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use of Swans①] 안네 임호프, 옛 경찰서에서 다시 쓰는 발레와 권력
독재자의 소프트파워에서 발레를 되찾겠다는 선언…훈련된 신체와 식민 통치의 건축이 만나는 홍콩 타이쿤
[KtN 임우경기자]독일 작가 안네 임호프(Anne Imhof)가 2026년 9월 25일 홍콩 타이쿤 컨템퍼러리에서 ‘House of Swans’를 공개한다. 임호프의 아시아 첫 대규모 개인전이자 홍콩발레단과 함께 제작하는 첫 발레다. 회화와 청동 조각, 영상, 음향 설치도 타이쿤의 3개 층에 걸쳐 전개된다.
발레가 놓일 장소에는 통제와 처벌의 역사가 남아 있다. 타이쿤은 옛 중앙경찰서와 중앙치안법원, 빅토리아 감옥이 모여 있던 시설을 보존·재생한 문화예술 공간이다. 체포된 사람은 경찰서를 거쳐 법정에 섰고, 유죄판결을 받은 사람은 같은 구역의 감옥에 수감됐다. 법이 신체를 붙잡고 분류하며 이동을 제한하던 식민 통치의 구조가 한곳에 모여 있었다.
2026년 가을에는 홍콩발레단 무용수와 음악가, 아메리칸 발레 시어터 수석무용수 데번 토이셔(Devon Teuscher)가 이곳에 들어선다. 오래된 건축 안에서 사랑을 찾아 혼란스러운 도시를 통과하는 주인공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한때 이동을 금지하던 공간과 정교하게 설계된 움직임으로 완성되는 발레가 만난다.
임호프는 독재자들이 발레를 대표적인 소프트파워 수단으로 이용해왔다고 말했다. 권위주의 통치자가 발레를 사용했다는 이유만으로 발레 자체가 통치자의 소유물이 되는 것은 아니라며, ‘House of Swans’를 발레를 되찾으려는 시도에 가깝다고 설명했다.
임호프가 말한 탈환은 고전발레를 버리는 작업이 아니다. 이미 권력의 언어가 된 형식 안으로 들어가 다른 몸과 욕망, 관계를 담으려는 선택이다. 오래된 형식을 파괴하는 대신 누가 형식을 사용할 수 있는지 바꾸려 한다.
자유를 표현하기 위해 통제되는 몸
발레 무용수의 도약은 중력에서 벗어난 신체처럼 보인다. 공중에서 길게 뻗은 팔다리와 흔들림 없는 착지는 몸의 무게와 통증을 잠시 지운다. 관객이 마주하는 가벼움은 타고난 자유가 아니다. 어린 시절부터 이어진 훈련과 자세 교정, 반복과 평가가 신체에 남긴 결과다.
발레는 인간의 몸을 자연 상태에 두지 않는다. 발의 각도와 팔의 높이, 고개의 방향과 시선이 머무는 위치까지 세밀하게 조직한다. 처음에는 교사와 거울을 통해 전달되던 기준이 반복을 거쳐 근육과 감각 안으로 들어간다. 무용수는 누군가 지시하지 않아도 스스로 자세를 점검하고 수정한다.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Michel Foucault)는 ‘감시와 처벌’에서 근대 권력이 신체를 파괴하기보다 훈련한다고 분석했다. 시간과 공간을 세분하고, 행동을 관찰하며, 반복과 평가를 통해 명령에 정확히 반응하는 몸을 만든다. 학교와 군대, 공장과 감옥은 서로 다른 목적을 지녔지만 사람의 시간과 위치, 움직임을 관리한다는 점에서 같은 규율의 기술을 사용한다.
발레 훈련에서도 외부의 명령은 점차 몸의 습관으로 바뀐다. 권력은 눈앞의 지시자에게만 머물지 않는다. 무용수가 기준을 내면화한 뒤에는 자기 몸을 감시하고 교정한다. 감시자와 피감시자가 한 신체 안에 함께 존재하게 된다.
발레와 감옥을 같은 질서로 단정할 수는 없다. 감옥의 규칙은 신체의 가능성을 줄이지만, 발레의 규칙은 불가능해 보였던 움직임을 가능하게 한다. 반복 훈련을 거치지 않으면 도약과 회전, 균형도 완성되지 않는다. 규율은 신체를 제한하면서 동시에 신체가 도달할 수 있는 범위를 넓힌다.
