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use of Swans③] 같은 전시, 서로 다른 작품을 보는 관객들
라이브 발레와 전시 기록 사이에서 갈라지는 경험…안네 임호프가 흔드는 관람자의 위치와 목격의 위계
[KtN 임우경기자]안네 임호프(Anne Imhof)의 ‘House of Swans’는 전시이면서 공연이다. 회화와 청동 조각, 영상, 음향 설치는 전시장에 남아 관객을 기다린다. 발레는 무용수가 움직이는 동안에만 존재한다. 같은 제목 아래 놓였지만 작품을 경험하는 시간과 방식은 서로 다르다.
라이브 공연을 본 관객은 무용수의 호흡과 발이 바닥에 닿는 소리, 몸 사이의 거리와 긴장을 경험한다. 공연이 없는 시간에 전시장을 찾은 관객은 움직임이 지나간 자리와 기록된 이미지, 남겨진 사물을 마주한다. 한쪽은 사건을 목격하고, 다른 한쪽은 사건의 흔적을 읽는다.
두 관객은 같은 ‘House of Swans’를 봤다고 말할 수 있지만 실제로 받아들이는 작품은 같지 않다. 공연을 본 관객에게 회화와 조각은 무용수의 움직임과 연결된다. 공연을 보지 못한 관객에게 사물은 별도의 상상과 해석을 요구한다. 작품의 정체성은 전시장에 놓인 대상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관객이 어느 시간에 도착하고 어디에 서 있었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미술관은 일반적으로 작품을 안정적으로 보존하고 반복해서 보여주는 제도다. 공연은 같은 경험을 반복해서 제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전제로 한다. ‘House of Swans’는 보존하려는 미술관과 사라지려는 공연을 한 공간에 놓는다. 작품이 지속되는 시간과 관객이 접근할 수 있는 시간이 어긋나면서 관람의 평등도 흔들린다.
작품 앞에 서는 일과 사건 안에 들어가는 일
회화 앞에 선 관객은 대체로 자신이 원하는 만큼 머물 수 있다. 가까이 다가가 표면을 살피거나 멀리 물러나 구성을 볼 수 있다. 다른 작품을 먼저 본 뒤 다시 돌아올 수도 있다. 작품은 같은 자리에 남아 관객의 선택을 기다린다.
공연의 시간은 관객에게 맞춰 멈추지 않는다. 한 번 지나간 동작은 되돌릴 수 없고, 시선을 옮긴 사이 발생한 움직임은 사라진다. 앞사람의 몸에 가려진 부분과 다른 공간에서 동시에 벌어진 행동도 다시 볼 수 없다. 관객은 작품 전체를 소유하지 못한 채 자신이 목격한 일부만 가지고 공연장을 나온다.
라이브 공연의 특별함은 완전한 경험을 제공하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완전하게 볼 수 없다는 조건에서 생긴다. 같은 공간에 있는 무용수와 관객은 하나의 시간을 공유하지만 서로 다른 위치에서 각기 다른 공연을 경험한다. 작품은 전체로 존재하더라도 누구도 전체를 볼 수 없다.
임호프는 ‘DOOM: House of Hope’에서 관객을 고정된 좌석에서 풀어놓았다. 약 3시간 동안 이어진 공연에서 관객은 넓은 공간을 돌아다니며 자신의 시점을 선택했다. 무대 정면에서 하나의 구도를 바라보는 대신 공연자와 다른 관객 사이를 이동했다.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이 완전한 시야를 보장하지는 않았다. 가까이 다가간 관객은 몸의 세부를 볼 수 있지만 다른 곳에서 벌어지는 일을 놓친다. 멀리 물러난 관객은 전체 구성을 보지만 공연자의 표정과 호흡을 잃는다. 선택한 위치는 하나의 시야를 열면서 다른 시야를 닫는다.
관객의 자유는 모든 것을 볼 권리가 아니라 자신이 감당할 결핍을 선택하는 권리에 가까워진다. 공연의 의미도 관객 앞에 완성된 형태로 주어지지 않는다. 무엇을 봤고 무엇을 놓쳤는지, 다른 사람의 몸에 시야가 어떻게 가려졌는지까지 작품 경험에 포함된다.
관객은 작품 바깥에 서 있지 않는다
근대 미술관은 관객과 작품의 거리를 안정적으로 관리해왔다. 작품은 벽이나 좌대에 놓이고 관객은 정해진 선 밖에서 바라본다. 눈으로는 접근할 수 있지만 몸은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관람의 자유도 작품을 건드리지 않는다는 규칙 안에서 허용된다.
임호프의 퍼포먼스는 관객의 몸을 작품 안으로 끌어들인다. 관객이 서 있는 위치와 이동하는 속도, 다른 사람과 형성하는 간격이 공연의 구도를 바꾼다. 공연자는 관객 사이를 지나가고, 관객은 다른 관객의 시야를 가린다. 바라보는 사람도 공간의 구성 요소가 된다.
