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미, 숨의 세계④] 정해인·강하늘의 목소리로 완성한 곤과 강하
얼굴과 몸짓 없이 호흡·간격·음색으로 전한 두 사람의 고독…이청아·유재명·김선영까지 더한 관계의 깊이
[KtN 박준식기자]정해인은 아가미가 생긴 곤을, 강하늘은 곤의 유일한 세계가 된 강하를 연기한다. 애니메이션 ‘아가미’에서 두 배우의 얼굴은 등장하지 않는다. 표정과 눈빛, 몸짓을 내려놓은 자리에는 목소리만 남는다. 배우가 지닌 익숙한 이미지를 걷어낸 뒤 숨과 말, 침묵으로 인물의 존재를 세워야 하는 작업이다.
실사 연기에서 목소리는 얼굴과 몸의 움직임을 따라간다. 작은 떨림은 눈빛과 손끝에서 보완되고, 말하지 않은 감정도 표정으로 전달된다. 애니메이션에서는 그림 속 인물이 이미 정해진 선과 색, 움직임을 갖고 있다. 배우의 목소리는 작화 위에 감정을 덧붙이는 데 머물지 않고 그림 속 몸이 어떤 시간을 살아왔는지 들려줘야 한다.
곤에게 목소리는 더욱 각별하다. 물속에서 살아남은 곤은 몸을 숨겨야 했고, 사람과 거리를 둔 채 성장했다. 목소리를 낸다는 행위 자체가 자신의 존재를 외부에 드러내는 선택이 된다. 말의 내용보다 말을 꺼내기까지의 호흡과 망설임, 문장 뒤에 남는 침묵이 곤의 내면과 가까이 맞닿는다.
목뒤의 아가미를 드러낸 곤은 몸에 새겨진 비밀로 먼저 설명된다. 영화가 곤에게 목소리를 부여하는 일은 낯선 신체를 지닌 존재를 구경의 대상으로 남겨두지 않는 과정이기도 하다. 아가미와 비늘을 가진 몸 안에도 기억과 두려움, 누군가에게 닿으려는 마음이 있다는 사실이 목소리를 통해 전해진다.
정해인은 원작의 오랜 독자였다. “감사하고 신기하다. 원작의 팬으로서 이 작품에 참여하게 된 것만으로도 행복하다”는 소감에는 이미 문장으로 만났던 인물을 직접 연기하게 된 배우의 조심스러움이 묻어난다. 독자로서 상상해 온 곤의 목소리와 영화가 구축한 곤의 모습을 한 인물 안에서 조율해야 했다.
정해인이 받아들인 곤은 세상과 단절된 상태에서도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사랑받기를 바라는 인물이다. 살아남은 사람만이 품을 수 있는 불안과 고독, 타인에게 닿고 싶은 마음이 동시에 존재한다. 생존에 성공한 몸과 존재를 확신하지 못하는 마음 사이의 간극이 곤의 목소리를 결정한다.
감정을 크게 드러내면 곤이 오랫동안 견뎌온 침묵이 사라지고, 지나치게 낮추면 사람에게 다가가려는 마음이 전달되지 않는다. 정해인은 “아주 희미하지만 분명히 살아 숨 쉬고 있는 감정의 목소리를 잘 담아내고 싶었다”고 말했다. 희미하다는 말은 감정이 약하다는 뜻보다 쉽게 드러낼 수 없다는 사정에 가깝다.
곤의 감정은 밖으로 분출되기보다 말 안쪽에 오래 머문다. 자신의 존재를 설명해야 하는 사람은 말하기 전부터 상대의 반응을 예상하고, 한 문장을 건넨 뒤에도 거절의 가능성을 기다린다. 곤의 목소리에 필요한 것은 화려한 변화보다 조심스러운 호흡과 말 사이의 여백이다.
목소리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몸과 분리되지 않는다. 호흡의 길이에는 긴장과 피로가 남고, 말의 속도에는 살아온 습관이 배어 있다. 곤의 아가미가 물속 호흡을 가능하게 하는 신체 기관이라면 정해인의 목소리는 곤이 사람들과 관계를 맺기 위해 내놓는 또 하나의 호흡이 된다.
