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장 뤽 고다르 '경멸', 사랑의 파국에 새긴 예술과 인간의 존엄
'오디세이' 각색 현장과 무너지는 부부 관계 교차…자본·욕망·시선까지 영화 안으로 푸른 지중해와 붉은 색채의 충돌, 63년 지나 AI·감정경제 시대에 다시 읽히는 고전
[KtN 김동희기자]지중해의 푸른 바다를 내려다보는 카프리섬의 절벽, 강렬한 햇빛을 받아 선명하게 갈라지는 흰 건축물,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붉은 스포츠카. 장 뤽 고다르(Jean-Luc Godard)의 1963년 영화 '경멸(Le Mépris, Contempt)'은 눈부신 풍경 한가운데 한 부부의 파국을 놓는다. 사랑이 무너질수록 색채는 오히려 또렷해지고, 두 사람이 멀어질수록 지중해의 수평선은 더 넓어진다. 고다르는 비극을 어둠 속에 숨기지 않았다. 가장 아름다운 것을 오래 바라보게 한 뒤 아름다움만으로는 지킬 수 없는 인간의 관계를 꺼내놓았다.
극작가 폴 자발은 영화 '오디세이'의 각색 작업을 맡는다. 미국인 제작자 제러미 프로코시는 프리츠 랑(Fritz Lang)이 연출하는 작품에 불만을 품고 있고, 폴에게 대본을 손봐달라고 요구한다. 영화 제작을 둘러싼 협상과 갈등이 시작되는 동안 폴의 아내 카미유는 남편을 바라보는 태도를 바꾼다. 사랑했던 사람에게 남는 감정은 영화 제목 그대로 '경멸'이다.
부부의 균열과 영화 제작의 갈등은 따로 흘러가지 않는다. 프로코시는 투자한 돈을 근거로 영화의 방향을 바꾸려 하고, 폴은 보수를 받고 자신의 문장을 수정한다. 예술의 가치가 가격과 흥행 가능성으로 환산되는 과정 곁에서 부부 관계마저 비슷한 방식으로 흔들린다. 폴이 카미유를 프로코시의 차에 먼저 태워 보내는 대목에서 결정적인 균열이 생긴다. 외도의 증거나 노골적인 배신이 등장해서가 아니다. 카미유는 자신을 대하는 남편의 태도에서 이전에는 없었던 계산과 방관을 감지한다.
고다르는 사랑이 끝나는 이유를 하나로 정리하지 않는다. 카미유 역시 자신의 감정을 친절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폴은 이유를 찾으려 한다. 프로코시 때문인지, 질투 때문인지, 자신의 행동 때문인지 묻고 또 묻는다. 원인을 찾아내면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믿는 사람처럼 카미유의 마음을 해석한다.
그러나 '경멸'에서 사랑의 붕괴는 사건보다 존중의 소멸에 가깝다. 카미유가 폴에게서 거둬들이는 것은 애정만이 아니다. 한 인간을 바라보던 신뢰와 존중이 함께 사라진다. 증오에는 여전히 상대를 향한 강한 감정이 남아 있지만 경멸은 상대에게 부여했던 가치 자체를 철회한다. 영화가 불륜이나 질투보다 '경멸'이라는 단어를 제목으로 택한 까닭도 두 사람의 관계가 무너지는 방식에서 읽힌다.
로마의 아파트에서 길게 이어지는 폴과 카미유의 대화는 영화의 중심부를 차지한다. 두 사람은 욕실과 거실, 침실과 복도를 오가며 끊임없이 말을 주고받는다. 대화가 이어질수록 관계가 회복되기는커녕 서로의 거리는 더욱 벌어진다. 같은 집에 머물고 같은 언어를 쓰지만 상대가 하는 말의 의미에는 도달하지 못한다.
