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사마 70년③] 꽃·포도·핸드백, 세 갈래로 나눈 반복의 세계
자연과 동식물, 도시·팝으로 엮은 70년…익숙한 도상을 넓힌 대신 퍼포먼스와 반전 활동은 축소
[KtN 임민정기자]붉은 바탕 위로 포도송이가 매달리고, 꽃과 나비는 검은 점과 강한 색으로 뒤덮였다. 핸드백과 구두 같은 일상용품도 야요이 쿠사마(Yayoi Kusama)의 반복 무늬 안으로 들어왔다. 홍콩 소더비 메종은 서로 다른 소재와 제작 시기를 세 갈래로 나눠 쿠사마의 70년을 펼쳐 놓았다.
전시를 구성하는 주제는 ‘Nature and Nurture’, ‘Fauna and Flora’, ‘The Urban and Pop’이다. 자연에서 출발해 동식물을 지나 도시와 소비문화로 이동한다. 제작연도를 차례로 따라가는 연대기보다 관람객이 쉽게 알아볼 수 있는 소재를 앞세웠다.
쿠사마의 작업은 시기마다 재료와 규모가 달라졌지만 자연과 생물은 꾸준히 등장했다. 어린 시절부터 그린 꽃과 식물은 미국으로 건너가기 전의 종이 작업에 남았고, 일본으로 돌아온 뒤에는 강한 원색과 검은 윤곽선을 두른 이미지로 다시 나타났다. 호박과 포도, 꽃, 나비, 물고기, 산은 점과 선이 반복되는 구조 안에서 서로 연결됐다.
1988년작 ‘Sunset Grapes’는 ‘Nature and Nurture’와 ‘Fauna and Flora’를 잇는 작품이다. 붉은 바탕과 포도송이의 녹색이 강하게 맞서고, 포도알은 작은 원의 반복으로 표현됐다. 줄기와 잎은 자연 그대로의 비례나 색을 따르지 않는다. 쿠사마는 포도의 형태를 남긴 채 색과 무늬를 확대해 장식성과 생명력이 함께 드러나는 이미지로 바꿨다.
포도는 한 송이의 정물로 머물지 않는다. 둥근 알이 연속되면서 쿠사마가 오랫동안 다뤄온 점의 구조와 만난다. 식물의 성장과 열매의 증식이 반복되는 원으로 옮겨졌다. 자연물을 묘사한 작품과 인피니티 네트, 물방울무늬 작업 사이의 거리가 가까워지는 대목이다.
꽃을 다룬 작품에서도 실제 식물의 세밀한 묘사보다 색과 윤곽, 반복이 앞선다. 꽃잎과 잎, 줄기는 검은 선으로 구획되고 안쪽에는 점과 작은 무늬가 채워진다. 한 송이의 꽃이 확대되거나 여러 식물이 촘촘하게 놓이면서 캔버스 전체가 하나의 패턴처럼 이어진다.
쿠사마에게 자연은 평온한 풍경만을 뜻하지 않았다. 식물은 자라고 번지며 공간을 차지한다. 반복되는 꽃잎과 포도알, 호박의 점은 생명의 증식을 연상시키는 동시에 한 형상이 끝없이 이어지는 밀집감을 만든다. 밝은 색채 아래에는 확대와 반복을 멈추지 않는 쿠사마 특유의 조형 방식이 놓여 있다.
‘Fauna and Flora’ 구역은 꽃과 과일, 동물 이미지를 한데 모은다. 작품마다 소재는 달라도 강한 윤곽선과 평면적인 색, 내부를 채우는 반복 무늬가 이어진다. 식물과 동물은 배경에서 분리된 독립된 대상이 아니라 주변의 점과 선에 섞여 들어간다.
쿠사마의 호박도 같은 흐름에서 읽을 수 있다. 호박은 어린 시절부터 접한 친숙한 농작물이면서 작가를 대표하는 도상이 됐다. 둥글고 굴곡진 몸체는 점을 반복해 배치하기에 적합하고, 줄기에서 아래로 이어지는 선은 부피감을 만든다. 노란색과 검은색의 강한 대비가 더해지면서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는 이미지가 완성됐다.
홍콩 소더비는 호박을 전시의 유일한 중심으로 세우지 않았다. 포도와 꽃, 물고기, 산을 함께 보여주며 대표 도상이 형성된 배경을 넓혔다. 호박만 따로 보면 하나의 유명 이미지로 받아들이기 쉽지만 다른 자연물과 나란히 놓으면 반복과 증식이라는 오랜 작업 방식이 드러난다.
가로로 긴 산 그림에서는 자연을 다루는 또 다른 방식이 나타난다. 산의 윤곽과 능선은 검은 선으로 강조되고, 푸른색과 녹색의 반복 무늬가 주변을 채운다. 실제 풍경의 깊이와 원근을 옮기기보다 산을 하나의 표식처럼 단순화했다.