후드를 쓴 곤과 강하는 어깨를 맞댄 채 같은 방향을 바라본다. 곤이 몸을 기댄 자세에는 가까운 사람에게만 허락한 신뢰가 담긴다. 두 인물의 목소리도 각자의 감정을 독립적으로 전달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곤이 말할 때 강하가 어떻게 침묵하는지, 강하의 말에 곤이 얼마나 늦게 응답하는지가 관계의 시간을 만든다.
강하늘은 평소 목소리 연기에 관심을 두고 좋은 기회를 기다려왔다고 밝혔다. “처음 대본을 읽었을 때부터 소재 자체에 강한 끌림을 느꼈다”는 말과 함께 대본 앞에 그려진 키아트의 빛과 색만으로도 끝까지 몰입했다고 설명했다. 강하의 목소리는 문장으로 읽은 인물과 그림에서 받은 첫인상을 함께 출발점으로 삼았다.
강하늘이 해석한 강하는 “겉과 속 모두 서툰 인물”이다. 곤을 지키는 역할만으로 설명되는 다정한 보호자와는 거리가 있다. 마음이 있어도 적절한 말로 옮기지 못하고, 타인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방식도 익숙하지 않다. 곤을 만나면서 조금씩 사람다움과 따뜻함을 알아간다는 설명은 강하 역시 관계 안에서 변하는 인물임을 짚는다.
강하의 서투름은 곤의 침묵과 다른 결을 지닌다. 곤은 자신을 드러냈을 때 돌아올 위험 때문에 말을 아끼고, 강하는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을 몰라 머뭇거린다. 서로 다른 이유로 말을 삼키는 두 사람이 만나면서 침묵은 단절이 아니라 관계의 일부가 된다.
말이 적은 인물을 연기할수록 한마디의 무게는 커진다. 다정함을 직접 말하지 않는 강하는 음색의 온도와 문장을 끊는 방식으로 감정을 전해야 한다. 곤에게 향한 마음이 보호인지 우정인지 가족애인지 미리 규정하기보다, 오랫동안 함께 살아온 사람에게 자연스럽게 밴 반응을 목소리에 담는 작업이 필요하다.
곤과 강하의 관계에는 웅변보다 생활의 시간이 쌓여 있다. 어린 시절부터 함께 지낸 사람들은 모든 감정을 말로 확인하지 않는다. 짧은 대답과 익숙한 침묵, 부르는 이름의 미세한 변화가 관계를 드러낸다. 정해인과 강하늘의 목소리는 서로의 연기를 돋보이게 하는 경쟁보다 두 인물이 공유한 시간을 설득하는 방향에서 만나야 한다.
노인은 어린 곤을 물에서 건져 올리고 세상에 드러나지 않도록 지킨다. 유재명의 목소리는 구조 이후 이어진 보호의 시간을 맡는다. 노인의 역할에는 놀라운 존재를 발견한 사람의 충격보다 살아 있는 아이를 외면하지 않은 어른의 태도가 먼저 놓인다.
노인이 곤에게 건네는 말은 곤이 인간의 세계에서 처음 듣는 언어와 연결된다. 낯선 몸을 판정하거나 설명하려는 말이 아니라 먹고 자고 살아가게 하는 생활의 언어다. 유재명은 강한 발성과 낮은 음색을 지닌 배우지만, 노인에게 필요한 무게는 권위보다 오래 지켜본 사람의 책임에 가깝다.
어린 곤을 받아들인 노인의 선택은 강하에게도 이어진다. 노인의 목소리가 곤의 생존을 일상으로 옮긴다면 강하의 목소리는 곤과 함께 성장한 시간을 잇는다. 두 인물의 말투와 호흡에는 곤을 대하는 세대별 태도와 생활의 차이가 담길 수 있다.
이청아가 맡은 해류는 곤의 존재를 기억하는 인물이다. “그것이 상상이 아닌 실존임을 이해하는 건 우리 둘뿐이라는 거죠”라는 말은 곤을 소문이나 환상의 대상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기억 속 존재가 실제로 살아 있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목소리다.
