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PE167③] 레아 첸, 대만 여성 3대의 기억과 식민 통치의 흔적

가족사진·대만 문학·새로 촬영한 이미지 결합…역사적 배경은 작품 설명에 크게 의존

2026-08-05     신명준 기자
레아 첸의 ‘The Stars That Don’t Look Back’ 연작 중 한 점. 흰 머리카락과 두피를 가까이 촬영했다. The World’s Oldest Photography Exhibition Returns to London's Saatchi Gallery. 사진= Léa Chen,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KtN 신명준기자]백발이 사진을 가득 채우고 머리카락 사이로 두피의 붉은 기운이 비친다. 얼굴과 표정은 드러나지 않지만 몸에 쌓인 시간은 숨길 수 없다. 런던에서 활동하는 대만 출신 사진가 레아 첸(Léa Chen)은 대만에 사는 여성 3대의 기억을 따라가며 노화와 가족, 식민 통치가 남긴 상처를 한 연작에 묶었다.

‘The Stars That Don’t Look Back’은 영국왕립사진협회(Royal Photographic Society·RPS) 제167회 국제사진전(International Photography Exhibition 167·IPE167)의 30세 미만 작가상을 받았다. 가족이 보관해 온 사진과 대만의 근현대사, 문학 작품, 새로 촬영한 이미지를 결합한 작업이다.

첸은 가족사진에 남은 여성들의 표정과 몸짓을 살피고 어머니와 할머니 세대의 기억을 들었다. 오래된 사진 속 일부를 확대하거나 당시 모습을 다시 구성하는 방식도 사용했다. 가족이 기억하지 못하는 부분은 다른 사진과 문학 자료를 통해 연결했다. 개인의 기억만으로 복원할 수 없는 공백을 새로운 사진으로 채운 셈이다.

가족사진은 누가 언제 어디서 촬영했는지를 알려주는 기록이지만 사진 속 인물의 감정까지 보존하지는 못한다. 시간이 흐르면 촬영 당시 상황을 설명할 사람도 줄어든다. 첸의 연작은 가족사진이 간직한 정보뿐 아니라 사진 밖으로 사라진 기억까지 작업 대상으로 삼는다.

연둣빛 꽃무늬 천 위에 붉은 립스틱을 세운 레아 첸의 ‘The Stars That Don’t Look Back’ 연작 중 한 점. The World’s Oldest Photography Exhibition Returns to London's Saatchi Gallery. 사진= Léa Chen,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창가에 놓인 가구 위로 연둣빛 꽃무늬 천이 흘러내린다. 천 위에는 뚜껑을 연 붉은 립스틱 한 자루가 세워져 있다. 인물은 등장하지 않지만 사용하던 물건과 생활공간이 한 사람의 존재를 대신한다. 주름진 천과 반듯하게 세운 립스틱, 어두운 실내와 밝은 커튼의 대비가 사적인 기억의 흔적을 남긴다.

립스틱의 주인이 누구인지, 사진 속 공간이 어느 세대의 집인지는 작품만으로 확인되지 않는다. 구체적인 정보를 덜어낸 구성은 여러 가족의 기억으로 해석될 여지를 넓힌다. 반면 대만 여성 3대의 삶이라는 연작의 출발점은 희미해진다.

첸은 대만의 식민 통치와 공포정치 속에서 여성들이 겪은 어려움과 트라우마를 가족의 역사와 연결했다. 국가의 역사를 사건 사진이나 정치적 상징으로 제시하지 않고, 머리카락과 피부, 생활용품, 나무와 물 같은 가까운 대상에 남은 흔적으로 다뤘다.

대만 하카계 시인 두판팡거(杜潘芳格·Dupan Fangge)의 시 ‘아카시아 나무(The Acacia Tree)’도 연작의 바탕이 됐다. 1927년 태어난 두판팡거는 일본어 교육을 받은 뒤 중국어와 하카어로 시를 썼다. 정권과 공용어가 바뀌는 시기를 통과한 여성 작가였다.

‘아카시아 나무’의 화자는 섬에 뿌리내린 자신을 ‘여성-나무’에 빗댄다. 첸은 흙으로 뻗는 나무뿌리와 비가 지나간 뒤에도 남는 거미줄을 세대를 이어 주는 여성들의 관계와 연결했다. 자연물은 가족과 고향, 생존을 잇는 이미지로 반복된다.

공중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을 세로로 포착한 레아 첸의 ‘The Stars That Don’t Look Back’ 연작 중 한 점. The World’s Oldest Photography Exhibition Returns to London's Saatchi Gallery. 사진= Léa Chen,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물방울 사진에서는 가족과 장소를 가리키는 정보가 모두 사라진다. 크기가 다른 물방울이 위에서 아래로 이어지고, 주변은 흰빛과 회색으로 흐려졌다. 연속된 물방울 사이의 빈 공간은 기억이 이어지는 부분과 끊어진 부분을 함께 떠올리게 한다.

흰 머리카락과 립스틱, 물방울만으로 대만의 식민 통치와 여성 3대의 구체적인 경험을 읽기는 어렵다. 가족사진과 대만 문학, 역사적 설명이 함께 제시돼야 연작의 출발점이 드러난다. 설명이 부족하면 대만 여성의 기억은 보편적인 가족 서사로만 받아들여질 수 있다. 개인의 기억과 국가의 역사를 연결한 작업인 만큼 전시장에서 사진의 배열과 설명문이 맡는 비중도 크다.

IPE167 심사는 작가의 이름과 이력을 가린 상태에서 디지털 이미지와 인화 작품을 검토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첸에게는 상금 1000파운드와 RPS 1년 회원권이 주어진다. 수상작은 8월 7일부터 9월 11일까지 런던 사치갤러리에서 전시되며 관람료는 무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