자유와 규율은 여기서 단순한 반대말로 남지 않는다. 발레의 자유는 모든 규칙이 사라진 상태가 아니라, 규칙을 완전히 익힌 신체가 형식의 경계를 밀어내는 순간에 나타난다. 무용수는 형식에서 벗어나기 위해 먼저 형식을 받아들여야 한다. 복종처럼 보이는 반복이 표현의 조건이 되고, 표현을 가능하게 한 규율은 다시 자유의 범위를 정한다.
‘House of Swans’의 철학적 긴장은 규율의 존재보다 규율을 결정할 권한에서 생긴다. 타인이 정한 명령을 정확히 재현하는 몸과 자신이 익힌 형식을 이용해 새로운 해석을 만드는 몸은 겉으로 같은 동작을 수행해도 정치적으로 다르다. 발레를 되찾는다는 선언도 무용수가 형식의 목적과 변화에 얼마나 참여할 수 있는지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저주받은 백조에서 소속을 만드는 백조로
‘House of Swans’는 임호프가 2025년 뉴욕 파크애비뉴 아모리에서 발표한 ‘DOOM: House of Hope’의 마지막 발레에서 출발한다.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느슨하게 변주한 ‘DOOM’에는 배우와 스케이터, 무용수 등 약 60명이 참여했다. 관객은 고정된 좌석에 머물지 않고 약 3시간 동안 공연 공간을 돌아다녔다. 무대와 객석, 행위자와 관찰자를 나누던 경계도 흔들렸다.
캐풀렛과 몬터규 두 가문 사이에는 ‘희망의 집(House of Hope)’이 추가됐다. 서로 적대하는 두 가문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인물들에게 제3의 소속이 생겼다. ‘House of Swans’는 ‘DOOM’에서 태어난 세 번째 집단의 기원을 발레와 전시로 확장한다.
백조는 고전발레가 오랫동안 반복해온 상징이다. ‘백조의 호수’의 오데트는 저주에 묶여 낮에는 백조로 살고 밤에만 인간의 모습을 되찾는다. 사랑은 구원의 가능성으로 제시되지만 오데트의 몸과 운명은 마법사의 권력, 남성의 선택과 배신에 좌우된다. 아름다운 백조의 몸은 자신의 삶을 결정할 수 없는 존재의 비극과 분리되지 않는다.
무대 위 백조도 오데트와 비슷한 역설을 품는다. 관객은 우아한 움직임을 보지만 무용수의 몸에는 극도의 훈련과 통증이 쌓여 있다. 자유롭게 나는 백조를 표현하기 위해 실제 신체는 더 엄격하게 통제된다. 자유의 이미지와 규율의 현실이 한 몸 안에서 겹친다.
임호프의 백조들은 주어진 운명을 연기하는 존재에서 스스로 소속을 구성하는 집단으로 이동한다. 가문은 혈통과 출생으로 결정되지만 집은 함께 모인 사람들이 세울 수 있다. 캐풀렛과 몬터규 사이에 세 번째 집이 나타난다는 설정은 선택지를 하나 늘리는 데 머물지 않는다. 두 편 가운데 하나에 속해야 한다는 적대의 문법을 중단한다.
희망도 예정된 구원이나 낙관적인 결말과는 거리가 있다. 완성된 질서 안에서 더 나은 자리를 얻는 것이 아니라, 어떤 몸들이 함께 살아갈 수 있는지 새로 정하는 능력에 가깝다. 고전발레의 오데트가 타인의 사랑으로 저주에서 벗어나기를 기다렸다면, 임호프의 백조들은 자신들의 집을 세우며 소속의 조건을 바꾸려 한다.
사랑을 찾아 혼란스러운 도시를 통과하는 여성 주인공의 여정도 두 사람의 로맨스에 한정되지 않는다. 누구를 사랑할 수 있는지, 어떤 관계가 사회의 승인을 얻는지, 사랑하는 몸이 어느 공동체에 속할 수 있는지까지 이어진다. 사랑은 개인의 감정인 동시에 몸과 관계를 조직하는 사회적 질서가 된다.
신체를 가두던 건축과 신체를 움직이는 안무
타이쿤의 장소는 작품 바깥에 놓인 배경이 아니다. 옛 중앙경찰서는 사람을 추적하고 체포했으며, 중앙치안법원은 행위에 죄의 이름을 붙였다. 빅토리아 감옥은 유죄로 판단된 사람의 시간과 이동을 제한했다. 경찰과 법원, 감옥은 법률과 행정, 건축을 통해 누가 어디에 머물고 어디로 갈 수 있는지를 결정했다.
