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그래미, 가치를 잃은 트로피…몰락하는 미국 문화의 상징

BTS 불출품이 드러낸 미국 중심 승인 체계의 균열…세계 음악을 뒤늦게 분류하는 시상식에 남은 권위의 공백

2026-08-01     신미희 기자
방탄소년단(BTS) '아리랑', 빌보드 200 7번째 1위…美·英 차트 동시 석권...테일러 스위프트 이후 최대 화력   사진=2026. 03.30 빅히트뮤직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KtN 신미희기자]2026년 7월 29일 방탄소년단(BTS)은 정규 5집 ‘ARIRANG’을 제69회 그래미 어워드에 출품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후보에서 탈락한 뒤 항의한 것이 아니다. 출품 접수가 진행되는 가운데 심사 절차에 들어가지 않는 쪽을 택했다. 지역과 언어에 따라 음악을 나누기보다 음악 자체로 받아들여지기를 바란다는 입장도 함께 내놨다.

그래미가 새로 만든 ‘베스트 아시안 팝 뮤직 퍼포먼스’가 결정의 배경에 놓였다. 2027년 시상식부터 적용되는 신설 부문은 K팝·J팝·C팝을 비롯해 아시아 시장에서 시작됐거나 널리 인정받는 팝 음악을 대상으로 한다. 하나 이상의 아시아 언어가 의미 있게 사용돼야 한다는 조건도 붙었다.

아시아 음악을 위한 트로피가 하나 더 생겼다. 표면만 놓고 보면 포용이다. 미국과 유럽에서 만들어진 영어권 팝에는 출발 지역을 묻지 않으면서 한국어·일본어·중국어로 부른 음악에는 ‘아시안’이라는 별도의 이름을 붙였다. 세계적인 팝으로 성장한 음악을 일반 팝의 중심에 받아들이는 대신 지역별 진열장을 하나 더 만든 셈이다.

레코딩 아카데미는 아시안 팝 부문에 출품해도 올해의 앨범·레코드·노래 등 주요 부문에 함께 도전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신설 부문이 아시아 음악을 주요상에서 배제하는 장벽은 아니라는 입장이다. 제도상 설명은 맞다. 동시에 왜 영어권 팝은 지역 표시 없이 보편적인 ‘팝’으로 남고, 아시아 음악만 지역과 언어를 증명해야 하는지는 답하지 못한다.

BTS의 불출품은 그래미 트로피의 가치를 놓고 벌어진 사건이 아니다. 누가 세계 음악을 분류하고, 어떤 이름을 붙이며, 어느 칸에서 경쟁하게 할 권리를 갖는지를 둘러싼 충돌이다. 수상 가능성이 있는 아티스트가 심사받을 기회를 포기하면서까지 분류 방식에 선을 그었다는 사실은 그래미가 처한 권위의 공백을 드러냈다.

그래미는 대중투표로 결정되지 않는다. 레코딩 아카데미 회원과 등록된 음반 관련 기업이 작품을 출품하고, 300명이 넘는 전문가가 자격과 장르 배정을 검토한다. 후보와 수상자는 음악 창작·기술 분야 종사자로 구성된 투표회원이 결정한다. 해마다 약 2만건의 작품이 이 절차에 들어온다.

동료평가는 그래미가 오랫동안 권위를 유지한 기반이었다. 판매량과 팬덤 규모가 아닌 음악적 성취를 제작 현장의 전문가가 판단한다는 명분이다. 가장 많이 팔린 음악이 반드시 가장 뛰어난 작품은 아니며, 작은 장르와 독립 창작자를 시장 성적만으로 평가해서도 안 된다. 그래미가 인기상과 다른 자리를 확보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동료평가가 세계의 보편적 평가를 뜻하지는 않는다. 투표권을 가진 동료가 어느 산업에서 활동하는지, 어떤 음악에 익숙한지, 어떤 언어와 문화적 배경을 이해하는지에 따라 판단의 범위는 달라진다. 미국 음악산업 종사자의 선택은 미국 음악산업의 동료평가일 수 있지만, 세계 음악의 최종 판정으로 자동 승격되지는 않는다.

그래미는 미국 국내 음악상의 구조를 유지하면서 세계 최고 음악상의 권위까지 누려왔다. 미국 산업 내부의 투표 결과가 국제 언론과 방송, 음반 홍보와 공연시장에 반복되면서 ‘그래미 수상자’는 세계적인 품질 보증서처럼 작동했다. 미국에서 받은 트로피 하나가 음악사에서 차지할 위치까지 결정하는 문화적 승인권을 행사했다.

