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사마 70년②] 1959년 뉴욕 초기작, 호박 너머의 쿠사마
‘The Pacific Ocean No. A.B.X.’로 시작한 뉴욕 활동기…반복과 증식의 출발점에서 다시 세운 작가 연대기
[KtN 임민정기자]홍콩 소더비 메종의 야요이 쿠사마(Yayoi Kusama) 전시에는 노란 호박보다 앞선 시간이 있다. 1959년 제작된 ‘The Pacific Ocean No. A.B.X.’다. 잉크와 파스텔, 과슈를 사용한 종이 작업으로, 쿠사마가 미국 뉴욕에 정착한 이듬해 완성했다.
작품명에는 일본과 미국 사이에 놓인 태평양이 등장한다. 바다를 건넌 경험이 작품에 직접 반영됐는지는 공개 자료만으로 단정할 수 없지만, 제작 시기는 분명하다. 일본에서 작은 종이 작업을 제작하던 쿠사마가 뉴욕의 대형 회화로 옮겨가던 때다. 소더비는 70년의 활동을 보여주는 전시에서 1959년작을 앞세워 호박과 물방울무늬가 만들어지기 전 쿠사마를 불러냈다.
쿠사마는 1958년 6월 뉴욕에 도착했다. 당시 나이는 29세였다. 일본에서 제작한 잉크와 과슈 작업을 다수 가져갔고, 정착 초기에는 회화에 집중했다. 작은 종이 위에 그렸던 생물 형태의 추상 이미지는 뉴욕에서 캔버스 전체를 덮는 반복 무늬로 바뀌었다.
변화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쿠사마는 1959년 10월 뉴욕 이스트 10번가 브라타 갤러리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벽면을 채울 만큼 큰 흰색 단색 회화 다섯 점을 내걸었다. 캔버스 가장자리까지 이어지는 작은 고리와 그물 무늬는 이후 ‘인피니티 네트(Infinity Nets)’로 불렸다.
뉴욕현대미술관(MoMA)이 소장한 1959년작 ‘No. F.’에서도 같은 변화가 확인된다. 흰 바탕 위에 작은 붓질이 빽빽하게 이어지고, 형상과 배경의 구분은 흐려진다. 한 부분을 강조하는 중심 구도 대신 반복되는 단위가 작품 전체에 같은 비중으로 펼쳐진다. 추상표현주의의 전면회화와 미니멀리즘의 반복 구조에 닿아 있으면서도 쿠사마의 작업 과정은 작고 촘촘한 손의 움직임에 기반했다.
‘The Pacific Ocean No. A.B.X.’는 대형 인피니티 네트와 재료도, 크기도 다르다. 두 작품을 같은 형식으로 묶을 수는 없다. 다만 작은 단위를 되풀이해 작품 전체로 확장하는 방식은 쿠사마의 초기 종이 작업과 뉴욕 회화 사이에 놓인 연결고리를 보여준다.
1950년대 말 뉴욕 미술계는 잭슨 폴록(Jackson Pollock)과 마크 로스코(Mark Rothko)로 대표되는 추상표현주의의 영향이 이어지는 가운데 단색화와 반복, 산업 재료를 앞세운 새로운 움직임이 나타나던 시기였다. 쿠사마는 대형 캔버스를 택했지만 거친 몸짓이나 굵은 붓질 대신 작은 고리를 수없이 그렸다.
반복은 기계적인 복제와도 달랐다. 고리의 크기와 간격, 물감의 두께에는 손으로 그린 차이가 남았다. 멀리서는 하나의 그물처럼 이어지고, 가까이에서는 수많은 붓질이 드러난다. 작품 한가운데 시선을 붙잡는 인물이나 사물도 없다. 관람자의 눈은 한곳에 머물지 않고 캔버스 가장자리까지 움직인다.
쿠사마는 1960년대 들어 반복을 회화 밖으로 옮겼다. 우편 스티커와 가격표, 사무용 라벨을 붙인 콜라주를 제작했고, 의자와 소파, 다리미판 같은 생활용품에는 천으로 만든 돌출물을 빽빽하게 덮었다. 반복되는 형상이 캔버스에서 사물로 옮겨가면서 ‘어큐뮬레이션(Accumulation)’ 연작이 형성됐다.
