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elier] 엄효용 ‘wonmisan norway spruce winter’, 여러 나무의 시간이 겹쳐진 한 그루
같은 품종의 나무를 반복 촬영해 한 장에 중첩…개별 기록이 모여 완성한 원미산의 겨울
[KtN 박준식 기자] 옅은 청회색과 흰색이 작품 전면을 채운다. 중앙에는 길고 어두운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밑동에서 시작한 나무줄기는 위로 곧게 뻗고, 가지가 펼쳐지는 부분부터 윤곽이 서서히 흐려진다. 주변에는 여러 나무의 흔적이 가는 선과 옅은 얼룩으로 겹쳐 있다.
가까이 다가가면 중앙의 나무도 하나의 선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줄기와 가지를 이루는 흔적들이 조금씩 어긋나 있고, 가지와 잎이 만든 외곽선은 흰색과 청회색 사이로 흩어진다. 거리를 두면 복잡하게 얽힌 선들이 모여 침엽수 한 그루를 만든다. 가까이에서는 여러 나무가, 멀리에서는 한 그루가 들어온다.
엄효용(Um Hyoyong·嚴孝鎔)의 ‘원미산 노르웨이가문비 겨울(wonmisan norway spruce winter)’은 한 번의 촬영으로 완성한 풍경사진과 다르다. 같은 품종의 나무를 반복 촬영한 뒤 여러 이미지를 한 장에 포갔다. 서로 다른 나무의 윤곽은 겹칠수록 흐려지고, 여러 사진에서 비슷한 위치에 놓인 나무줄기는 중앙에 짙게 남는다.
겹칠수록 흐려지는 나무
한 그루씩 촬영된 나무는 저마다 다른 생김새를 지닌다. 나무마다 줄기의 굵기와 가지가 뻗은 방향, 가지와 잎이 퍼진 모양이 다르다. 엄효용은 각각의 사진을 한 장에 거듭 포갠다. 비슷한 위치에 놓인 줄기는 반복될수록 짙어지고, 제각기 다른 방향으로 뻗은 가지는 여러 가는 선으로 퍼진다.
작품 아래쪽의 나무줄기는 가장 어둡고 선명하다. 위로 올라갈수록 줄기의 경계가 부드러워지고, 가지가 퍼진 위쪽에서는 여러 선이 복잡하게 교차한다. 중앙의 나무 뒤로 가느다란 수직선들이 반복되면서 숲이 계속 이어지는 듯한 깊이가 생긴다.
사진을 더할수록 특정 나무의 모습은 오히려 희미해진다. 중첩이 끝난 뒤 나타난 나무는 촬영된 어느 한 개체의 초상이 아니다. 여러 나무에서 반복되는 형태와 서로 다른 세부가 한곳에 모여 현실에는 없는 한 그루를 완성한다.
나무마다 다른 모습은 중첩 과정에서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어긋난 가지는 짧은 선들의 떨림으로 남고, 높이가 다른 가지와 잎은 넓게 번진 회색의 층이 된다. 공통점은 중앙의 나무를 세우고, 차이는 주변 숲의 깊이를 만든다.
작고 다양한 단위가 모여 하나의 전체를 이룬다는 2026년의 ‘픽셀라이프(Pixelated Life)’라는 말도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한 장씩 독립돼 있던 나무 사진은 포개진 뒤 줄기와 가지, 숲의 일부로 자리를 바꾼다. 각각의 사진은 전면에 드러나지 않지만 이미지마다 남긴 차이가 한 그루의 깊이를 결정한다.
엄효용의 나무는 한 그루인 동시에 여러 그루다. 가까이에서는 촬영된 나무들의 차이가 드러나고, 멀리에서는 하나의 형상으로 모인다. 개별 나무의 기록과 여러 나무가 만든 공통의 형태가 한 장에 함께 남는다.
