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카소 ‘토레로’ 8년 만의 귀환…소유와 기억 사이에 남은 도난 판화

30점 한정판 가운데 9번째 작품, 빈 아파트 벽에서 발견…회수 뒤에도 이동 경로와 최종 소유권은 미정

2026-08-27     박준식 기자
Picasso. 사진=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KtN 박준식기자]2018년 2월 미국 위스콘신주 밀워키 도심의 갤러리에서 사라진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1881~1973)의 판화 ‘토레로(Torero)’가 8년 만에 발견됐다. 퇴거한 세입자가 남긴 빈 아파트 벽에 액자가 걸려 있었고, 작품 위에는 오랜 시간을 짐작하게 하는 먼지가 쌓여 있었다. 전시장 진열장에서 대낮에 사라진 피카소의 판화는 금고나 미술품 창고가 아니라 평범한 주거 공간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다.

밀워키의 임대인 팀 더츠(Tim Dertz)는 빈 아파트를 정리하다 작품을 발견했다. 골동품을 다루는 지인에게 판화를 보여준 뒤 2018년 도난 사건과 연결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2026년 8월 5일 밀워키 경찰에 인계했다. 다음 날 감정 절차를 거쳐 도난 작품과 동일한 판화라는 사실이 확인됐다.

액자 뒷면에는 델린드 파인 아트 어프레이절스(DeLind Fine Art Appraisals)의 스티커가 그대로 붙어 있었다. 갤러리 소유주 빌 델린드(Bill DeLind)는 경찰의 연락을 받고 판화를 살핀 뒤 8년 전 사라진 ‘토레로’임을 확인했다. 종이와 액자도 크게 훼손되지 않은 상태였다.

여러 점으로 제작됐지만 대체할 수 없는 한 점

‘토레로’는 스페인어로 투우사를 뜻한다. 피카소가 1949년 파리 무를로 스튜디오(Mourlot Studio)에서 제작한 판화로, 전체 30점 가운데 이번에 회수된 작품에는 9번째 판본을 뜻하는 ‘9/30’이 표기돼 있다. 검은 잉크로 찍은 형상과 피카소가 녹색 크레용으로 남긴 서명이 함께 있다.

판화는 하나의 판에서 여러 점을 찍어내는 예술이다. 회화처럼 세상에 단 한 점만 존재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작가가 정한 수량 안에서 제작되고 번호와 서명이 부여된 판화는 단순한 복제품과 구별된다. 같은 판에서 태어난 30점도 종이와 인쇄 상태, 보존 과정, 소유 이력에 따라 서로 다른 물건이 된다.

‘9/30’이라는 숫자는 수량만 표시하지 않는다. 같은 도상을 공유하는 30점 가운데 특정한 한 점을 구별하는 고유번호다. 8년 동안 사라졌던 대상도 ‘토레로’라는 이미지 전체가 아니라 피카소가 서명한 30점 가운데 9번째 판화였다. 다른 판본을 구입한다고 해서 도난당한 작품의 빈자리가 채워지는 것은 아니다.

액자 뒷면에 남은 갤러리 스티커도 판화의 정체를 구성하는 일부가 됐다. 고가 미술품의 진위와 소유 관계는 작가의 서명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제작 번호와 재료, 인쇄 상태, 전시 기록, 거래 내역, 소유권의 이동이 이어져야 한 점의 이력이 성립한다. 먼지 속에서도 떨어지지 않은 작은 스티커는 판화가 어디에서 출발했는지를 알려주는 물질적 기록으로 남았다.

Picasso / 피카소. 사진=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붓질과 복수 제작이 만나는 슈거 리프트

피카소는 ‘토레로’ 제작에 슈거 리프트 애쿼틴트(sugar-lift aquatint) 기법을 사용했다. 설탕을 섞은 잉크나 구아슈 등으로 금속판에 그림을 그린 뒤 바니시와 물, 부식 과정을 거쳐 붓의 움직임과 농담을 판화로 옮기는 방식이다.

