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셰익스피어와 비틀즈의 나라, 뱅크시는 아직 찬밥
[KtN 임민정기자]셰익스피어는 영국 문학의 이름이 됐고, 비틀즈는 영국 대중문화의 상징이 됐다. 태어난 집과 공연장, 악보와 음반, 사진과 기록까지 문화유산의 일부가 됐다. 그런데 뱅크시(Banksy)가 등장하면 영국의 표정은 복잡해진다.
런던 왕립재판소 외벽에 작품을 남기면 세금을 들여 지운다. 워털루 플레이스에 조각을 세우면 다시 세금을 들여 지킨다. 경찰 초소에 피라냐를 그려놓으면 구조물째 떼어낸 뒤 박물관으로 보낸다. 작가는 한 사람인데 작품의 신분은 훼손물, 공공미술, 박물관 전시품으로 갈린다. 셰익스피어가 이 광경을 봤다면 희극 한 편의 소재로 삼았을 법하다.
2025년 9월 왕립재판소 외벽에 등장한 작품에는 법복과 가발을 쓴 판사가 바닥에 쓰러진 시위자를 의사봉으로 내리치는 모습이 담겼다. 왕립재판소는 보호 대상 건축물이다. 공공기관은 원형을 유지해야 한다는 이유로 작품을 제거하기로 했고, 페인트 제거와 경비 등에 8만5300파운드를 썼다. 작품을 사들이거나 보존하기 위해 쓴 돈이 아니라 뱅크시를 지우기 위해 투입한 세금이었다.
몇 달 뒤 같은 런던에서는 판단이 뒤집혔다. 2026년 4월 워털루 플레이스에 정장을 입은 남성이 커다란 깃발을 든 조각이 등장하자 웨스트민스터 시의회는 철거하지 않았다. 안전시설과 경비를 붙였고 보호 비용으로 약 6만파운드를 투입했다. 왕립재판소에서는 뱅크시를 없애기 위해 돈을 썼고, 워털루에서는 뱅크시를 남겨두기 위해 돈을 썼다.
같은 작가이고 같은 도시다. 허가받지 않은 작업이라는 출발점도 크게 다르지 않다. 달라진 것은 작품이 놓인 장소와 관리 책임이었다. 법원 외벽에서는 보호해야 할 대상이 건물이었고, 광장에서는 작품 자체가 보호 대상으로 올라섰다.
경찰 초소에 그려진 피라냐는 또 다른 운명을 맞았다. 초소는 거리에서 철거됐지만 작품까지 폐기되지는 않았다. 구조물째 보존됐고 박물관 전시를 앞두고 있다. 거리에서는 치워야 했던 것이 박물관에서는 남겨야 할 문화적 대상이 된 셈이다.
뱅크시는 작품을 바꾸지 않았다. 작품의 지위를 바꾼 것은 장소와 제도였다. 법원 벽에 붙어 있을 때는 제거 대상이고, 광장에 서 있으면 보호 대상이며, 박물관으로 들어가면 보존 대상이 된다. 예술과 낙서의 경계가 작품 자체보다 주소지와 관리 주체에 따라 움직이는 묘한 상황이다.
최근 세 작품을 처리하는 데 들어간 공공 비용은 15만파운드에 육박한다. 금액보다 더 흥미로운 것은 돈이 향한 방향이다. 세금은 뱅크시를 지우는 데도 쓰였고, 지키는 데도 쓰였으며, 옮기고 보존하는 과정에도 들어갔다. 영국은 뱅크시 때문에 지갑을 세 번 열었다. 한 번은 없애기 위해서였고, 한 번은 지키기 위해서였으며, 또 한 번은 남기기 위해서였다.
워털루 작품을 바라보는 시민 반응은 행정의 판단을 더 복잡하게 만든다. YouGov 조사에서 영국인의 56%는 새 뱅크시 조각을 좋아한다고 답했다. 싫다는 응답은 13%였다. 시민 다수가 작품에 호감을 표시했지만, 그렇다고 무단 설치물을 모두 공공미술로 인정할 수도 없다.
유명 작가의 이름값이 재산권과 건축물 관리 원칙보다 앞설 수 있다는 결론은 공공기관이 쉽게 받아들이기 어렵다. 유명한 사람이 벽에 그리면 예술이고 이름 없는 사람이 그리면 낙서라는 기준도 성립하기 어렵다. 반대로 허가받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모두 지운다면 이미 세계 미술시장에서 높은 가치를 인정받고 시민과 관광객이 찾아가는 작품까지 같은 방식으로 없애야 한다.
바로 여기서 뱅크시는 영국 행정을 곤란하게 만든다. 한쪽에서는 작품을 없애기 위해 세금을 쓰고, 다른 쪽에서는 같은 작가의 작품을 보호하기 위해 다시 세금을 쓴다. 행정 절차만 놓고 보면 각각 설명이 가능하지만 세 작품을 나란히 놓는 순간 하나의 기준으로 설명하기 어려워진다.
셰익스피어와 비틀즈는 이미 결과를 알고 있는 문화다. 시간이 가치를 판정했고, 영국 사회가 보존할 이유를 만들었다. 작품과 기록을 남기고 도시와 박물관에서 이름을 활용하는 데 큰 논쟁이 붙지 않는다. 두 이름은 오래전에 영국 문화사의 귀빈석에 자리를 잡았다.
뱅크시는 아직 현재진행형이다. 살아 있는 동시대 문화이고, 거리에서 예고 없이 나타나며, 허가와 소유권의 경계를 건드린다. 작품이 등장하는 순간 행정기관은 미술평론보다 건물 관리와 재산권, 안전, 경비부터 판단해야 한다. 시간이 지나 박물관으로 옮겨지는 순간에는 다시 동시대 문화유산이라는 이름이 붙는다.
경찰 초소의 피라냐가 바로 그 변화를 보여준다. 거리에서는 철거됐지만 박물관에서는 보존된다. 뱅크시는 작품을 만들었지만 작품의 행정적 신분증은 영국 사회가 발급하고 있다. 왕립재판소에서는 삭제, 워털루에서는 보호, 박물관에서는 보존이다.
15만파운드의 세금 논쟁을 단순한 낭비 여부로만 볼 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영국이 무엇을 문화로 인정하고, 언제부터 보존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는지가 세 작품의 처리 과정에 그대로 드러난다. 셰익스피어에게는 시간이 있었고 비틀즈에게도 시간이 있었다. 문화적 가치가 사회적 합의로 굳어진 뒤 영국은 두 이름을 국가의 자산으로 받아들였다.
뱅크시는 아직 그 시간을 통과하고 있다. 세계가 작품을 보러 오고, 미술시장에서 높은 가격에 거래되며, 시민 다수가 새 작품에 호감을 표시해도 공공기관은 작품이 등장할 때마다 다시 판단한다. 어느 벽에 그렸는지, 누구의 재산인지, 건물이 보호 대상인지, 시민들이 얼마나 원하는지에 따라 판결은 달라진다.
셰익스피어와 비틀즈가 영국 문화사의 귀빈석에 앉아 있다면 뱅크시는 아직 입구에서 신분 확인을 받고 있는 셈이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세금을 들여 지우고, 남길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면 세금을 들여 지킨다. 시간이 지나 문화적 가치가 굳어지면 박물관으로 보낸다.
피고는 언제나 뱅크시다. 판결을 바꾸는 쪽은 영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