프랑스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ère)는 관객을 수동적인 존재로 규정하는 관습을 비판했다. 가만히 앉아 바라보는 일도 단순한 수용이 아니다. 관객은 자신이 본 것을 과거의 경험과 연결하고, 작품이 제시한 요소를 선택하거나 거부하며, 나름의 이야기를 만든다. 해석하는 순간 관객은 이미 활동하고 있다.
‘House of Swans’에서 관객의 활동은 정신적인 해석을 넘어 신체의 이동으로 나타난다. 어디에 설지 선택하고, 누구를 따라갈지 결정하며, 다른 관객과 공간을 나눈다. 작품은 관객에게 하나의 의미를 전달하기보다 여러 갈래의 경험을 발생시킨다.
자유로운 이동도 권력과 무관하지 않다. 키가 큰 사람과 작은 사람,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사람과 이동에 제약이 있는 사람이 확보할 수 있는 시야는 다르다. 공연자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데 익숙한 관객과 주변에 머무는 관객도 다른 경험을 얻는다. 형식적으로 같은 공간을 허용받아도 모든 관객이 같은 위치를 차지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관람의 자유를 이동 가능성만으로 판단하면 몸마다 다른 조건이 지워진다. 공연장이 좌석 번호를 없애고 경계를 열어도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사람이 더 많은 시야를 확보할 수 있다. 자유롭게 보라는 요청은 때로 관객에게 경쟁을 요구한다.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중요한 움직임을 찾아내며 다른 사람보다 먼저 도착해야 하는 관람이 만들어질 수 있다.
관객을 해방하는 형식이 또 다른 관람의 위계를 낳는 역설이다. 작품은 정면의 권위를 없애지만, 관객은 스스로 중심과 주변을 구분한다. 모두가 자유롭게 이동하는 공간에서도 누군가는 공연자 곁에 서고, 누군가는 사람들 뒤에 남는다.
라이브 공연이 만드는 목격자의 특권
공연을 직접 봤다는 말에는 단순한 관람 이상의 의미가 붙는다. 같은 시간과 공간에 있었다는 사실은 대체하기 어려운 경험이 된다. 사진과 영상이 남아도 현장의 공기와 소리, 신체의 크기와 거리는 완전히 재현되지 않는다.
독일 철학자 발터 베냐민(Walter Benjamin)은 기술 복제가 예술작품을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 묶어두던 유일성을 흔든다고 분석했다. 사진과 영화는 작품을 원래 있던 자리에서 떼어내 더 많은 사람에게 전달한다. 접근 범위는 넓어지지만 원본과 마주했다는 독특한 경험의 권위는 약해진다.
라이브 공연은 복제 시대에도 강한 유일성을 유지한다. 무용수와 같은 공간에서 같은 시간을 보냈다는 사실은 영상으로 대체하기 어렵다. 공연이 끝나면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조건이 경험의 가치를 높인다.
‘House of Swans’의 라이브 공연을 본 관객은 단순한 소비자가 아니라 사건의 목격자가 된다. 공연을 보지 못한 관객은 영상과 사진, 설치를 통해 이미 지나간 움직임을 추론한다. 두 경험 사이에는 정보량의 차이뿐 아니라 작품과 맺는 관계의 차이가 있다.
목격자는 자신이 그곳에 있었다는 사실을 말할 수 있다. 공연자의 움직임과 공간의 분위기를 기억하고, 다른 사람에게 전달한다. 공연을 보지 못한 관객은 목격자의 언어와 기관이 선택한 기록을 통해 사건에 접근한다. 라이브 공연이 끝난 뒤 작품의 역사는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의 기억과 남겨진 기록 사이에서 구성된다.
희소한 경험은 예술적 가치와 사회적 특권을 동시에 만든다. 직접 목격했다는 사실은 작품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감각을 제공하지만, 현장에 없었던 관객의 해석을 낮은 단계로 밀어낼 수도 있다. 라이브 공연이 작품의 완성된 형태로 간주되면 공연을 보지 못한 관객은 언제나 불완전한 작품만 접한 사람이 된다.
‘House of Swans’가 전시와 발레를 하나의 세계로 묶는 순간, 공연을 본 사람과 보지 못한 사람 사이에 목격의 위계가 생긴다. 전시가 독립적으로 성립하지 못하고 공연의 흔적만 제공한다면 대다수 관객에게 미술관은 이미 끝난 사건의 주변부가 된다.
남겨진 사물은 부재를 감추지 않는다
퍼포먼스가 끝난 전시장에는 사물이 남는다. 회화와 청동 조각, 영상과 음향 설치는 공연자의 몸이 사라진 뒤에도 관객을 맞는다. 남겨진 사물은 공연을 대신할 수도 있고, 공연이 없다는 사실을 더욱 선명하게 만들 수도 있다.
