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use of Swans②] ‘안네 임호프의 발레’ 뒤에 놓인 몸의 저자성

홍콩발레단 무용수·음악가와 데번 토이셔가 완성하는 대형 위촉작…예술가의 서명과 공동 창작의 경계

2026-08-28     임우경 기자

[KtN 임우경기자]‘House of Swans’는 안네 임호프(Anne Imhof)의 첫 발레로 소개된다. 전시와 공연의 제목에는 임호프의 이름이 붙고, 회화와 조각, 영상과 음향, 안무를 연결하는 세계도 임호프의 작품으로 귀속된다. 그러나 발레가 실제 형태를 얻는 순간에는 다른 사람의 몸이 필요하다. 홍콩발레단 무용수와 음악가, 아메리칸 발레 시어터 수석무용수 데번 토이셔(Devon Teuscher)가 각자의 기술과 해석을 보태야 공연이 성립한다.

한 작가의 구상과 여러 공연자의 몸 사이에서 예술의 저자성은 단순하게 나뉘지 않는다. 움직임을 처음 구상한 사람, 안무를 몸에 옮긴 사람, 리허설에서 새로운 동작을 발견한 사람, 공연 도중 발생한 변화에 대응한 사람이 서로 다를 수 있다. 관객이 보는 작품은 작가의 머릿속에 있던 생각이 아니다. 여러 사람의 판단과 기억, 호흡과 피로를 통과한 결과다.

‘안네 임호프의 발레’라는 명명은 작품의 중심을 빠르게 전달한다. 동시에 제작에 참여한 사람들의 기여를 한 예술가의 서명 아래 압축한다. 임호프가 권력으로부터 발레를 되찾겠다고 선언한 순간, 되찾은 발레가 다시 누구의 이름으로 소유되는지도 함께 살펴야 한다.

몸은 작가의 재료가 될 수 있는가

화가는 물감의 농도와 색을 조절한다. 조각가는 청동과 돌을 깎거나 덧붙이며 형태를 고정한다. 공연에서 작가가 다루는 재료는 살아 있는 사람의 몸이다. 신체는 물감이나 청동처럼 의도에 따라 완전히 통제할 수 있는 물질이 아니다. 피로를 느끼고 통증에 반응하며, 자신이 축적한 기억을 바탕으로 매 순간 판단한다.

무용수는 안무를 전달하는 수동적인 통로에 머물지 않는다. 같은 동작도 누가 수행하느냐에 따라 속도와 무게, 정서가 달라진다. 팔을 들어 올리는 시간, 발이 바닥에서 떨어지는 순간, 상대를 바라보는 시선의 길이가 미세하게 변한다. 안무가 기록된 구조라면 공연은 구조가 특정한 몸을 만나 발생하는 사건이다.

프랑스 철학자 모리스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는 신체를 정신이 사용하는 도구로 보지 않았다. 인간은 몸을 통해 세계를 지각하고, 몸으로 공간과 타인의 존재를 이해한다. 신체는 명령을 받아 움직이는 물체가 아니라 세계와 관계를 맺는 주체다.

발레 무용수의 지식도 언어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수년 동안 반복한 움직임은 근육과 관절, 균형 감각에 저장된다. 무용수는 도약 각도를 매번 계산하지 않고도 자신의 위치를 안다. 함께 춤추는 사람의 호흡과 체중 이동을 감지해 다음 동작을 조절한다. 몸이 사고하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임호프는 무용수들이 오랜 반복을 통해 움직임을 내면화하며, 근육 자체가 기억을 품는다고 설명해왔다. ‘House of Swans’에서 사용되는 것은 한 사람의 신체만이 아니다. 각 무용수가 축적한 훈련과 실패, 교정과 통증의 시간까지 작품 안으로 들어온다.

사진= Sprüth Magers

무용수의 몸을 재료라고 부르는 순간 윤리적 긴장이 생긴다. 재료는 작가가 선택하고 배열한 뒤 소유할 수 있지만, 사람의 몸은 작품이 끝난 뒤에도 자신의 삶을 계속한다. 공연자가 제공하는 것은 몸의 외형만이 아니다. 평생 쌓은 기술과 감각, 위험을 감수하는 능력, 무대에서 내리는 판단까지 작품에 내어준다.

현대미술의 퍼포먼스는 작가의 의도와 공연자의 신체를 결합하지만 두 요소는 완전히 하나가 되지 않는다. 작가는 전체 구성을 통제하려 하고, 공연자의 몸은 계획에 없던 차이를 만든다. 살아 있는 몸을 사용하는 예술은 통제가 완성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성립한다.