발레 역시 공간과 시간을 조직한다. 무용수가 서는 위치, 진입하는 방향, 팔을 올리는 순간과 착지할 지점이 안무 안에 정해진다. 여러 무용수의 몸은 대열과 속도, 간격을 맞추며 하나의 질서를 만든다. 개인의 움직임은 전체 구성을 위해 조정된다.
감옥과 발레는 신체를 조직한다는 점에서 닮았지만 같은 결과에 이르지는 않는다. 감금의 건축은 가능한 행동을 줄인다. 안무는 제한된 동작을 연결해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움직임을 만든다. 하나는 몸이 갈 수 있는 곳을 막고, 다른 하나는 규칙을 통해 몸이 도달할 수 있는 범위를 넓힌다.
두 질서의 경계는 고정돼 있지 않다. 발레가 국가와 제도의 위엄을 과시하는 수단으로 쓰이면 무용수의 신체는 개인의 표현보다 완벽한 집단 질서를 증명하는 데 동원된다. 감옥으로 사용됐던 건축도 과거를 감추지 않은 채 관객의 사유와 이동을 받아들이는 장소로 바뀔 수 있다. 통제와 자유는 건물이나 예술 장르에 본래부터 부여된 성질이 아니다. 누가 신체를 배치하고 어떤 목적을 부여하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타이쿤은 사람의 이동을 금지하던 벽을 남긴 채 문화예술 공간으로 전환됐다. 수감자를 외부와 분리하던 건축은 이제 도시의 관객을 안으로 끌어들인다. 공간의 용도가 달라졌다고 식민 통치의 기억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예술 공간으로의 재생은 과거를 지우는 방식이 아니라 과거의 구조를 현재의 시선 앞에 다시 놓는 방식이어야 한다.
‘House of Swans’가 홍콩의 구체적인 정치 현실을 직접 다룬다고 미리 단정할 근거는 없다. 작품을 현실 정치의 비유로만 좁히면 발레의 신체와 타이쿤의 건축이 형성하는 더 근원적인 관계를 놓칠 수 있다. 식민 통치의 시설과 고전발레의 훈련 체계가 만난다는 사실만으로도 권력이 몸을 다루는 두 방식은 충분히 드러난다.
한쪽에는 신체의 움직임을 금지하는 권력이 있다. 다른 쪽에는 움직임을 세밀하게 통제해 아름다움으로 전환하는 권력이 있다. ‘House of Swans’는 억압과 예술을 단순하게 갈라놓기보다 통제가 어떻게 공포가 되고, 기술이 되며, 때로는 자유의 조건으로 바뀌는지를 살핀다.
소프트파워는 강요하지 않고 매혹한다
발레는 궁정과 국가의 후원 아래 성장했다. 통일된 군무와 화려한 무대, 고도로 훈련된 무용수는 국가가 보유한 재정과 교육 체계, 문화적 세련미를 압축해 보여줬다. 완벽하게 정렬된 신체는 개인의 성취이면서 몸을 선발하고 훈련할 수 있는 제도의 능력을 증명했다.
소프트파워는 물리적 강제를 사용하지 않는다. 아름다움과 기술, 감동을 통해 특정한 문화와 질서에 대한 동의를 끌어낸다. 발레는 무대 위에서 국가를 직접 선전하지 않더라도 완벽한 신체와 조화로운 군무를 통해 질서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관객은 명령을 받지 않으면서도 완성된 질서에 매혹된다.
권력의 깊은 형태는 복종을 강요하는 데 머물지 않는다. 사람들이 특정한 규율을 아름답다고 느끼고, 스스로 규율을 따르고 싶게 만든다. 발레가 소프트파워로 기능해온 힘도 강압보다 매혹에 있다. 통제는 예술적 완성이라는 이름을 얻고, 신체의 희생은 초월적인 아름다움 뒤로 사라진다.
임호프가 발레를 되찾겠다고 말한 이유도 형식 자체와 형식을 사용한 권력을 분리하려는 데 있다. 권위주의 통치자가 발레를 이용했다고 해서 발레의 모든 움직임이 권위주의적인 것은 아니다. 형식에 축적된 기술과 아름다움을 다른 이야기와 공동체가 사용할 수 있다면 발레의 정치적 방향도 달라질 수 있다.