해류의 기억은 곤을 둘러싼 세계를 넓힌다. 강하만 알고 있던 존재가 다른 사람의 기억과 연결되면서 곤의 삶은 한 가정의 비밀에서 공동의 시간으로 이동한다. 목소리는 보이지 않는 기억을 현재로 불러오는 수단이 된다. 이청아는 곤을 목격한 사람의 확신과 오랫동안 간직한 기억의 결을 함께 다뤄야 한다.
허공에 여러 물건이 떠오른 가운데 한 인물이 두 팔을 벌리고 있다. 주변 사물이 질서를 잃은 듯 흩어진 구성은 곤의 세계에 닥치는 변화를 압축한다. 사건을 일으키는 인물의 목소리는 조용히 유지되던 관계에 다른 속도와 긴장을 가져온다.
뮤지컬 배우 김선영이 맡은 이녕은 곤의 삶을 뒤흔드는 사건과 연결된다. 무대에서 목소리와 신체를 함께 사용해 온 배우에게 애니메이션 녹음은 몸의 에너지를 소리 안으로 모으는 작업이 된다. 다만 이녕의 구체적인 선택과 사건의 결과는 영화 공개 전까지 제한적으로 알려져 있다. 목소리가 곤의 세계에 어떤 균열을 만드는지는 본편에서 확인할 부분으로 남는다.
어두운 안경을 쓴 인물은 숲과 울타리를 등지고 정면을 바라본다. 표정과 눈빛이 가려진 얼굴에서는 의도와 감정을 단번에 읽기 어렵다. 애니메이션의 인물에게 목소리가 더해지는 순간, 그림만으로는 닫혀 있던 내면의 방향이 열린다. 같은 표정도 음색과 말의 속도에 따라 냉정함과 두려움, 거리감과 방어로 달리 받아들여진다.
‘아가미’에는 정해인과 강하늘, 이청아, 유재명, 김선영을 비롯해 장원영, 권해효, 정웅인, 조한철, 박지연, 황상경이 참여했다. 여러 배우의 목소리는 인물마다 다른 색을 입히는 데서 그치지 않고, 곤을 받아들이거나 밀어내고 기억하는 사회의 여러 태도를 구성한다.
애니메이션의 목소리 연기는 배우의 유명세를 그림 위에 얹는 작업과 다르다. 관객이 익숙하게 기억하는 얼굴이 목소리보다 앞서면 곤과 강하 대신 정해인과 강하늘이 먼저 떠오를 수 있다. 두 배우에게는 자신의 이미지를 드러내면서도 인물의 존재를 가리지 않는 균형이 요구된다.
‘캐릭터를 삼킨 목소리’라는 홍보 문구는 배우와 인물의 완전한 일치를 강조하지만, 목소리 연기의 성취는 배우가 사라지는 데만 있지 않다. 배우가 살아오며 축적한 호흡과 감정의 기억이 인물의 삶과 만날 때 그림 속 몸은 비로소 고유한 시간을 얻는다. 정해인의 절제와 강하늘의 서투른 온기, 유재명의 생활감과 이청아의 기억, 김선영의 에너지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곤의 세계에 들어간다.
물속에서 곤을 살린 것은 아가미였지만 사람들 사이에서 곤을 살아 있게 하는 것은 관계다. 관계는 말로 시작되고 침묵 속에서 견뎌지며,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를 통해 다시 이어진다. 곤과 강하가 서로를 찾는 과정도 얼굴을 확인하는 일보다 사라진 목소리를 다시 듣는 일에 가까울 수 있다.
9월 9일 개봉하는 ‘아가미’에서 정해인과 강하늘은 얼굴 없이 관객을 만난다. 그림 속 인물이 먼저 보이고 배우의 목소리는 뒤에서 호흡을 잇는다. 곤의 아가미가 물속 생존의 증거라면 두 배우가 건넨 목소리는 곤과 강하가 서로의 세계에 실제로 존재했다는 흔적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