데번 토이셔의 몸에 축적된 두 개의 언어

데번 토이셔는 ‘House of Swans’의 서사와 제작 과정을 연결하는 인물이다. 토이셔는 2025년 뉴욕 파크애비뉴 아모리에서 열린 ‘DOOM: House of Hope’ 마지막 발레 부분에 출연했다. ‘House of Swans’는 해당 발레를 독립된 세계로 확장한 작품이다.

임호프와 토이셔는 ‘DOOM’ 작업 과정에서 만났고 연인 관계로 발전했다. 새로운 작품은 고전발레에 대한 예술적 관심뿐 아니라 두 사람의 만남과 사랑에서도 출발한다. 사랑을 찾아 혼란스러운 도시를 통과하는 여성 주인공의 여정에는 실제 삶과 허구의 경계가 겹쳐 있다.

토이셔의 참여를 연인의 협업으로만 설명하면 발레 무용수로서 축적한 전문성이 사적인 서사에 가려진다. 토이셔의 몸에는 아메리칸 발레 시어터에서 익힌 고전발레의 문법과 임호프의 공연에서 경험한 현대미술의 언어가 함께 들어 있다.

고전발레는 동작의 정확성과 형식의 지속성을 중시한다. 임호프의 퍼포먼스는 정해진 구조를 따르면서도 공연자와 공간, 관객 사이에서 발생하는 우연을 받아들인다. 토이셔는 완성된 형식을 정확하게 재현하는 몸과 불확실한 상황에서 자신의 판단을 사용하는 몸 사이를 오간다.

고전발레의 무용수는 배역을 해석하지만 작품의 전체 질서를 바꾸지는 않는다. 임호프의 세계에서는 공연자가 내리는 순간적인 결정이 작품의 구성을 흔들 수 있다. 토이셔의 몸은 두 예술 체계가 충돌하고 협상하는 장소가 된다.

사랑도 같은 구조를 가진다. 타인을 사랑한다는 것은 상대를 자신의 세계 안에 완전히 흡수하는 일이 아니다. 친밀함이 깊어질수록 상대를 소유할 수 없다는 사실도 선명해진다. 공동 창작은 사랑과 마찬가지로 가까워지는 일과 독립성을 인정하는 일을 동시에 요구한다.

임호프가 토이셔의 몸을 자신의 작품 안에 배치하면서도 토이셔가 축적한 독자적인 언어를 보존할 수 있는지에 따라 협업의 성격이 달라진다. 연인의 몸이 예술가의 영감으로만 남을 때 사랑은 창작자를 위한 서사로 축소된다. 상대의 기술과 판단이 작품의 형태를 바꿀 때 두 사람의 관계는 공동 창작으로 확장된다.

작가의 이름과 보이지 않는 다수

미술 제도는 작품을 작가의 이름으로 분류한다. 미술관은 개인전을 열고, 갤러리는 작가의 작품을 판매하며, 시장은 작가의 이력과 서명을 중심으로 가치를 매긴다. 대형 퍼포먼스에 많은 사람이 참여해도 작품은 대체로 한 예술가의 이름 아래 남는다.

발레단의 제작 방식은 다르다. 안무와 음악, 무용, 지휘, 연주, 무대와 의상, 조명의 역할을 나눠 표기한다. 같은 작품을 여러 무용수가 번갈아 공연하며 배역에 따라 서로 다른 해석이 만들어진다. 안무가의 구상이 중심에 놓이지만 무대의 결과는 여러 전문 인력이 나눠 만든다.

현대미술과 발레가 결합하면 두 제도의 저자 표기 방식도 충돌한다. 미술은 한 작가의 통합적인 세계관을 앞세우고, 공연예술은 창작과 실연의 역할을 구분한다. ‘안네 임호프의 첫 발레’라는 표현은 미술의 명명법에 가깝다. 홍콩발레단 무용수와 음악가가 참여한 공동 제작이라는 구조는 공연예술의 집단성을 드러낸다.

프랑스 비평가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는 작품의 의미를 저자의 의도에 고정하는 관습을 비판했다. 작품은 창작자의 설명만으로 완성되지 않으며 이미 존재하는 언어와 문화, 독자의 해석을 거치며 새로운 의미를 얻는다고 봤다.

공연에서는 저자의 단일성이 더욱 직접적으로 흔들린다. 안무는 작가의 구상에서 출발하지만 무용수의 몸을 거치지 않고 관객에게 도달할 수 없다. 무용수는 작품을 읽는 독자이면서 관객에게 전달될 문장을 다시 쓰는 사람이다. 정해진 동작을 수행하면서도 속도와 강도, 호흡과 시선을 선택한다.

