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도와 AI의 시대, 인간으로 남는 법

'우리가 왜 살아가야 하는가'에 답하는 마지막 보루

2026-08-13     이화수 아티스트

 

AI 시대, 일과 기술의 미래. 사진=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KtN 이화수아티스트] 세상은 거대한 톱니바퀴처럼 굴러간다. 천문학적인 자본과 통화 정책, 끊임없이 쏟아지는 최첨단 기술이 세계 경제를 이끌어간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 시스템은 늘 효율성을 요구하고, 끊임없이 숫자로 가치를 측정한다. 성적, 연봉, 대기업의 순위, 국가의 부 등 거의 모든 영역은 숫자로 서열을 매기고 사람들을 분리시킨다.

특히 눈부신 속도로 발전하는 AI 시대는 우리에게 더 거대한 질문을 던진다. 인간보다 훨씬 빠르고 정교하게 계산하고, 글을 쓰며, 그림을 그려내는 기술 앞에서 '인간의 역할은 무엇인가'라는 불안감이 세상을 덮치기도 한다. 당장 눈앞의 효율과 빠른 성과만이 정답처럼 여겨지는 사회에서, 많은 이들이 세상의 속도에 쫓겨 자기 자신을 시스템의 소모품이나 기계 부품처럼 느끼곤 한다.

그러나 이 기술의 시대 속에서 유일하게 경계를 허무는 존재가 있다. 바로 예술이다. 음악과 미술, 그리고 체육은 국경과 계급, 언어와 신분을 넘어 사람들을 하나로 연결한다. 인공지능이 완벽한 기술로 음악을 연주하고 그림을 완성할 수는 있어도, 그 안에 담긴 인간의 아픔과 외로움, 상처를 보듬는 공감의 마음까지 대신할 수는 없다. 슬픈 음악 한 구절에 가슴이 먹먹해지고, 위대한 예술품이나 뜨거운 스포츠 경기 앞에서 눈시울을 붉히는 마음은 오직 인간만이 공유할 수 있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시가총액 기준 한국 상위 25개 기업을 나타낸 차트입니다.

한편, 세상을 움직이는 또 다른 거대한 축인 경제 지형을 돌아보자. 한국의 100대 기업 리스트를 분석해 보면 한국 경제를 이끌어가는 주체는 제조업 중심의 대기업 집단과 수출 주도형 첨단·중공업 산업이다. 반면 미국은 압도적인 빅테크와 헬스케어, 중국은 국유기업 중심의 에너지와 플랫폼, 일본은 전통 자동차와 고부가 소재·부품, 유럽은 명품과 제약·에너지가 시장을 이끌고 있다. 한국이 글로벌 제조업 공급망의 실물 부품 공급원 역할을 한다면, 미국 등 주요 국가들은 표준 플랫폼, AI·소프트웨어, 바이오 헬스케어처럼 독점력이 높은 시장을 지배한다.

여기서 독점력이 높은 시장이란 특정 기업이 강력한 진입장벽을 바탕으로 가격 결정권을 쥐고, 소비자나 경쟁사가 다른 선택지를 찾기 어렵게 만드는 구조다. 네트워크 효과, 높은 전환 비용, 독점적 기술 및 특허, 규모의 경제가 이러한 독점의 원천이 된다. 이러한 기업들은 치열한 가격 경쟁을 피할 수 있어 영업이익률이 높고, 원가 상승 시 비용을 소비자에게 전가할 수 있는 가격 인상력을 가지며, 경기 불황에도 강력한 위기 대응력을 발휘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정교한 첨단 기술과 거대한 자본, 독점적 시장 구조로 얽힌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도대체 어떤 원리로 작동하는 것일까. 세상의 톱니바퀴는 결국 네 가지 축으로 이루어진다. 내가 가진 것을 내어주고 남이 만든 것을 얻는 '욕망과 교환, 모르는 타인과 함께 살아가기 위한 무형의 규칙인 '약속과 질서', 자연의 힘을 빌려 인간의 한계를 넓히는 '에너지와 기술', 그리고 세상을 움직이는 궁극적 동기인 '관계와 의미'가 그것이다. 즉, 인간의 마음이 발동하여 기술과 에너지를 도구로 활용하고, 약속된 질서 안에서 서로 필요한 것을 나누는 거대한 하나의 생태계인 셈이다.

이 거대한 경제 생태계에서 예술은 제외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예술은 모든 것을 움직이게 만드는 '가장 깊은 곳의 엔진'이자 '숨은 설계자'로 작동한다. 경제와 기술이 세상을 굴리는 뼈대(하드웨어)라면, 예술은 그 뼈대에 가치와 생명력을 불어넣는 영혼(소프트웨어)이다.

