서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Circle1–geometry’에서는 하나의 원이 다른 원을 만나 꽃잎꼴 형상을 만들고 사방으로 증식한다. ‘Circle2–geometry’에서는 두 중심이 상대의 영역에 개입하며 회전의 방향과 속도를 바꾼다. 하나의 중심에서 시작한 질서는 두 중심의 충돌과 조정으로 확장된다.

최혜정의 원은 출발점으로 되돌아오는 닫힌 선이지만 같은 자리에 머물지는 않는다. 다른 원과 겹치며 새로운 형태를 만들고, 다른 중심을 만나면서 자신의 궤도를 수정한다. ‘Circle–geometry’에 남은 것은 완전한 원의 상징보다 반복 속에서 달라지는 관계와 흔들리면서 유지되는 균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