금속판을 직접 파서 선을 만드는 일반적인 에칭과 달리 슈거 리프트 애쿼틴트는 회화적인 면과 질감을 표현하는 데 유리하다. 판 위에 남긴 붓질은 부식과 인쇄를 거치며 종이 위의 검은 형상으로 바뀐다. 손으로 그린 흔적과 여러 점을 찍어내는 판화의 구조가 한 작품 안에서 만난다.

피카소는 회화뿐 아니라 에칭과 애쿼틴트, 석판화, 리놀륨 판화 등 다양한 판화 기법을 실험했다. 판화는 완성된 회화를 옮겨 놓는 부수적인 매체가 아니라 선과 면, 검은색의 농도와 종이의 질감을 새롭게 조절하는 독립적인 작업이었다. ‘토레로’의 희소성도 30점이라는 수량에만 머물지 않는다. 피카소가 금속판과 부식, 잉크와 종이를 거쳐 이미지를 구축한 제작 과정까지 작품 가치에 포함된다.

투우사는 피카소의 작업에서 여러 차례 등장한 소재다. 스페인 문화에 뿌리를 둔 투우에는 인간과 동물, 통제와 위험, 환호와 죽음이 함께 놓인다. 다만 ‘토레로’ 한 점에 피카소가 부여한 구체적인 상징이나 제작 당시의 발언은 확인되지 않았다. 작품 제목과 기법을 넘어선 해석을 작가의 의도로 단정할 수는 없다.

대낮에 사라진 작품, 일상 속에서 지워진 이름

판화는 2018년 2월 16일 밀워키 노스 제퍼슨가 700번지 일대에 있던 델린드 갤러리에서 도난당했다. 의뢰인에게 판매를 위탁받아 로비 진열장에 전시하던 작품이었다. 델린드가 위층에 머무는 사이 누군가 판화를 가져갔고, 범인을 특정할 만한 감시카메라 영상은 확보되지 않았다.

갤러리는 작품을 되찾기 위해 5000달러의 보상금을 내걸었다. 수사에는 연방수사국(FBI)도 참여했다. 한정 수량과 피카소의 친필 서명 때문에 판화는 당시 3만5000∼5만달러로 평가됐다.

도난은 작품의 물리적 위치뿐 아니라 사회적 지위도 바꿨다. 공개 전시물이었던 ‘토레로’는 한순간에 감춰야 하는 물건이 됐다. 피카소라는 이름과 높은 평가액은 작품의 가치를 높이는 근거였지만, 도난 이후에는 정상적인 거래와 공개를 어렵게 만드는 표지가 됐다.

널리 알려진 미술품일수록 훔친 뒤 처분하기 어렵다. 시장에 내놓으려면 진위와 소유 이력을 설명해야 하고, 설명하는 순간 도난 기록과 맞닥뜨릴 가능성이 커진다. 작품을 계속 감추면 금전적 가치를 실현할 수 없다. 정당한 소유권 없이 물리적으로 점유할 수는 있어도 공개적으로 판매하고 전시하기는 어려운 상태가 이어진다.

‘토레로’는 갤러리에서 사라진 뒤에도 누군가의 벽에 걸려 있었다. 사람의 시선이 닿는 곳에 존재하면서도 미술계와 수사기관에서는 행방불명 상태였다. 발견 당시 쌓여 있던 먼지는 판화가 장기간 움직이지 않았다는 정황을 남겼다. 유명 작가의 이름도 주변 사람들이 작품의 의미를 알아보지 못하면 일상적인 벽 장식과 다르지 않게 취급될 수 있다.

판화를 아파트로 가져온 사람과 장기간 보관한 사람이 같은 인물인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작품이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쳤는지, 도난 사실을 아는 사람이 보관했는지도 밝혀지지 않았다. 빈 아파트는 작품이 발견된 마지막 장소일 뿐, 8년의 이동 경로를 설명하는 출발점은 아니다.