세계 음악이 미국을 거쳐야만 세계로 나갈 수 있던 시기에는 체계가 강하게 작동했다. 음반 유통과 라디오, 텔레비전과 언론이 미국을 중심으로 연결됐고, 그래미는 산업의 중심에서 권위를 배분했다. 스트리밍과 소셜미디어, 초국적 팬덤이 등장한 뒤 음악의 이동 경로는 달라졌다.

2025년 세계 음반산업 매출은 6.4% 증가했다. 중동·북아프리카와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는 각각 15.2% 성장했고, 멕시코는 세계 10대 음반시장에 진입했다. 미국 시장의 규모가 작아진 것이 아니라 미국 밖 시장과 청취자가 더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한국어 음악은 미국 라디오에 먼저 선곡되지 않아도 남미와 유럽, 아시아와 중동의 청취자에게 도달한다. 팬들은 가사를 번역하고 영상을 공유하며 공연 수요를 만든다. 미국에서 인정받은 뒤 세계로 이동하던 한 방향의 세계화가 여러 지역에서 동시에 선택받는 다방향 구조로 바뀌었다.

BTS는 그래미 공식 기록상 다섯 차례 후보에 올랐고 수상은 한 차례도 하지 못했다. ‘Dynamite’와 ‘Butter’, 콜드플레이(Coldplay)와 함께한 ‘My Universe’가 팝 듀오·그룹 퍼포먼스 후보에 올랐다. ‘Yet To Come’은 뮤직비디오 부문 후보였으며, 콜드플레이 앨범 참여 기록으로 올해의 앨범 후보 명단에도 포함됐다. BTS의 정규앨범이 올해의 앨범 후보로 선정된 기록은 없다.

후보 5회·수상 0회라는 숫자가 그래미의 부당성을 자동으로 증명하지는 않는다. 차트 1위와 판매량이 수상 자격을 보장해서도 안 된다. 그래미의 실패는 BTS에게 트로피를 주지 않았다는 결과 하나보다 BTS의 음악을 어떤 자리에서 평가했는지에 놓여 있다.

그래미는 BTS를 세계적인 흥행 스타와 공연자로 받아들였다. 평가 체계에서는 팝 그룹의 퍼포먼스, 협업곡, 영상 분야를 중심으로 호명했다. 한국어 앨범과 BTS가 쌓아온 전체 음악 서사는 최고상 경쟁에서 본격적으로 다뤄지지 않았다. 2027년에는 뒤늦게 아시안 팝이라는 별도 칸을 내놓았다.

새로운 칸을 만드는 방식은 미국 문화가 다양성을 받아들이는 오래된 습관과 닮았다. 중심의 기준은 그대로 두고, 중심 밖에서 커진 문화를 위한 별도의 자리를 마련한다. 트로피 수는 늘어나지만 누가 보편이고 누가 지역인지 나누는 권한은 미국 기관이 계속 쥔다.

그래미의 몰락은 모든 수상자가 잘못됐다는 뜻이 아니다. 2026년 배드 버니(Bad Bunny)의 ‘DeBÍ TiRAR MáS FOToS’가 스페인어 앨범 최초로 올해의 앨범을 받은 기록은 분명한 변화다. 비영어권 음악도 그래미 최고상에 오를 수 있다는 사실이 실제 수상 결과로 남았다.

변화가 있었다는 사실은 그래미가 이미 충분히 달라졌다는 결론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스페인어 음악이 미국과 세계시장에서 거대한 영향력을 확보한 뒤에야 최고상 최초 기록이 나왔다. 그래미가 세계 음악의 흐름을 발견했다기보다 더는 외면하기 어려워진 시장을 뒤늦게 승인했다고 보는 편이 가깝다.

아시안 팝 부문도 같은 시간차에서 나왔다. K팝이 빌보드 차트와 스타디움 공연, 음반 판매와 글로벌 플랫폼에서 영향력을 확보한 지 오래된 뒤 그래미가 지역 부문을 만들었다. 세계 음악의 변화를 앞서 기록하는 기관이 아니라 시장이 충분히 커진 다음 새로운 이름표를 붙이는 기관으로 밀려난 모습이다.

시청률도 권위의 변화를 보여주는 자료 가운데 하나다. 2026년 그래미 시청자는 1441만명으로 전년보다 6.4% 줄었다. 2024년 1690만명, 2025년 1540만명에 이어 2년 연속 감소했다. 그래도 미국에서 다른 주요 시상식보다 많은 시청자를 모았고 소셜미디어 영상과 상호작용도 높은 수준을 기록했다. 그래미의 영향력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텔레비전 한 곳에 집중됐던 권위가 여러 플랫폼으로 흩어지고 있다.