꽃과 포도, 산을 함께 묶은 전시 구성은 쿠사마의 자연 이미지가 특정 시기에 머물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초기 종이 작업의 생물 형태와 후반기 회화의 원색 이미지는 외형이 다르지만, 대상을 반복되는 선과 점으로 바꾸는 태도는 이어진다.
전시 후반의 ‘The Urban and Pop’에서는 관심이 도시의 생활용품과 소비문화로 이동한다. 1984년작 ‘Handbag’은 가방이라는 일상적 사물을 회화의 중심에 놓았다. 핸드백과 구두, 의자, 의복은 누구나 형태와 용도를 알아볼 수 있으면서 패션과 소비, 신체의 관계를 함께 품은 소재다.
쿠사마는 1960년대 뉴욕에서 생활용품을 미술의 재료로 끌어들였다. 의자와 소파, 다리미판, 신발을 천으로 만든 돌출물로 덮은 ‘어큐뮬레이션(Accumulation)’ 연작이 대표적이다. 가정과 일상에 속한 사물은 반복되는 형상에 뒤덮이며 본래의 기능을 잃었다.
반복은 도시의 소비 체계와도 맞닿았다. 쿠사마는 우편 스티커와 가격표, 사무용 라벨, 달러 지폐를 이용해 콜라주를 제작했다. 대량으로 생산된 물건과 기호를 손으로 거듭 붙이며 소비사회의 반복 구조를 작품으로 옮겼다. 일상용품을 다룬 회화도 같은 활동에서 분리해 보기 어렵다.
패션은 일시적인 협업으로 갑자기 등장한 영역이 아니었다. 쿠사마는 1960년대 후반 뉴욕에서 의복을 제작하고 패션 사업을 운영했다. 신체 일부가 드러나는 옷과 반복 무늬를 적용한 의상은 당시 퍼포먼스와 연결됐다. 이후 명품 브랜드와의 협업으로 널리 알려진 물방울무늬 패션에도 뉴욕 활동기의 작업이 앞서 있었다.
‘Handbag’은 현재의 명품 소비시장과도 직접 만나는 소재다. 소더비 메종이 자리 잡은 랜드마크 채터는 명품 매장이 밀집한 상업지역이다. 작품 속 가방과 실제 명품이 유통되는 장소가 한 건물 안에서 겹친다. 미술과 패션, 소비재를 오간 쿠사마의 작업은 소더비가 미술품과 보석, 시계, 가방을 함께 취급하는 사업 구조와도 맞아떨어진다.
세 주제로 나눈 구성은 70년에 걸친 방대한 작업을 짧은 동선 안에서 이해하도록 돕는다. 자연과 동식물, 도시라는 구분은 전문적인 미술사 지식이 없어도 접근하기 쉽다. 꽃과 포도, 호박, 가방처럼 이름을 바로 붙일 수 있는 소재가 관람을 안내한다.
주제 중심의 배열은 제작 시기 사이의 간격도 줄인다. 1950년대 종이 작업과 1980년대 회화, 2000년대 판화를 소재와 반복이라는 공통점으로 묶을 수 있다. 한 작가 안에서 매체와 크기가 다른 작품을 비교하기에도 편리하다.
전시의 읽기 쉬운 구조가 쿠사마의 활동 전부를 담지는 못한다. 1960년대 뉴욕에서 벌인 해프닝과 신체 퍼포먼스, 베트남전쟁 반대 활동, 성과 권력에 대한 표현은 자연·동식물·도시라는 세 구획 안에서 충분히 드러나지 않는다. 생활용품을 돌출물로 뒤덮은 초기 조각의 성적 긴장도 밝은 색의 판화와 회화 뒤로 물러난다.
1969년 쿠사마는 뉴욕현대미술관 조각정원에 신체를 드러낸 공연자들과 들어가 허가받지 않은 퍼포먼스를 벌였다. 미술 제도와 전쟁, 권위를 향한 항의가 작업에 함께 들어 있던 시기다. 현재 대중에게 익숙한 꽃과 호박만으로는 당시의 급진성을 모두 설명하기 어렵다.
홍콩 소더비 전시는 쿠사마의 반복을 가장 친숙한 소재로 정리했다. 포도와 꽃에서 출발해 호박을 거쳐 핸드백으로 이동하는 동선은 자연의 증식과 도시의 소비를 한 작가 안에 연결한다. 관람객은 대표 도상 밖의 작품을 만나지만, 퍼포먼스와 반전 활동보다 소장과 전시에 적합한 회화·판화가 앞에 놓인다.
세 갈래로 나눈 70년은 쿠사마의 작업을 넓히는 동시에 일부를 덜어냈다. 자연과 동식물, 도시의 사물은 반복과 증식이 오랜 기간 이어졌다는 사실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전시장 밖에 남은 신체와 정치, 제도 비판의 활동까지 함께 살필 때 밝은 색과 친숙한 도상 뒤에 놓인 쿠사마의 전체 윤곽이 가까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