고다르는 두 사람을 빠른 편집으로 몰아붙이지 않는다. 방 안에서 몸의 위치가 달라지고, 가까웠던 두 사람이 떨어져 앉고, 문과 벽이 두 사람 사이를 가른다. 말보다 먼저 공간이 관계의 변화를 드러낸다. 사랑이 끝났다는 선언보다 같은 공간에서 서로에게 가까이 가지 못하는 시간이 더 길게 남는다.
영화 전체에서는 프랑스어와 영어, 이탈리아어, 독일어가 끊임없이 오간다. 통역자는 문장을 다른 언어로 옮기지만 사람들의 욕망과 이해관계까지 번역하지는 못한다. 제작자와 감독, 작가가 같은 영화에 관해 이야기하면서도 서로 다른 영화를 생각하는 이유다. 폴과 카미유 역시 같은 말을 주고받지만 전혀 다른 관계를 경험하고 있다.
언어는 연결돼 있지만 사람은 연결되지 않는다.
1963년에 만들어진 영화가 2026년에 다시 날카롭게 다가오는 대목 가운데 하나다. 메시지는 실시간으로 전달되고, 번역 기술은 언어의 장벽을 빠르게 허문다. 생성형 AI는 문맥을 읽고 감정을 분류하며 상대가 다음에 원하는 문장까지 추정한다. 사람에 관한 정보는 과거 어느 때보다 많아졌지만 정보의 양이 곧 이해의 깊이가 되지는 않는다.
폴의 실패는 카미유를 몰라서만 생기지 않는다. 카미유의 감정을 자신의 논리 안에서 설명할 수 있다고 믿는 데서 더 크게 드러난다. 사랑한다는 말과 상대를 독립된 인간으로 인정하는 일 사이에 거리가 생긴다.
마르틴 부버(Martin Buber)가 인간관계를 설명하며 구분한 '나-너(I-Thou)'와 '나-그것(I-It)'도 두 사람의 관계와 맞닿는다. 한 사람을 독립된 존재로 만나는 관계가 '나-너'라면, 상대를 분석하고 이용할 수 있는 대상으로 다루는 순간 관계는 '나-그것'으로 바뀐다. 폴은 카미유를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카미유의 감정을 끊임없이 원인과 결과의 체계 안에 집어넣는다.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려는 행동이 어느 순간 상대를 설명 가능한 대상으로 만드는 행동과 겹친다.
헤겔이 인간의 자아 형성에서 중요하게 다룬 '인정' 역시 두 사람 사이에서 무너진다. 사랑은 상대를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존재가 아니라 별개의 인간으로 인정할 때 지속된다. 경제적 이해와 직업적 선택 안에 아내를 자연스럽게 포함시키는 폴의 행동은 카미유에게 자신이 어떤 위치에 놓여 있는지를 깨닫게 한다. 카미유가 잃어버린 것은 남편을 향한 감정 이전에 남편을 존중할 근거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가 영화 속 영화로 들어온 것도 우연이 아니다. 오디세우스는 긴 방랑을 거쳐 고향 이타카로 돌아간다. 긴 항해 끝에는 아내 페넬로페와 집이 기다린다. 반대로 '오디세이'를 각색하는 폴은 자신의 집을 잃어간다. 먼 바다를 떠돌지 않으면서도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돌아가는 데 실패한다.
고대의 영웅이 바다와 괴물, 신들의 분노를 통과해 귀환했다면 고다르의 현대인은 돈과 욕망, 자존심과 오해 속에서 길을 잃는다. 카프리의 바다는 끝없이 열려 있는데 두 사람이 함께 돌아갈 곳은 점점 사라진다. '오디세이'의 귀환 서사가 '경멸'에서는 귀환할 수 없는 현대인의 이야기로 뒤집힌다.
프리츠 랑이 영화 속 감독으로 직접 등장하는 설정은 고다르가 구축한 또 다른 거울이다. 랑은 호메로스의 신화를 영화로 옮기려 하고, 프로코시는 작품에 더 직접적인 상업성을 요구한다. 폴은 제작자와 감독 사이에서 대본을 고친다. 예술가의 의지와 제작비를 댄 사람의 요구, 고전과 상품, 창작과 계약이 한 제작 현장 안에서 부딪친다.