공연자가 바뀌면 작품도 달라진다. 동작의 순서와 음악이 같아도 한 무용수의 체형과 훈련, 감정의 표현 방식은 다른 무용수와 같을 수 없다. 안무는 반복할 수 있지만 공연은 완전히 반복되지 않는다. 작가가 만든 구조는 지속되지만 구조 안에서 발생하는 의미는 매번 새로 만들어진다.

저자 한 사람을 중심에 놓는 방식은 작품의 책임과 권리를 정하는 데 필요하다. 동시에 창작의 실제 과정을 한 사람의 천재성으로 환원할 위험도 품는다. 공연자의 노동과 해석이 사라진 자리에는 예술가의 이름만 남고, 집단으로 제작된 작품은 개인의 업적으로 기록된다.

무용수는 작품을 수행하는가, 작품을 만드는가

공동 창작과 실연의 경계는 움직임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갈린다. 완성된 동작을 전달받아 정확히 수행한다면 무용수의 역할은 실연에 가깝다. 리허설에서 무용수의 제안과 신체 조건이 안무를 바꾸고, 즉흥적인 판단이 작품의 구조에 남는다면 창작의 범위가 넓어진다.

두 역할은 우열로 나눌 수 없다. 완성된 안무를 높은 수준으로 수행하는 일에도 오랜 기술과 해석이 필요하다. 실연자가 반드시 공동 저자로 인정돼야 예술적 가치가 생기는 것도 아니다. 구분이 필요한 이유는 서로 다른 기여를 한 사람들의 역할을 정확히 남기기 위해서다.

창작의 경계는 법과 예술에서도 다르게 그어진다. 공연자는 자신의 실연을 무단으로 녹음·녹화하거나 복제·유통하는 행위를 제한할 수 있다. 그렇다고 공연자가 안무의 공동 저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안무의 권리를 소유하지 않더라도 공연자의 해석이 작품에서 차지하는 예술적 비중까지 사라지지는 않는다.

법은 동의와 이용의 범위를 정하지만 예술적 기여의 깊이를 모두 판단하지 못한다. 계약에 서명하고 정당한 보수를 받았더라도 작품이 한 작가의 이름으로만 기억된다면 제작의 역사는 실제보다 좁아진다.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것과 타인의 창작을 충분히 인정하는 것은 서로 다른 기준이다.

임호프의 퍼포먼스는 통제와 우연 사이에서 만들어져 왔다. 전체 구조와 동선, 음악과 공간은 정교하게 설계되지만 공연자의 몸은 계획에 없던 차이를 만든다. 임호프가 현장에서 지시를 조정하고 공연자도 상황에 반응하면서 작품은 고정된 안무와 즉흥의 중간에 놓인다.

이 구조에서 작가는 절대적인 지휘자도, 완전히 물러난 관찰자도 아니다. 작품이 향할 방향을 정하면서 다른 사람의 몸이 만들어내는 변화를 받아들인다. 공동 창작은 작가가 권한을 모두 포기하는 상태가 아니라 통제할 수 없는 타인의 존재를 작품의 조건으로 인정하는 방식에 가깝다.

살아 있는 몸이 기록물로 바뀌는 순간

공연은 끝나면 사라진다. 무용수의 움직임은 같은 형태로 다시 나타나지 않으며 한 번의 공연은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만 존재한다. 살아 있는 몸의 예술은 사라짐을 조건으로 삼는다.

영상과 사진은 사라지는 공연을 보존한다. 동시에 공연자의 몸을 반복해서 재생하고 전시할 수 있는 이미지로 바꾼다. 한 번의 움직임은 기록되는 순간 다른 시간과 장소로 이동할 수 있는 자산이 된다.

현대미술에서 퍼포먼스 기록물은 단순한 보관 자료에 머물지 않는다. 전시장 영상으로 상영되고, 미술관 소장품에 포함되거나 다른 기관으로 옮겨질 수 있다. 공연자의 몸은 일회적인 실연을 넘어 작가의 작품 세계를 구성하는 지속적인 이미지가 된다.

몸과 이미지의 시간은 다르다. 무용수의 신체는 나이를 먹고 변화하지만 기록된 영상 속 움직임은 같은 모습으로 반복된다. 살아 있는 사람에게서 분리된 몸의 이미지는 작가와 기관의 전시 체계 안에 오래 남을 수 있다.

