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elier 구승희④] ‘순간’, 거대한 노란 머리에 붙잡힌 내면의 움직임
들어 올린 시선과 눈동자의 문양, 꽃이 공간으로 번지기 전 응축된 구승희 회화의 초기 언어
[KtN 박준식기자]강한 적색 바탕 위에 노란 머리가 작품 대부분을 차지한다. 여성의 얼굴은 왼쪽 아래에서 오른쪽 위를 향해 비스듬히 들렸고, 두 눈도 같은 방향으로 움직인다. 입은 작게 닫혀 있다. 상반신 아래에서는 양손이 검은 선형 요소를 각각 잡고 있지만, 손의 행위보다 위쪽을 향한 얼굴과 눈의 움직임이 먼저 시선을 붙든다. 2026년 작품들에서 몸과 꽃이 적극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과 비교하면 2014년작 ‘순간’은 외부의 행동보다 한 인물 안에서 발생하는 감각에 무게가 실린다.
구승희의 ‘순간’은 장지 채색, 162×130cm로 제작된 2014년작이다. 같은 크기의 2021년작 ‘담아서’, 2026년 혼합매체 대형작 ‘기쁨가득’보다 앞선 시기에 놓인다. 제작연도를 따라 작품을 나란히 놓으면 ‘순간’은 이후 구승희 작업에서 반복되는 노란 머리와 큰 눈, 꽃, 세밀한 문양이 이미 상당 부분 등장하면서도 아직 각각의 요소가 넓은 공간으로 확산되기 전의 상태를 보여준다.
가장 강한 형태는 노란 머리다. 머리는 실제 신체의 비례를 벗어나 좌우와 위쪽으로 크게 팽창하고, 얼굴과 상반신을 거의 하나의 원 안에 품는다. 붉은 바탕과 노란 머리가 넓은 색면으로 맞서면서 작은 얼굴과 몸은 오히려 거대한 머리 안에 들어간 존재처럼 자리한다. 이후 작품에서 수많은 곡선과 작은 꽃이 바깥 공간으로 흩어지는 흐름과 달리 ‘순간’에서는 노란색이 인물 주변에 밀집해 있다.
구승희의 노란 곱슬머리는 행복을 상징하기 위해 처음부터 설계된 형태가 아니었다. 육아와 작업을 함께 이어가던 시기, 작업시간이 끝나갈수록 커지던 조급함과 빠르게 돌아가는 생활에서 생긴 복잡한 심리를 머리카락에 풀어낸 데서 시작됐다. 관람객은 작가가 복잡한 마음을 담았던 노란 머리를 밝고 긍정적인 이미지로 받아들였고, 반복된 형태는 점차 구승희 회화의 대표적인 조형 요소로 자리 잡았다.
2014년의 ‘순간’에서는 바로 그 복잡성이 머리의 크기와 밀도에 집중돼 있다. 머리카락 하나하나를 사실적으로 묘사하기보다 가는 흔적을 거듭 쌓아 거대한 노란 덩어리를 만들었다. 가장자리에서는 작은 곡선이 희미하게 반복되지만 중심부의 노란색은 촘촘하게 응집된다. 감정이 밖으로 멀리 퍼진다기보다 한 사람의 머릿속에 머물면서 부풀어 오른 상태에 가깝다.
눈은 노란 머리만큼 강한 비중을 차지한다. 얼굴에 비해 큰 두 눈은 같은 높이에 놓이지 않았고, 얼굴의 기울기와 함께 위쪽을 향한다. 흰자와 짙은 눈동자의 대비가 선명하며 눈동자 안에는 식물이나 꽃잎을 연상시키는 세밀한 문양이 들어 있다. 코와 눈썹의 표현을 크게 줄인 얼굴에서 눈은 인물의 감정을 읽게 하는 거의 유일한 통로가 된다.
구승희는 겉으로 자신을 꾸밀 수 있어도 눈에는 내면이 드러난다는 생각에서 눈을 강조해왔다. 눈동자 안에 들어간 결정 형태 역시 긍정적인 생각과 내면의 진심을 시각화하기 위해 받아들인 조형적 모티프다. ‘순간’에서는 이런 눈의 역할이 특히 두드러진다. 이후 작품처럼 가족이나 동물, 수많은 꽃이 서사를 만들어주지 않아도 눈과 시선만으로 인물의 내부에 긴장을 만든다.
제목 ‘순간’은 이 시선과 맞물린다. 무엇인가를 바라보는 찰나인지, 생각이 떠오른 때인지, 감정이 바뀌는 짧은 시간인지는 작품 안에서 특정되지 않는다. 대신 고개와 눈이 동시에 위쪽을 향하면서 한 사람 안에서 무언가가 발생한 바로 그때를 붙잡는다. 입은 크게 웃지 않고, 몸도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사건보다 감정이 움직이기 직전의 시간이 길게 남는다.