탈환은 과거의 흔적을 깨끗이 지우는 일이 아니다. 발레 안에 남은 궁정과 국가, 성별 규범과 신체 규율의 역사를 드러내면서 형식이 향하는 방향을 바꾸는 일이다. 백조의 우아함만 가져오고 백조를 가뒀던 저주를 잊는다면 새로운 발레는 오래된 아름다움을 반복하게 된다.
제도에서 되찾은 발레가 다시 제도의 작품이 되는 순간
‘House of Swans’는 제도 밖에서 벌어지는 비공식 공연이 아니다. 대형 문화기관의 위촉과 전시 체계, 전문 발레단이 축적한 훈련과 노동을 통해 제작된다. 국가와 엘리트 문화의 권위에서 발레를 되찾으려는 작품도 제도의 공간과 자원 없이는 완성되기 어렵다.
모순처럼 보이는 구조는 현대예술이 권력과 맺는 관계를 드러낸다. 예술은 권력 바깥의 순수한 장소로 완전히 빠져나갈 수 없다. 이미 존재하는 공간과 자본, 제도와 언어를 빌려 새로운 의미를 만든다. 왕실과 국가가 발전시킨 발레를 버리지 않고 다른 인물과 욕망을 올려놓는다. 식민 통치가 사용한 건물을 허물지 않고 예술 공간으로 바꾼 타이쿤도 같은 구조에 놓인다.
과거의 형식은 남아 있지만 형식을 사용하는 주체와 목적은 달라질 수 있다. 건물의 벽은 그대로 있어도 벽 안에서 허용되는 행동이 바뀐다. 발레의 동작은 남아 있어도 동작이 표현하는 사랑과 소속, 공동체의 모습이 달라질 수 있다.
형식의 사용자가 달라졌다는 사실만으로 권력관계까지 사라지지는 않는다. 국가의 자리에 세계적인 현대미술가가 들어서고, 무용수의 몸이 한 작가의 구상을 구현하는 수단으로만 남는다면 권력의 중심이 이동했을 뿐이다. 발레를 되찾았다는 선언은 작품의 내용뿐 아니라 제작 과정에서도 확인돼야 한다.
홍콩발레단 무용수와 음악가, 데번 토이셔가 완성할 움직임은 임호프의 구상에서 출발한다. 공연이 실제 형태를 얻는 순간에는 무용수 각자가 축적한 기술과 기억, 해석이 개입한다. 발레의 탈환은 작가 한 사람이 고전 형식을 점유하는 데 있지 않다. 형식을 수행하는 몸들이 작품의 방향을 함께 바꿀 수 있을 때 비로소 소유의 질서에서 벗어난다.
자유는 규칙이 사라진 자리에 오지 않는다
규칙이 전혀 없는 몸은 자유로운 몸이라기보다 아직 어떤 움직임도 선택하지 못한 몸에 가깝다. 인간은 언어와 관습, 제도와 타인의 시선 속에서 살아간다. 완전히 바깥으로 나가는 자유보다 자신을 움직이는 규칙의 기원을 알고, 규칙을 바꿀 권리를 확보하는 자유가 현실에 가깝다.
발레 무용수도 형식을 버림으로써 자유로워지는 것이 아니다. 오랜 훈련으로 얻은 기술을 자신의 해석에 사용할 때 자유가 생긴다. 규율은 그대로 남아 있지만 규율의 목적과 소유자가 달라진다.
임호프의 백조들은 저주가 사라지기를 기다리는 대신 자신들이 속할 집을 만든다. 캐풀렛과 몬터규 가운데 하나를 고르지 않고 제3의 소속을 구성한다. 주어진 세계에서 더 나은 위치를 배정받는 것이 아니라 위치를 나누는 질서를 다시 쓰려는 움직임이다.
타이쿤의 백조들이 얼마나 높이 도약하는지는 부차적이다. 더 오래 남는 것은 도약한 몸이 어디에 내려서는가다. 고전발레가 허용한 자리로 돌아갈지, 권력으로부터 되찾은 형식을 새로운 공동체와 나눌지에 따라 ‘House of Swans’의 자유가 갈린다.
발레의 역사는 완벽한 몸을 만드는 과정에서 수많은 몸을 선별하고 교정해왔다. 타이쿤의 역사도 법이 승인한 이동과 금지된 이동을 나눠왔다. ‘House of Swans’는 서로 다른 두 규율의 역사를 한곳에 놓는다. 자유는 규율이 사라진 빈자리에서 나타나지 않는다. 누가 규칙을 만들고, 누구의 몸에 적용하며, 몸이 규칙을 되돌려 바꿀 수 있는지를 둘러싼 관계 속에서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