흰색과 청회색으로 남은 겨울
백색과 옅은 청회색이 작품을 차분하게 감싼다. 짙은 녹색이나 강한 명암 대신 낮은 채도의 색이 여러 겹 쌓였다. 앞쪽과 뒤쪽의 나무는 뚜렷하게 나뉘지 않고, 중앙의 나무줄기를 제외한 대부분의 형태가 흰 바탕으로 스며든다.
흰색은 비어 있는 여백이 아니다. 여러 나무의 가지와 잎, 주변 풍경이 반복해서 겹쳐진 밝은 층이다. 작품 상단에는 가지와 잎의 흔적이 구름처럼 퍼지고, 하단에는 가느다란 나무줄기들이 수직으로 이어진다. 가까이에서는 수많은 선이 먼저 보이고, 멀리에서는 희뿌연 겨울 숲이 들어온다.
중앙의 나무줄기도 하나의 검은 선으로 고정되지 않는다. 짙은 회색과 청회색의 흔적들이 겹치며 농도를 높인다. 곧게 선 나무의 형태는 유지되지만 줄기에는 미세한 흔들림이 남아 있다. 한순간을 촬영한 사진에서는 얻기 어려운 시간의 두께다.
여러 사진의 중첩은 회화와 닮은 질감을 만든다. 가지가 교차하는 부분은 연필이나 목탄으로 여러 차례 그은 자국처럼 보이고, 옅은 얼룩은 묽은 물감을 겹쳐 올린 흔적을 떠올리게 한다. 물감으로 그린 결과가 아니라 실제 나무를 촬영한 사진들이 포개지면서 생긴 변화다.
중앙의 짙은 나무줄기는 시선을 모으지만 주변의 숲을 밀어내지 않는다. 가는 선과 옅은 얼룩도 나무줄기와 함께 작품을 구성한다. 중심의 나무와 뒤편의 숲, 구체적인 형태와 추상적인 흔적이 서로의 경계를 조금씩 나눠 갖는다.
개별 나무에서 공통의 형태로
반이정 미술평론가는 엄효용의 나무 연작을 개별 존재와 보편적 개념의 관계를 다룬 서양철학의 보편논쟁(Controversy of Universals)과 연결했다. 촬영된 나무는 저마다 다른 개체지만, 여러 사진을 포갠 작품에는 같은 품종이 공유하는 형태가 남는다.
‘원미산 노르웨이가문비 겨울’에서도 개별 나무의 세부보다 여러 나무에서 공통으로 남은 형태가 먼저 들어온다. 줄기와 가지의 구체적인 모습은 흐려졌지만 침엽수가 위로 뻗는 구조는 유지된다. 중앙의 한 그루는 공통된 형태로 세워지고, 나무마다 다른 가지의 흔적은 주변의 흐릿한 숲을 이룬다.
작품명은 중첩 과정에서 희미해진 장소와 계절을 붙잡는다. ‘wonmisan’은 원미산이라는 장소를, ‘winter’는 겨울이라는 계절을 기록한다. 개별 나무의 생김새는 포개져 흐려지지만 나무를 마주한 장소와 계절은 제목에 남는다.
완성된 작품에서는 촬영 순서를 가려낼 수 없다. 먼저 촬영된 나무와 나중에 촬영된 나무가 같은 자리에 놓이고, 서로 다른 순간들이 중앙의 나무와 주변 숲을 함께 구성한다. 여러 시간이 한 장에 포개지면서 나무는 흐릿한 외곽과 깊은 흔적을 동시에 얻는다.
사물의 양면에서 나무의 시간으로
엄효용은 나무 연작 이전부터 이미지 중첩을 이어왔다. 초기 작업에서는 동전과 전원 스위치, 캔버스 등 일상적인 사물의 앞뒤나 좌우를 한 장에 겹쳤다. 하나의 시점에서 동시에 볼 수 없는 여러 면을 포개 대상의 구조에 접근했다.
작가노트에는 겉과 속, 앞과 뒤, 빔과 참처럼 대립하는 개념 속에서 숨은 조화를 찾으려 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서로 반대되는 것들이 실은 서로 의존한다는 생각은 하나의 면만을 선택하지 않는 제작 방식으로 이어졌다.