이후 거울과 빛을 이용한 설치에서는 실제 공간이 끝없이 이어지는 것처럼 보이도록 만들었다. 호박에 반복되는 점도 같은 계보에 놓인다. 종이 위의 작은 형상에서 시작한 반복이 대형 회화와 생활용품, 설치 공간, 대표 도상으로 이동한 셈이다.
소더비 메종은 초기 종이 작업과 인피니티 네트, 호박 계열 작품을 함께 배치했다. 서로 다른 시기의 작품을 나란히 놓으면 호박의 점이 독립된 장식 무늬가 아니라 초기부터 이어진 반복 구조의 일부로 읽힌다. 널리 알려진 대표 이미지에서 출발해 1950년대 작업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관람도 가능하다.
작가의 70년을 다시 묶는 전시는 쿠사마를 소비하는 방식에도 차이를 만든다. 호박은 색과 형태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고 조각, 회화, 판화, 상품으로 폭넓게 제작됐다. 초기 종이 작업은 크기가 작고 색채도 상대적으로 절제돼 있다. 제작 배경과 이후 작업의 변화를 함께 살펴야 작품의 위치가 드러난다.
홍콩 경매시장에서는 초기 작품의 희소성이 이미 가격에 반영됐다. 1959년작 ‘Interminable Net #4’는 2019년 소더비 홍콩에서 6254만홍콩달러에 거래됐다. 2023년 홍콩 경매에 나온 1955년작 ‘A Gill’은 483만홍콩달러, 1953년작 ‘“D” Flower’는 108만홍콩달러에 낙찰됐다. 두 작품 모두 추정가 상단을 넘어섰다.
제작 시기가 같다는 이유만으로 가격을 직접 비교할 수는 없다. 작품의 크기와 재료, 보존 상태, 출처, 전시 이력에 따라 거래 조건이 달라진다. 대형 인피니티 네트와 소형 종이 작업 사이에는 매체와 규모의 차이도 크다. 1950년대라는 연대만으로 시장 가치를 하나로 묶는 접근은 경계해야 한다.
소더비가 ‘The Pacific Ocean No. A.B.X.’를 전시 주요 작품으로 소개한 선택은 초기 작업에 대한 관심을 높인다. 대표작에 집중된 시장에서 작가의 제작 시기와 매체를 세분화하고, 종이 작업의 미술사적 위치를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호박으로 쿠사마를 알게 된 관람객에게는 같은 작가를 다시 읽는 출발점이 된다.
쿠사마의 현재 명성만 놓고 보면 뉴욕 초기 활동기의 불안정한 위치는 가려지기 쉽다. 195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초까지 뉴욕 전위미술 현장에서 활동했지만 장기간의 비평적·재정적 지원을 확보하지는 못했다. 1970년대 일본으로 돌아온 뒤에는 국제 미술계의 관심에서 한동안 멀어졌다.
1990년대 이후 대규모 회고전과 국제 전시가 이어지면서 뉴욕 시기의 의미도 다시 평가됐다. 1998년 뉴욕현대미술관은 1958년부터 1968년까지의 활동을 다룬 ‘Love Forever: Yayoi Kusama, 1958–1968’을 열었다. 인피니티 네트와 어큐뮬레이션, 퍼포먼스로 이어진 10년을 재검토하며 쿠사마를 뉴욕 전위미술의 주요 작가로 복원했다.
홍콩 소더비의 1959년작도 재평가가 축적된 흐름 위에 놓였다. 다만 미술관이 연구와 소장품을 통해 미술사를 다시 썼다면 경매회사는 작품의 희소성과 소장 가능성을 함께 다룬다. 초기작을 전시하는 행위가 미술사적 설명에 머물지 않고 거래시장의 관심 범위를 넓히는 이유다.
‘The Pacific Ocean No. A.B.X.’에서 시작한 작은 반복은 인피니티 네트와 어큐뮬레이션, 거울 설치와 호박으로 이어졌다. 소더비 메종은 완성된 대표 이미지보다 반복이 형성되던 시기를 앞에 놓았다. 호박이 쿠사마의 대중성을 만들었다면 1959년 뉴욕 초기작은 70년의 작업이 시작된 위치와 홍콩 시장이 다시 주목하는 작품군을 함께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