공연 당시 자신의 몸을 사용할 권한을 허용하는 것과 기록된 이미지를 장기간 유통하도록 허용하는 것은 같은 선택이 아니다. 공연자는 무대 위에서 움직임을 통제할 수 있지만 편집된 영상이 어떤 맥락에서 반복되는지까지 통제하기 어렵다. 기록은 공연을 보존하면서 공연자의 몸을 공연자의 현재로부터 떼어낸다.

‘House of Swans’가 회화와 조각, 영상, 음향 설치를 하나의 세계로 구성한다는 점에서 무용수의 몸은 공연이 끝난 뒤에도 작품 안에 남을 가능성이 있다. 살아 있는 공연이 전시 이미지로 이동하는 과정은 작품의 지속성을 넓히지만 몸의 소유와 이용을 둘러싼 관계도 바꾼다.

크레디트는 작품의 윤리이자 역사

크레디트는 작품 끝에 붙는 부속 정보가 아니다. 누가 무엇을 만들었고 어떤 판단을 보탰는지 남기는 가장 기본적인 역사다. 이름이 기록되면 참여자는 교환 가능한 인력에서 특정한 창작자로 돌아온다.

세계적인 작가의 이름은 관객과 기관, 시장을 움직이는 힘을 지닌다. 이름의 힘이 커질수록 작품을 가능하게 한 다른 이름들은 주변으로 밀려나기 쉽다. 작가의 명성은 공동 작업을 성사시키는 자원이면서 공동 작업의 여러 주체를 가리는 그늘이 될 수 있다.

공동 창작이 모든 참여자에게 같은 비중의 저자성을 나눠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역할과 책임, 기여의 정도는 서로 다르다. 작가가 전체 구성을 맡고 안무가가 움직임을 설계하며 무용수가 해석과 변형을 더했다면 차이를 지우지 않은 채 각자의 기여를 구체적으로 기록할 수 있다.

예술가의 서명은 작품을 하나의 세계로 묶는다. 크레디트는 하나로 묶인 세계가 실제로는 여러 사람의 노동과 판단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다시 펼쳐 보인다. 두 체계는 서로를 부정하지 않는다. 작가의 책임을 분명히 하면서 공동 창작의 구조도 보존할 수 있다.

‘House of Swans’가 권위와 제한, 신체의 존재를 다루는 작품이라면 제작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과 역할도 작품의 주제에서 벗어나 있지 않다. 무대 위에서 권력을 비판하면서 제작 과정에서는 한 사람의 이름만 남긴다면 작품의 형식과 내용 사이에 간격이 생긴다.

탈환된 발레를 다시 소유하지 않는 방법

임호프는 독재자들이 소프트파워로 사용해온 발레를 되찾으려 한다. 권력의 도구가 된 고전 형식으로 다른 사랑과 공동체를 이야기하겠다는 구상이다. 탈환의 의미는 공연의 서사뿐 아니라 제작 방식에도 적용된다.

국가의 소유에서 벗어난 발레가 유명 예술가 한 사람의 소유로 옮겨가면 권력의 집중은 다른 형태로 반복된다. 무용수를 작품을 구현하는 신체로만 다룬다면 ‘House of Swans’가 탐구하는 권위와 제한은 공연 바깥에 그대로 남는다.

발레를 되찾는 일은 새로운 소유자를 정하는 데 있지 않다. 형식을 수행하는 사람들이 움직임의 의미를 바꿀 수 있고, 각자의 기여가 작품의 역사에 남을 때 탈환은 소유권 이전을 넘어선다. 작가는 세계를 만들지만 그 세계 안에서 움직이는 몸까지 완전히 소유할 수 없다.

사랑과 공동 창작은 타인을 자신의 일부로 만들 수 없다는 사실에서 시작한다. 친밀한 관계는 두 사람의 경계를 없애는 일이 아니라 서로 다른 존재가 관계 안에 머물 수 있도록 자리를 만드는 일이다. 예술가와 공연자의 관계도 다르지 않다. 다른 사람의 몸을 자신의 작품 안에 배치하는 것만으로는 공동 창작이 완성되지 않는다. 몸이 지닌 지식과 선택, 이름이 작품 안에서 계속 보이도록 해야 한다.

‘House of Swans’의 백조들이 누구의 지시로 움직이는지만큼 누구의 이름으로 기억되는지도 중요하다. 한 작가의 세계 안에서 여러 몸이 자신의 언어를 유지할 수 있을 때 발레는 권력의 소유물에서 벗어난다. 되찾은 형식을 다시 독점하지 않는 것, 바로 그 절제가 임호프가 말한 탈환을 완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