'경멸' 자체의 제작 과정 역시 영화 속 갈등과 무관하지 않았다. 세계적인 스타 브리지트 바르도(Brigitte Bardot)가 출연했고, 고다르의 이전 작품들과 비교하면 제작 규모도 컸다. 상업적 기대를 품은 제작 시스템 안에서 고다르는 자본이 예술을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다시 영화의 소재로 끌어들였다. 프로코시가 프리츠 랑의 '오디세이'를 자신이 원하는 상품으로 바꾸려 하는 동안 관객은 실제 영화산업 안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경멸'을 함께 보고 있다.
돈은 영화 제작에 반드시 필요하다. 폴에게도 생활을 위한 돈이 필요하다. 고다르는 자본을 단순한 악역으로 만들지 않는다. 돈이 예술과 관계의 기준으로 들어올 때 무엇부터 달라지는지를 따라간다. 프로코시는 투자금을 근거로 영화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고, 폴은 계약을 근거로 자신의 글을 바꾼다. 카미유는 남편이 무엇을 선택했느냐보다 어디까지 거래 가능한 것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는지를 지켜본다.
예술과 사랑은 같은 자리에서 인간의 존엄과 만난다. 가격을 붙일 수 있는 것과 가격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 사이의 경계다.
카프리섬으로 공간이 옮겨가면서 영화의 색채와 구도는 한층 선명해진다. 라울 쿠타르(Raoul Coutard)가 시네마스코프로 담은 지중해는 인물을 압도할 만큼 넓다. 강한 청색과 적색, 흰 건축물이 서로 부딪치고 사람은 거대한 자연과 구조물 사이에 작게 놓인다. 아름다운 풍경이 비극을 완화하기보다 오히려 인간의 초라함을 드러낸다.
브리지트 바르도의 존재도 같은 구조 안에 놓인다. 당대의 세계적인 스타였던 바르도의 얼굴과 신체를 고다르는 적극적으로 촬영하면서 동시에 누가 누구를 바라보는지를 끊임없이 의식하게 한다. 폴은 카미유를 바라보고 프로코시는 카미유를 욕망한다. 관객 역시 카미유를 바라본다. 아름다움을 제공하는 영화가 아름다움을 소비하는 시선까지 영화 안으로 끌어들이는 방식이다.
카미유는 남성들의 시선 속에 놓여 있지만 끝까지 해석되지 않는 인물로 남는다. 남편도, 제작자도, 관객도 카미유의 마음을 완전히 소유하지 못한다. 스타의 이미지를 충분히 보여주면서 그 이미지 너머의 인간은 끝내 붙잡을 수 없도록 만든 고다르의 선택에서 '경멸'의 미학과 윤리가 만난다.
조르주 들르뤼(Georges Delerue)의 음악은 사랑의 파국을 더욱 깊게 새긴다. 반복되는 선율은 특정 감정을 지시하기보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을 감싼다. 인물들이 아직 대화를 이어가는 동안 음악은 관계가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감각을 먼저 불러낸다. 말이 설명하지 못하는 정서를 음악이 대신 채우면서도 감정을 과장하지 않는다.
2026년 한국 사회에서 소비와 감정의 관계가 더욱 밀접해졌다는 분석은 '경멸'을 현재형으로 읽을 또 하나의 통로가 된다. '트렌드 코리아 2026'이 제시한 '필코노미(Feelconomy)'는 기분과 감정이 소비 선택에 미치는 영향을 전면에 놓는다. 원하는 감정을 얻고 불편한 감정을 덜어내기 위한 소비가 커지는 시대다.
