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elier]엄효용 ‘Jangseongcheon-gil pine tree winter’, 흰 숲을 가르는 한 줄기의 농도
같은 품종의 나무 이미지를 한 장에 중첩한 2023년작…가로로 번지는 겨울 숲 속에 개별 나무와 집단의 흔적 공존
[KtN 박준식기자]희뿌연 숲 한가운데 갈색 나무줄기 하나가 수직으로 뻗는다. 작품 아래쪽에서 시작한 줄기는 위로 올라갈수록 가느다란 가지와 회색 선 사이에 잠긴다. 좌우에는 굵기와 높이가 다른 나무들이 촘촘하게 이어지고, 눈에 덮인 듯한 흰색은 줄기와 가지의 경계를 곳곳에서 지운다. 중앙의 한 그루를 따라가던 시선은 곧 숲 전체로 퍼진다.
엄효용(Um Hyoyong·嚴孝鎔)의 ‘Jangseongcheon-gil pine tree winter’는 2023년 코튼지에 피그먼트 프린트(Pigment Print on Cotton Paper) 방식으로 제작한 사진작품이다. 같은 품종의 나무를 한 그루씩 촬영한 뒤 여러 이미지를 한 장에 포개는 작업 방식이 적용됐다. 비슷한 위치에 놓인 줄기는 짙어지고, 서로 다른 방향으로 뻗은 가지와 높이가 다른 나무들은 옅은 선과 얼룩으로 흩어진다. 촬영된 개별 나무가 많아질수록 특정한 한 그루는 흐려지고, 여러 나무가 공유하는 구조가 남는다.
가로 구도가 넓힌 숲의 비중
‘Jangseongcheon-gil pine tree winter’는 가로로 긴 형식 안에 숲을 넓게 펼친다. 중앙의 나무줄기가 구도의 기준을 세우지만 한 그루가 작품을 독점하지는 않는다. 왼쪽과 오른쪽에는 비슷한 굵기의 줄기들이 연속해서 나타나고, 위쪽에서는 가지들이 서로 교차하며 빈틈을 메운다.
중앙의 줄기는 아래쪽에서 가장 짙다. 갈색과 회색이 겹친 수직선은 작품의 높이 대부분을 차지하지만, 위로 올라갈수록 외곽이 느슨해진다. 주변 나무의 가지가 중앙으로 들어오고, 중앙의 가지도 좌우로 퍼지면서 한 그루와 숲의 경계가 흐려진다.
세로로 솟은 줄기들과 가로로 넓게 펼쳐진 작품 형식도 대비를 이룬다. 나무 한 그루는 위로 자라지만 숲은 좌우로 이어진다. 중앙의 수직선은 개별 나무의 존재를 붙잡고, 가로 구도는 여러 나무가 같은 장소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넓게 드러낸다.
작품 아래쪽에는 흰색이 넓게 깔려 있다. 지면과 나무가 만나는 위치는 분명하게 나뉘지 않는다. 일부 줄기는 바닥에 닿기 전에 흐려지고, 뒤쪽 나무는 흰색 속에서 희미하게 떠오른다. 앞뒤 나무 사이의 실제 거리는 약해지고, 숲의 깊이는 선명한 원근법보다 색의 농도 차이로 형성된다.
흰색이 지운 형태, 흰색이 쌓은 흔적
작품 전면을 덮은 흰색은 단순한 눈의 묘사에 머물지 않는다. 나뭇가지와 줄기, 겨울의 대기와 밝은 배경이 거듭 포개진 결과다. 가까이에서는 수많은 선과 작은 얼룩이 드러나고, 거리를 두면 숲 전체가 옅은 흰색의 층으로 묶인다.
상단에는 청회색을 머금은 가는 가지들이 촘촘하게 얽혀 있다. 중간 부분에는 갈색과 회색의 줄기가 반복되고, 하단으로 내려갈수록 흰색의 비중이 커진다. 뚜렷한 색면이나 강한 명암 대신 낮은 채도의 선들이 쌓이면서 겨울 숲의 차갑고 흐린 공기가 형성된다.
흰색은 개별 나무의 세부를 지우면서 숲의 밀도를 높인다. 줄기와 가지의 외곽은 약해졌지만 나무의 수가 줄어든 인상은 들지 않는다. 오히려 형태를 정확히 식별하기 어려운 수직선들이 겹치면서 숲이 작품 바깥까지 이어지는 듯한 폭이 생긴다.