피카소 & 자클린. 사진=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소유와 점유가 갈라진 8년

고가 미술품 도난은 ‘누가 가지고 있는가’와 ‘누구에게 속하는가’를 갈라놓는다. 아파트에 판화를 보관한 사람은 물리적으로 작품을 지배했을 수 있지만 정당한 소유권까지 얻은 것은 아니다. 원소유자는 법적 권리를 갖고도 8년 동안 작품에 접근하지 못했다.

회수된 판화가 곧바로 갤러리로 돌아가지 못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토레로’는 델린드의 소유물이 아니라 판매를 맡긴 고객의 작품이었다. 도난 뒤 보험금이 지급됐다면 보험사가 판화에 관한 권리를 넘겨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원소유자와 보험사 사이의 정산이 끝나야 반환 대상과 향후 처분 방식이 정해진다.

델린드는 보험 문제가 마무리되면 판화를 다시 사들여 공개 전시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도난과 회수 이력이 시장 가치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전망도 나왔다. 그러나 범죄 이력이 언제나 가격 상승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작품의 상태와 같은 판본의 거래 기록, 소유권의 명료성, 구매자의 판단이 함께 작용한다. 실제 매매나 경매가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8년의 사연을 구체적인 금액으로 환산하기는 어렵다.

미술품의 시장 가치는 작품 자체에만 머물지 않는다. 작가와 제작 시기, 기법, 희소성, 보존 상태, 소유 이력이 함께 가격을 형성한다. ‘토레로’에는 1949년의 제작 기록과 2018년의 도난, 2026년의 회수가 차례로 더해졌다. 도난 이력은 작품의 진위를 높이는 요소가 아니라 한 점의 판화가 통과한 시간의 기록이다.

공소시효가 끝난 뒤에도 남는 기록

형사처벌 가능성은 낮아졌다. 위스콘신주 법률은 별도의 예외가 적용되지 않는 중범죄의 기소 시한을 범행일로부터 6년으로 규정한다. 2018년 2월 발생한 절도 사건은 일반적인 기준에 따르면 2024년 공소시효가 끝났다. 밀워키 경찰은 작품이 빈 아파트에 도달한 경위와 발견 이전의 이동 과정에 관한 조사를 계속하고 있다.

공소시효는 국가가 범죄를 처벌할 수 있는 시간을 제한한다. 작품의 소유권과 도난 이력까지 없애는 제도는 아니다. 기소할 수 있는 시간이 끝났다고 해서 도난품이 정당한 재산으로 바뀌지는 않는다. 형사사법의 시간과 미술품의 소유 이력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이어진다.

델린드의 동업자였던 마이클 고포스(Michael Goforth)는 작품이 사라진 뒤 매년 도난일에 경찰에 연락해 사건을 다시 알려 달라고 요청했다. 고포스는 2026년 2월 세상을 떠나 회수 소식을 듣지 못했다. 수사 가능성이 줄어드는 동안 개인의 기억은 매년 같은 날짜에 사건을 현재로 불러냈다.

경찰이 보관 중인 ‘토레로’에는 피카소가 1949년 남긴 녹색 크레용 서명과 ‘9/30’이라는 번호가 있다. 액자 뒷면에는 밀워키 갤러리의 스티커가 붙어 있다. 제작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도난 기록과 8년의 공백도 이제 판화의 이력에 포함됐다.

작품의 물리적 행방은 확인됐지만 판화를 훔친 사람과 아파트에 가져온 사람, 장기간 보관한 사람의 관계는 밝혀지지 않았다. 보험사와 원소유자의 협의가 끝나야 최종 귀속도 결정된다. ‘토레로’가 다시 공개 전시장에 걸릴 수 있는지는 소유권 정리와 델린드의 재매입 여부에 달렸다. 먼지를 걷어낸 뒤 모습을 드러낸 것은 피카소의 판화 한 점만이 아니다. 한 사람이 가질 수 있는 물건과 정당하게 소유할 수 있는 작품 사이에 놓인 8년의 간극도 함께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