'경멸'은 정반대의 시간을 요구한다. 불편한 감정을 빠르게 해소하지 않고 오래 남겨둔다. 카미유의 마음에 명쾌한 이유를 붙이지 않고, 폴에게 즉각적인 반성과 구원의 기회를 제공하지도 않는다. 관객이 불편함을 견디며 두 사람의 관계를 바라보도록 한다. 감정을 즉시 만족시키고 정리하는 콘텐츠가 넘쳐나는 시대에 감정을 해결하지 않은 채 끝까지 남겨두는 방식이 오히려 낯설게 다가온다.
작고 빠른 유행이 수없이 갈라지는 '픽셀라이프(Pixelated Life)'의 환경과도 거리가 크다. 2026년의 콘텐츠는 짧아지고, 이미지와 이야기는 빠른 속도로 소비된다. '경멸'의 아파트 시퀀스는 효율적인 압축을 거부한다. 반복되는 말과 침묵, 이동과 정지가 축적돼야 두 사람 사이의 변화가 드러난다. 몇 개의 강한 대사나 짧은 영상으로 잘라내면 고다르가 만든 감정의 시간이 사라진다.
AI와 디지털 기술이 새로운 이미지를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가운데 오래된 원형과 고전으로 향하는 '근본이즘(Returning to the Fundamentals)'도 '경멸'의 재발견과 맞닿는다. 고전영화를 다시 본다는 행위는 과거를 향한 향수에 머물지 않는다. 같은 작품이 새로운 사회와 다시 만날 때 과거에는 보이지 않았던 의미가 열린다.
1963년에는 영화산업의 자본과 작가주의, 현대적 결혼의 위기, 스타를 소비하는 시선이 전면에 있었다. 2026년에는 알고리즘이 취향을 분류하고 AI가 언어와 이미지를 생산하며 사람의 감정까지 데이터로 분석하는 환경이 더해졌다. 타인을 얼마나 정확히 설명할 수 있는가보다 한 인간에게 끝내 설명되지 않는 영역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 더욱 중요해졌다.
고전이 살아남는 힘도 시간의 오래됨에서만 나오지 않는다. 새로운 시대가 올 때마다 다른 질문과 부딪칠 수 있어야 한다.
고다르는 '경멸'에서 사랑을 이상화하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이 어떻게 낯선 사람이 되는지, 존중이 사라진 관계에서 애정이 얼마나 빠르게 힘을 잃는지를 지켜본다. 예술도 성역에 올리지 않는다. 영화 한 편이 돈과 계약, 스타와 제작자의 요구 속에서 만들어지는 현실을 그대로 끌어안는다.
마지막까지 지중해는 푸르다. 인간의 사랑이 파국에 이르고 삶이 돌이킬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간 뒤에도 바다는 그대로 남는다. 인간보다 오래된 세계와 인간보다 오래 살아남을 예술이 한 프레임에 놓인다.
호메로스가 남긴 오디세우스의 항해는 수천 년을 지나 고다르의 영화에 들어왔고, '경멸'은 다시 63년을 건너 2026년의 관객과 만났다. 영화 제작 방식도,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도, 사람을 연결하는 기술도 달라졌다. 필름은 디지털 이미지로 옮겨갔고 인간의 문장과 그림을 만들어내는 인공지능까지 일상으로 들어왔다.
타인을 하나의 독립된 인간으로 존중하는 일은 기술의 발전만으로 대신할 수 없다. 사랑하는 사람을 소유하지 않는 태도,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를 지키려는 선택, 아름다운 이미지를 소비하면서 그 안의 인간까지 소비하지 않는 시선 역시 남아 있다.
'경멸'이 오늘까지 살아남은 까닭은 1963년의 사랑을 아름답게 보존했기 때문이 아니다. 사랑과 예술이 무너지는 과정에서 인간이 끝내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지 오래 바라봤기 때문이다. 빠르게 만들어지고 빠르게 사라지는 이미지가 넘치는 2026년, 고다르의 느리고 차가운 영화는 오히려 인간과 예술의 오래된 근본에 가까이 다가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