중앙의 갈색 줄기도 하나의 선으로 고정되지 않는다. 가장자리에는 여러 줄기가 조금씩 어긋난 흔적이 남아 있고, 회색과 청색이 갈색 사이에 섞여 있다. 멀리에서는 곧게 선 한 그루로 읽히지만 가까이에서는 여러 사진이 포개진 흔들림이 드러난다.
사진 이미지의 반복은 회화와 닮은 질감도 만든다. 가지가 교차한 부분은 연필이나 목탄으로 수없이 그은 선처럼 남고, 흰색과 회색의 얼룩은 묽은 물감을 여러 차례 올린 듯 번진다. 회화적 인상은 물감이나 붓질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실제 나무를 촬영한 사진들이 반복해서 겹쳐지면서 구체적인 기록이 추상적인 흔적으로 바뀌었다.
중앙의 한 그루와 이름을 잃은 나무들
중앙에 선 나무는 작품에서 가장 쉽게 식별되는 존재다. 주변보다 짙은 줄기와 비교적 안정된 수직 구조를 갖췄다. 그러나 줄기의 세부와 가지의 정확한 위치만으로 특정 나무를 가려내기는 어렵다. 여러 나무의 공통된 부분이 겹쳐 만들어진 형상이기 때문이다.
주변의 나무들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줄기의 굵기와 가지의 방향이 다른 부분은 옅은 선으로 남고, 나무마다 다른 높이는 회색 얼룩의 층을 만든다. 공통된 형태는 중앙의 나무를 세우고, 서로 다른 모습은 주변 숲을 넓힌다.
개별성과 집단성은 한쪽이 다른 쪽을 지우는 관계로 정리되지 않는다. 중앙의 나무는 여러 나무의 공통점으로 만들어졌지만, 주변에 퍼진 불규칙한 선들은 촬영된 나무들이 서로 달랐다는 사실을 남긴다. 한 그루처럼 모인 형태 안에 개별 나무의 차이가 흔적의 농도로 축적돼 있다.
엄효용의 나무 연작은 특정 시간과 장소를 기록하는 사진의 성격도 다른 방향으로 확장한다. 한 번의 촬영은 한순간의 나무를 남기지만, 이미지 중첩은 서로 다른 촬영 순간을 하나의 결과물에 모은다. 먼저 촬영한 나무와 나중에 촬영한 나무는 완성작에서 같은 시간에 존재하는 것처럼 포개진다.
장성천길이라는 장소의 기록
‘Jangseongcheon-gil’이라는 작품명은 이미지 안에서 흐려진 장소를 다시 특정한다. 완성된 작품에서는 각각의 나무가 어디에 있었는지, 어느 순서로 촬영됐는지 구분하기 어렵다. 제목은 중첩 과정에서 사라진 장소와 계절의 정보를 붙잡는다.
‘pine tree’는 작품을 구성하는 수종을, ‘winter’는 촬영된 계절을 가리킨다. 개별 소나무의 생김새는 희미해졌지만 장성천길의 겨울이라는 조건은 제목에 남았다. 중첩으로 만들어진 나무는 현실에서 한 그루로 존재하지 않지만, 작품을 구성한 나무들은 실제 장소와 계절을 통과했다.
엄효용은 초기 작업에서 동전과 전원 스위치, 캔버스처럼 한 시점에서 동시에 볼 수 없는 사물의 앞뒤와 좌우를 겹쳤다. 나무 연작에서는 같은 품종에 속한 여러 나무와 서로 다른 촬영 시간을 포개는 방식으로 작업 범위를 옮겼다. 2016년 개인전 ‘여기, 지금, 나무’에서는 같은 품종의 나무 이미지를 중첩한 연작을 선보였다.
‘Jangseongcheon-gil pine tree winter’의 중앙에 남은 짙은 줄기는 어느 한 소나무의 완전한 초상이 아니다. 여러 나무가 반복해서 겹친 자리에서 가장 오래 버틴 형태다. 주변에 흩어진 가는 선과 흰 얼룩도 지워진 배경이 아니라 서로 다른 나무가 남긴 기록이다.
장성천길에서 촬영된 소나무들은 개별 윤곽을 잃은 대신 한겨울 숲의 폭과 깊이를 함께 얻었다. 중앙의 줄기는 공통된 형태를 모아 수직으로 서고, 좌우로 번진 숲은 나무마다 달랐던 가지와 높이를 옅은 흔적으로 간직한다. 한 그루와 여러 그루, 한순간과 여러 시간이 흰색의 층 안에서 동시에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