트로피의 가치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신인과 독립 음악인에게 그래미 후보와 수상은 언론 노출과 공연 기회를 넓히는 강력한 경력이다. 생방송 공연과 수상 결과는 음원 소비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래미는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음악상 가운데 하나다.

몰락은 소멸과 다르다. 과거처럼 그래미가 선택한 음악만 세계 음악사의 중심에 서는 독점력이 무너지고 있다는 뜻이다. 그래미가 선택하지 않은 음악도 세계적인 팬덤과 공연시장, 문화적 영향력을 구축할 수 있다. 이미 세계시장을 확보한 아티스트는 그래미 심사에 들어갈 것인지부터 선택할 수 있게 됐다.

BTS의 불출품은 변화된 권력관계를 선명하게 만들었다. 한국 가수가 미국 최고 음악상의 후보 지명을 기다리던 단계에서 미국 시상식이 제시한 인정 방식의 적절성을 판단하는 단계로 이동했다. 그래미가 BTS의 가치를 승인하는 일보다 BTS가 그래미의 분류 체계를 받아들일지가 먼저 논쟁거리가 됐다.

미국 문화의 몰락도 미국 음악과 영화, 예술이 사라진다는 뜻이 아니다. 미국을 세계의 기본값으로 놓고 다른 언어와 지역의 문화를 별도의 범주에 배치해온 질서가 힘을 잃고 있다는 의미다. 세계는 미국 문화를 계속 소비하지만 미국의 승인만을 기다리지는 않는다.

그래미는 미국이 자신을 세계와 동일시했던 시대의 대표적인 트로피다. 미국 음악산업의 동료들이 선택한 결과를 ‘음악계 최고의 밤’이라는 이름으로 세계에 내보냈다. 산업의 내부 평가가 세계 문화의 최종 서열로 받아들여지는 동안 미국의 취향은 보편으로, 다른 지역의 음악은 장르와 지역으로 분류됐다.

세계 음악시장은 이미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청취자는 여러 언어의 음악을 같은 재생목록에서 듣고, 팬은 국경을 넘어 작품을 번역하고 유통한다. 아티스트는 미국의 방송과 시상식에 들어가기 전부터 세계 관객과 만난다. 그래미가 새 부문을 만들 때마다 세계는 이미 다음 문화로 이동해 있다.

그래미가 가치를 되찾으려면 트로피를 더 많이 나눠주는 데서 멈출 수 없다. 아시아 음악을 아시안 팝에 넣고, 라틴 음악을 라틴 부문에 넣은 뒤 다양성이 확대됐다고 선언해서는 부족하다. 여러 언어와 지역의 음악이 일반 팝과 본상에서도 동등하게 평가받을 수 있는 회원 구성과 청취 경험, 분류 기준을 갖춰야 한다.

첫 아시안 팝 후보 명단은 2026년 11월 공개되고 수상자는 2027년 2월 결정된다. 후보들이 올해의 앨범·레코드·노래와 기존 팝 부문에서도 함께 평가받는지, 아시안 팝이 주요 무대에서 어떤 비중으로 다뤄지는지가 신설 부문의 성격을 가르게 된다. 부문 하나가 늘었다는 사실보다 중심부의 문이 실제로 넓어졌는지가 중요하다.

BTS는 첫 아시안 팝 트로피를 놓고 경쟁하지 않는다. 그래미 공식 기록에는 후보 5회·수상 0회가 남고, BTS의 음악은 그래미 심사 밖에서 세계시장을 이어간다. 트로피가 BTS의 세계적 가치를 완성해 주는 시기는 지나갔다.

그래미가 잃어버린 가치는 금빛 축음기 자체가 아니다. 세계의 음악을 누구보다 먼저 발견하고 가장 설득력 있게 기록한다는 신뢰다. 시장보다 늦게 움직이고, 다양성을 별도의 칸으로 관리하며, 미국 산업의 판단을 세계적 보편으로 내세우는 동안 트로피의 광택만 남았다.

그래미는 몰락하는 미국 문화의 상징이다. 미국 문화가 약해져서가 아니라 미국만이 세계 문화의 중심을 정할 수 있다는 믿음이 무너지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는 더 이상 그래미의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지 않는다. 그래미가 세계의 음악을 따라잡아야 하는 시대가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