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이재명 외교가 만드는 경제효과

미국의 기술·자본과 한국의 제조업, 남미의 자원·시장을 연결한 7박 11일…달라진 국가 위상은 계약 조건과 국내 부가가치로 증명

2026-08-05     박준식 기자
이재명 대통령. 사진=청와대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KtN 박준식기자]9,500억달러. 이재명 대통령의 미국 샌프란시스코 방문에서 가장 크게 부각된 숫자다. 삼성전자·브로드컴의 2,000억달러, SK와 글로벌 빅테크의 7,500억달러를 합친 향후 5년간 반도체 공급·파운드리 협력 규모다. 청와대 환산으로 약 1,375조원에 이른다. 이어진 브라질·칠레·아르헨티나 방문에서는 희토류·구리·리튬, 원유, 자유무역협정이 정상외교의 의제로 묶였다. 미국의 기술과 자본, 한국의 제조업, 남미의 자원과 시장을 하나의 산업지도 위에 올려놓은 순방이었다.

9,500억달러의 성격부터 정확히 읽을 필요가 있다. 국내 공장에 새로 투입되는 자본이 아니라 반도체 공급과 생산 협력의 예상 합계다. 주문이 확정되고 제품이 인도되면 기업 매출이 되고, 공장과 장비 증설은 별도의 설비투자로 잡힌다. 숫자를 투자 유치액으로 부풀릴 이유도, 협력의 가치를 낮춰 볼 이유도 없다. 장기 수요가 확보되면 반도체 기업은 업황 변동의 위험을 덜고 생산능력 확대에 나설 수 있다. 공급 계약은 수출뿐 아니라 소재·부품·장비의 연쇄 수요를 일으킨다는 점에서 경제효과의 출발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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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4일 샌프란시스코 회동에는 젠슨 황(Jensen Huang) 엔비디아 최고경영자, 혹 탄(Hock Tan) 브로드컴 최고경영자, 샘 올트먼(Sam Altman) 오픈AI 최고경영자, 다리오 아모데이(Dario Amodei) 앤트로픽 최고경영자가 참석했다. 미국 빅테크가 한국 대통령과 삼성전자·SK·현대자동차그룹·네이버 경영진을 한자리에서 만난 사실은 한국 제조업의 위상이 달라졌음을 말해준다. 첨단 메모리와 대규모 양산능력을 빼고는 미국의 AI 확장도 속도를 내기 어렵다. 한국은 시장을 찾아가는 판매국에서 글로벌 기업이 생산계획을 함께 논의하는 공급국으로 이동했다.

한국의 협상력이 AI 전 영역의 주도권을 뜻하지는 않는다. GPU는 엔비디아, 거대언어모델은 미국 기업, 클라우드 시장은 글로벌 플랫폼의 영향력이 절대적이다. 한국 기업도 미국의 칩·모델·자본을 필요로 한다. 샌프란시스코 AI 협력의 실체는 어느 한쪽의 일방적 우위보다 상호의존에 가깝다. 한국이 메모리 공급국을 넘어 AI 중심국으로 올라서려면 국산 AI 반도체와 소프트웨어, 데이터, 연구인력이 창출하는 부가가치가 제조 경쟁력에 더해져야 한다.

약 5GW 규모로 제시된 AI 데이터센터 구상도 같은 기준으로 볼 수 있다. 데이터센터는 건물과 GPU만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전력망과 발전원, 냉각용수, 부지, 장기 이용고객, 프로젝트금융이 동시에 갖춰져야 한다. 계통 보강과 산업용수, 세액공제와 정책금융은 민간 투자액 밖에 존재하는 국민경제의 비용이다. 해외 GPU 구매와 시설 운영에 부가가치가 집중되면 대형 프로젝트의 파급력은 제한된다. 국산 NPU·전력설비·냉각장비의 조달 비중, 중소기업이 부담하는 연산자원 가격, 지역 고용과 세수까지 함께 커져야 ‘AI 허브’라는 이름이 산업 생태계의 성장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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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연금과 실리콘밸리 벤처캐피털 6곳의 협력에서 거론된 3,130억달러도 참여 기관의 전체 운용자산이다. 한국 스타트업으로 향하는 자금은 공동펀드와 개별 투자계약에서 정해진다. 대통령 외교가 세계의 기술·금융 권력과 국내 기업을 연결하는 입구를 만든 점은 의미가 있다. 경제효과의 폭은 대기업의 공급계약과 함께 팹리스·소프트웨어·로봇·바이오 스타트업으로 얼마나 많은 자본과 주문이 흘러가는가에 달려 있다.

브라질·칠레·아르헨티나에서 체결한 핵심광물 문서는 한국 기업의 진입로를 넓혔다. 브라질은 희토류, 칠레는 구리와 리튬, 아르헨티나는 리튬에서 세계적인 자원 기반을 갖고 있다. 정상 간 합의는 광산정책과 투자정보에 먼저 접근하고, 인허가와 기업 애로를 정부 차원에서 협의할 통로가 된다. 광물 가격만큼 정치적 위험이 큰 자원사업에서 이 통로는 사업비를 낮추는 경제적 자산이다.