나무 연작에서는 같은 품종에 속한 여러 나무가 한자리에 모인다. 이미지를 겹치는 방법은 이어졌지만 작업의 무게는 사물의 양면에서 자연의 반복과 생명의 시간으로 옮겨갔다.
홍익대학교 산업미술대학원에서 사진디자인을 전공한 엄효용은 2000년대부터 이미지 중첩을 작업의 중심에 놓아왔다. 2010년 개인전 ‘The Hidden Harmony’에서는 사물의 앞뒤와 좌우를 포갔고, 2016년 개인전 ‘여기, 지금, 나무’에서는 같은 품종의 나무 이미지를 중첩한 연작을 선보였다.
2020년과 2024년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 2021년 ‘진실의 실체가 나타날 때’, 2023년 ‘Auspicious Snow’와 ‘그날, 나무’로 자연과 시간에 대한 작업을 이어갔다. 2025년에는 스페인과 스위스에서 열린 단체전에 참여하며 해외 전시 활동을 계속했다.
‘여기, 지금, 나무’라는 연작명에는 장소와 시간, 대상이 나란히 놓인다. 하나의 위치와 순간을 뜻하는 ‘여기’와 ‘지금’은 여러 나무와 여러 시간이 포개진 작품 안에서 넓어진다. 한순간을 기록하는 사진은 수많은 순간을 한 장에 축적하는 매체로 바뀐다.
배경에 머물던 나무를 다시 바라보는 방식
도시와 생활권 주변에 심어진 나무는 도로와 건물, 보행로를 구성하는 조경 요소로 받아들여지기 쉽다. 같은 품종의 나무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놓이면 개별 나무의 생김새보다 줄지어 선 전체 풍경이 먼저 들어온다.
엄효용은 배경에 머물던 나무를 한 그루씩 독립된 촬영 대상으로 옮긴다. 촬영할 때는 개별 나무를 분리해 기록하고, 중첩 과정에서는 다시 하나의 형상으로 모은다. 한 그루를 오래 바라보는 일과 여러 그루를 한꺼번에 바라보는 일이 같은 작업 안에서 이어진다.
반복된 촬영과 정교한 중첩에는 긴 제작 시간이 들어간다. 중앙의 선명한 나무줄기와 주변의 흐릿한 숲은 같은 제작 과정에서 나왔다. 여러 사진에서 공통으로 겹친 부분은 짙어지고, 서로 어긋난 부분은 옅게 퍼졌다. 구체적인 나무의 형태와 추상적인 흔적이 한 장에 함께 놓이는 이유다.
2025년 세계 미술품 경매에서는 1만 달러 미만 작품이 전체 거래 수량의 약 90%를 차지했다. 최고가 작품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거래의 폭이 넓어지면서 오랜 시간 일관된 제작 방식을 쌓아온 작가와 연작의 흐름도 작품을 구분하는 기준으로 자리 잡고 있다.
빠르게 교체되는 이미지와 유행 속에서 엄효용은 한 대상을 반복해서 촬영하고 포개는 느린 방식을 택한다. 완성된 사진 한 장보다 이미지가 쌓이는 과정과 연작의 긴 흐름을 함께 바라보게 한다.
2020년 원미산의 겨울을 기록한 나무들은 한 장 안에서 하나의 형상으로 포개졌다. 각각의 생김새는 희미해졌지만 서로 다른 가지의 흔적은 옅은 선과 얼룩으로 남았다. 중앙에 선 한 그루는 나무들의 공통점으로 형태를 얻고, 서로 다른 모습으로 깊이를 얻었다.
개별 나무의 윤곽은 흐려졌지만 촬영된 존재들의 흔적까지 사라지지는 않았다. 짙은 나무줄기와 옅게 흩어진 가지마다 서로 다른 나무와 시간이 남아 있다. 한 그루처럼 보이는 작품 안에 여러 생명의 겨울이 포개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