노란 머리 오른쪽에는 분홍과 보라 계열의 꽃이 머리 안쪽에 자리한다. 작품 전면으로 크게 흩어진 꽃이 아니라 머리카락에 붙어 있는 하나의 응축된 형태다. 붉은 옷에도 여러 크기의 꽃무늬가 반복된다. 꽃은 이미 존재하지만 아직 인물의 몸과 머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구승희의 최근 작업과 비교하면 변화가 뚜렷해진다. 2026년 ‘행복으로’에서는 점처럼 작은 꽃들이 초승달을 만들고 주변 공간까지 흩어졌다. ‘기쁨가득’에서는 손에서 시작한 작은 흰 꽃이 가슴과 목까지 올라오며 인물의 내부를 채웠다. 2021년 ‘담아서’에서는 두 손 사이에서 꽃이 모이고 다시 바깥으로 퍼졌다. ‘순간’의 꽃은 이보다 훨씬 안쪽에 머문다. 꽃의 존재가 머리와 옷이라는 제한된 영역에 붙어 있고, 주변의 적색 공간은 상대적으로 넓고 단순하게 남아 있다.
이 차이는 구승희 작품에서 꽃이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읽을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초기의 꽃이 인물에게 귀속된 무늬와 개별적인 형태에 가까웠다면 이후에는 작은 꽃으로 잘게 나뉘어 몸과 주변 공간을 오가는 조형 단위로 확장된다. 구승희가 일상의 작고 보이지 않는 행복을 작은 꽃으로 표현한다고 밝힌 점을 함께 놓으면, 행복의 개념이 인물에게 붙어 있는 이미지에서 공간 전체를 채우는 힘으로 넓어지는 흐름도 확인된다.
‘순간’에서 양손이 잡고 있는 검은 선도 눈길을 끈다. 정확한 대상이나 기능은 작품 정보만으로 단정하기 어렵지만, 검은 선은 붉고 노란 색이 지배하는 구성에서 드물게 등장하는 가느다란 직선과 곡선의 요소다. 양손의 거리를 이어주면서도 아래로 길게 떨어져 인물의 시선과 반대되는 방향을 만든다. 눈은 위로 향하고 손은 아래쪽의 검은 선을 붙잡는다. 생각과 몸이 서로 다른 방향을 갖는 긴장이 생긴다.
인물의 행위가 아직 크게 확장되지 않았다는 점도 중요하다. ‘행복으로’에서는 몸 전체가 빗자루를 타고 이동하고, ‘담아서’에서는 두 손이 꽃을 모으고 흩어 보낸다. ‘순간’의 손은 무엇인가를 붙잡은 채 멈춰 있다. 몸은 움직이기보다 감정이 발생하는 시간을 견딘다. 이후 작품에서 적극적인 행동으로 바뀌는 여성형 인물의 초기 상태를 이 정지된 자세에서 읽을 수 있다.
붉은 옷의 세밀한 꽃무늬에서는 구승희가 오랫동안 이어온 ‘채움’의 성격도 일찍 나타난다. 넓은 옷을 하나의 색으로 끝내지 않고 크기가 다른 원형 꽃과 작은 문양을 반복해 넣었다. 구승희는 옷의 문양을 하나씩 그리고 색을 더하는 방식이 자신의 성향과 연결돼 있다고 설명한 바 있다. 이후 작은 꽃과 곱슬머리, 주변 공간으로 확대되는 반복의 노동이 2014년 작품에서는 옷과 머리 내부에 상대적으로 응축돼 있다.
‘순간’은 구승희 회화에서 행복이 이미 완성된 언어로 제시된 작품이라기보다, 이후의 조형 언어가 한 인물 안에서 모이고 있던 시기를 보여준다. 눈에는 내면을 품는 문양이 들어 있고, 머리는 신체보다 크게 확장됐으며, 꽃은 머리와 옷에 자리한다. 손의 행위는 아직 제한돼 있고 주변 공간도 작은 꽃으로 가득 차지 않았다.
바깥으로 향하는 운동보다 안쪽에서 일어나는 변화가 앞선다. 눈은 무엇인가를 바라보고, 생각은 거대한 노란 머리 안에서 머물며, 꽃은 아직 몸 가까이에 붙어 있다. 2021년 ‘담아서’에서 꽃이 손을 따라 이동하고 2026년 ‘행복으로’에서 몸 자체가 공간을 가로지르기까지, 구승희의 여성형 인물은 점차 정지에서 행동으로 이동한다.
그 출발점에 ‘순간’의 시선이 있다.
무엇인가를 얻은 뒤의 얼굴도, 행복을 향해 달려가는 몸도 아니다. 감정이 생겨나는 짧은 시간에 고개를 들어 올린 한 존재가 있다. 거대한 노란 머리는 그 순간 머릿속을 가득 채운 감정의 크기를 받아들이고, 눈동자의 작은 문양은 밖에서는 보이지 않는 내면을 붙잡는다.
구승희의 ‘순간’은 행복을 크게 말하지 않는다. 대신 훗날 꽃과 파동, 행위와 관계로 확장될 조형 언어를 한 사람의 눈과 머리 안에 압축해 놓는다. 이후 작품에서 밖으로 흘러나갈 움직임이 아직 몸 안에 머물러 있는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