광산에서 캐낸 원료가 곧바로 한국의 공급 안정으로 이어지는 구조는 아니다. 광산 지분과 장기구매 계약, 가격 산식, 철도·항만, 정제시설, 현지 주민과의 이익 공유가 사업성을 좌우한다. 브라질은 기술이전과 현지 가공을 요구하고, 칠레는 물과 환경규제가 생산비에 영향을 미치며, 아르헨티나는 주정부가 광권·환경·용수 절차를 관할한다. 국제에너지기구(IEA)가 집계한 2025년 주요 에너지광물의 최대 정제국 평균 점유율은 72%다. 지하자원의 위치보다 정·제련망의 지배력이 공급망을 좌우한다는 뜻이다. 남미 협력의 질도 원광 확보량보다 한국 기업의 지분, 장기구매 물량, 정제·가공 단계의 참여에서 갈린다.

아르헨티나산 원유 시범 도입량 88만 배럴은 2025년 한국 원유 수입량의 약 0.086%다. 수입 구조를 단숨에 바꿀 규모는 아니지만, 바카 무에르타 원유의 수송비와 정제수율을 직접 계산하는 시험선이라는 가치는 있다. 대체 공급선의 경제효과는 실제 수입량에만 있지 않다. 중동 공급자와 가격·계약 조건을 협상할 때 선택지가 하나 더 생기는 것 자체가 구매자의 힘을 높인다. 2027년 상업 도입은 도착가격, 항해기간, 국내 정유설비 적합성, 현지 파이프라인과 항만의 가동능력에 따라 규모가 정해진다.

한·메르코수르 무역협정과 한·칠레 자유무역협정 현대화, 한·아르헨티나 이중과세방지협정은 외교가 기업의 비용을 줄이는 경로다. 관세가 낮아지고 원산지·검역 절차가 단순해지며 과세권이 명확해지면 수출과 현지 투자의 예측 가능성이 높아진다. 거액의 투자 발표보다 세금·관세·통관·인허가에서 반복적으로 절감되는 비용이 기업 손익에는 더 오래 남을 수 있다.

메르코수르의 인구 2억8,000만 명은 한국 자동차·부품·기계·전자·식품 기업에 매력적인 시장이다. 무역협정은 상호 개방이므로 브라질·아르헨티나의 농축산물도 한국 시장에 더 쉽게 들어온다. 제조업의 수출 편익과 농축산업의 조정비용이 같은 협정에서 발생한다. 이재명 정부의 통상정책은 수출시장 확대와 국내 민감산업의 보완대책을 한 묶음으로 설계할 때 정치적 지속성을 갖는다. 칠레 FTA 현대화도 2018년부터 이어진 협상의 재가동이라는 성격에 맞춰 디지털·환경 규범과 추가 시장개방의 균형을 잡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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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시우바(Luiz Inácio Lula da Silva) 브라질 대통령은 진보 성향의 노동자 출신 정치인이다. 호세 안토니오 카스트(José Antonio Kast) 칠레 대통령과 하비에르 밀레이(Javier Milei) 아르헨티나 대통령은 보수·시장주의 노선에 가깝다. 이 대통령은 브라질과 전략광물·산업기술, 칠레와 광물·통상·해양, 아르헨티나와 리튬·원유·조세 협력을 각각 구성했다. 이념적 친소관계보다 상대국의 산업 수요에 맞춘 실용외교라는 점은 이번 순방의 분명한 특징이다.

정상 간 친분에는 임기가 있고 기업 계약과 정부 간 제도에는 수명이 더 길다. 브라질은 10월 대통령선거를 치른다. 정상회담의 합의가 경제·통상위원회, 에너지자원협력위원회, 예산과 금융, 기업의 투자계약으로 옮겨갈수록 정권 변화의 영향을 덜 받는다. 2028년 한국의 G20 의장국 활동과 한·칠레 유엔해양총회 공동개최도 이미 정해진 지위를 성과로 포장하기보다 남미 국가들과 공급망·기후·해양 의제를 함께 설계하는 기회로 쓰는 편이 타당하다.

7박 11일 순방은 한국 외교의 경제적 역할이 달라졌음을 드러냈다. 한국은 미국 기술을 받아 생산하는 하청기지에 머물지 않고 빅테크의 공급계획에 영향을 주는 제조 강국이 됐다. 남미에서는 완제품을 파는 수출국을 넘어 자원개발의 자본·기술 파트너로 대우받기 시작했다. 다만 미국의 기술과 남미의 원료를 연결하는 중간 제조자에 머물 경우 부가가치의 상단은 플랫폼 기업이, 공급망의 하단은 자원국이 가져간다. 소프트웨어·AI 반도체·광물 정제·에너지 장비까지 국내 산업의 몫을 넓혀야 달라진 국가 위상이 국민소득으로 연결된다.

이재명 외교가 만드는 경제효과는 정상회담 횟수보다 여섯 개의 수치에서 구체화된다. 반도체 확정 주문액, 데이터센터 전력망 접속용량, 국내 기업의 AI 조달 비중, 광산 지분과 장기구매량, 아르헨티나 원유의 도착가격, 무역협정의 산업별 손익이다. 순방은 기술·자원·시장에 접근할 수 있는 국가 협상력을 키웠다. 이제 그 힘을 기업의 매출과 공급 안정, 중소기업의 성장, 국민이 부담하는 비용의 절감으로 바꾸는 일이 경제외교의 성패를 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