2025 밀라노 디자인 위크, 감각의 볼륨으로 재구성된 에르메스 홈의 전환적 상상력. 사진=Hermès,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유럽의 명품 브랜드가 역사적 유산과 감성적 스토리를 결합하여 가죽 주머니를 수천만 원의 가치로 바꿔놓듯, 예술은 기능성에 갇혀 있던 물질에 서사와 아름다움을 입히는 최고 수준의 연금술이다. 나아가 기술과 자본이 그저 이윤과 속도만을 좇아 달릴 때, 예술은 "AI 시대에 인간다움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며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한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이토록 강력한 예술의 힘을 평소에는 잘 알아채기 어려울까.

우선 세상을 지배하는 지표가 눈에 보이는 속도와 숫자이기 때문이다. 자본은 남이 가지지 못한 것을 독점하거나 대량생산과 대량소비가 가능한 것에 높은 가격표를 붙인다. 반면 예술, 다정함, 공감, 느림은 나눌수록 커지고 모두에게 열려 있을 때 가치가 완성된다. 효용이 즉각 나타나지 않고 천천히 내면에 스며들며, 소비자를 귀속시키는 대신 내면의 자유를 부여하여 독립적으로 서게 만들기 때문에 상업적 구조를 성립시키기 어렵다.

또한 사회가 예술을 감상의 대상이 아닌 경쟁과 평가의 도구로 가르쳐왔기 때문이다. 우열을 나누는 기준이 되어버린 예술 앞에서 많은 이들이 심리적 장벽을 느끼며 멀어졌다. 늘 곁에 존재하는 공기처럼 너무 익숙해진 탓에 그 거대한 힘을 의식하지 못하기도 하고, 타인과의 비교와 강렬한 자극에 노출되어 내면의 감각이 마비된 탓에 예술의 온기를 느껴낼 여유를 잃어버리기도 했다.

만약 세상에 예술이 완전히 사라진다면 그 풍경은 견딜 수 없이 황량해질 것이다. 감정의 언어가 사라진 무채색의 세상에서 인간은 내면의 깊은 감정을 토해낼 출구를 잃고 마음이 딱딱하게 마른 채 살아가게 된다. 오직 숫자와 효율만 남은 기계적 사회에서는 건물의 곡선과 조명 대신 네모난 콘크리트 상자만 남고, 인간의 가치 역시 생산성과 숫자로만 매겨진다. 타인의 아픔을 헤아릴 상상력을 잃어 극단적인 분열과 외로움이 밀려오며, 본질적인 질문 없이 주어진 톱니바퀴대로만 굴러가는 지루한 삶이 반복될 뿐이다. 예술이 계속해서 새로움을 제시하고 선을 넘어야 우리의 경계선이 확장된다. 예술이 없다면 우리 사회는 똑같음의 반복 속에 잠식될지도 모른다.

19세기 시인 오스카 와일드는 "모든 예술은 전혀 유용하지 않다(All art is quite useless)"라는 역설적인 문장을 남겼다. 당장 밥을 먹여주거나 집을 지어주는 실용적 기능이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실용적이지 않은 예술이 사라지는 순간, 역설적으로 사랑과 위로, 공감과 삶의 의미처럼 인간에게 가장 유용한 가치들마저 함께 소멸하고 만다.

돈이 되는 것들과 고도화된 AI 기술은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생존(Survive)의 기반을 만들어주지만, 돈이 되지 않는 예술과 공감은 우리가 왜 살아가야 하는가(Live)에 대한 궁극적인 이유를 제시한다.

프랑스 아비뇽 극찬받았던 그 작품… 한강 원작 낭독극 한국 상륙...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한강의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를 원작으로 한 낭독극이 오는 10월 서울 무대에 들어선다.  사진=2026. 08.13 SPAF 제공)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나아가 예술은 기술과 사회가 '어디로 가야 할지' 그 방향을 생각하게 한다. 기술이나 경제는 스스로 "어디로 가야 하는가?"를 결정하지 못한다. 기술은 그저 빠르게 발전할 뿐이고, 돈은 그저 이윤을 좇아 움직일 뿐이다. "AI가 인간을 대체하는 시대에 인간다움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행복한가?" 같은 질문을 던지는 것은 오직 예술(문학, 미술, 음악, 철학)뿐이다. 결국 인간이 경제 활동을 하고 기술을 발전시키는 궁극적인 이유도, 마지막에는 삶의 아름다움, 감동, 그리고 삶의 의미를 누리기 위해서가 아니겠는가.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를 숫자로 환산하고, 빠른 속도를 강요하며, 서열의 칸막이 속에 밀어 넣으려 한다. 그 거대한 시스템 속에서 스스로가 소모품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하지만 마음을 흔드는 시 한 줄을 읽고, 미술관의 그림 한 점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며, 귓가에 울리는 음악과 스포츠 경기의 뜨거운 눈물에 감동하는 그 순간 우리는 비로소 깨닫는다. 내 안에 여전히 파도치고 감동할 수 있는 따뜻한 마음이 살아있음을 말이다.

숫자와 효율은 우리에게 살아가는 수단을 가져다주지만, 오직 예술과 공감만이 우리가 여전히 마음을 지닌 존엄한 인간으로 살아있음을 증명해 주는 마지막 보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