공연에 사용된 물건을 전시장에 놓으면 물건은 두 개의 시간을 갖는다. 공연 중에는 몸과 움직임의 일부였고, 공연이 끝난 뒤에는 움직임을 기억하게 하는 흔적이 된다. 관객은 사물 자체를 보면서 동시에 사물이 함께했던 몸을 상상한다.
흔적은 원래의 사건을 온전히 복원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건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바닥에 남은 자국과 비어 있는 구조물, 반복되는 영상은 공연자의 부재를 채우지 못한다. 관객은 없는 몸을 상상하며 작품을 완성해야 한다.
철학자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가 말한 흔적은 이미 사라진 것의 단순한 잔여가 아니다. 현재 보이는 것 안에 부재한 것이 계속 작용하는 구조다. 흔적을 본다는 것은 존재하는 사물과 사라진 사건을 동시에 경험하는 일이다.
‘House of Swans’의 전시가 공연 이후에도 독립적인 힘을 유지하려면 라이브 발레를 그대로 재현하려 할 필요는 없다. 공연의 결핍을 숨기기보다 사라진 몸이 어떤 빈자리를 남겼는지 드러낼 수 있다. 공연을 보지 못한 관객도 부재를 통해 다른 작품을 경험한다.
라이브 공연이 원본이고 전시가 복사본이라는 위계를 벗어나면 두 관람은 각기 다른 완결성을 얻는다. 공연 관객은 살아 있는 신체와 같은 시간을 보내지만 전체를 볼 수 없다. 전시 관객은 몸의 현존을 잃는 대신 사물과 기록을 천천히 살피고, 지나간 움직임을 자신의 시간 안에서 다시 구성한다.
공연은 강한 감각을 주지만 빠르게 지나간다. 전시는 신체의 긴장을 직접 전달하지 못하지만 오래 머물며 관계를 읽을 시간을 준다. 어느 경험도 다른 경험을 완전히 대신하지 못한다. 두 형식의 차이를 인정할 때 ‘House of Swans’는 결핍된 하나의 작품이 아니라 서로 다른 시간에 발생하는 복수의 작품이 된다.
기록은 기억을 보존하면서 기억을 지배한다
사진과 영상은 공연을 더 많은 관객에게 전달한다. 동시에 공연에서 무엇을 남길지 결정한다. 카메라가 선택한 구도와 편집은 현장에 존재했던 수많은 움직임 가운데 일부만 보존한다.
라이브 관객은 자신이 바라볼 방향을 선택할 수 있다. 기록 영상을 보는 관객은 촬영자와 편집자가 선택한 시선을 따라간다. 영상은 공연을 다시 보여주지만 관객의 이동과 선택을 줄인다. 현장에서는 주변부에 있던 움직임이 편집을 통해 중심이 되고, 중요한 행위가 기록에서 사라질 수도 있다.
기록은 중립적인 저장이 아니다. 어떤 몸을 가까이 보여주고 누구의 얼굴을 오래 남길지 결정하는 또 하나의 안무다. 공연이 무용수의 움직임을 구성한다면 영상은 관객의 시선을 구성한다.
임호프의 작업에서 이미지가 중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공연은 사라지지만 사진과 영상은 작가의 세계를 지속시키고 반복해서 유통한다. 기록된 이미지는 새로운 관객을 만들면서 원래 공연의 기억도 특정한 방향으로 정리한다.
현장에 있던 관객의 기억은 불완전하고 서로 충돌한다. 영상은 더 정확한 증거처럼 보이지만 카메라 밖에서 벌어진 일까지 담지는 못한다. 개인의 기억과 공식 기록 사이에서 공연의 역사는 다시 편집된다.
기록을 통해 접근성이 넓어질수록 기록을 선택하고 소유한 주체의 권한도 커진다. 공연을 직접 보지 못한 관객은 기관과 작가가 허용한 이미지로 작품을 이해한다. 목격의 특권은 줄어들지만 시선을 통제하는 권력은 카메라와 편집으로 이동한다.
관객의 몸도 작품 안에서 불평등하다
공연장은 모든 관객에게 같은 작품을 제시하는 듯하지만 경험은 몸의 조건에 따라 달라진다. 시야와 청각, 이동 속도, 오래 서 있을 수 있는 능력, 밀집된 공간을 견딜 수 있는 정도가 관람을 바꾼다.
몰입형 공연은 관객의 적극적인 이동을 자유로 제시해왔다. 관객이 원하는 곳을 찾아다니며 자신만의 이야기를 구성한다는 약속이다. 그러나 이동을 전제로 한 자유는 이동할 수 있는 몸을 표준으로 삼는다. 움직이기 어려운 관객에게 열린 공간은 오히려 접근하기 힘든 공간이 될 수 있다.
오래 서 있어야 하는 공연과 빠르게 위치를 바꿔야 하는 구성은 특정한 신체 능력을 요구한다. 높은 밀도와 강한 음향, 섬광과 어둠도 관객마다 다르게 작용한다. 예술이 관객의 몸을 작품에 포함할수록 몸의 차이를 고려할 책임도 커진다.
관객 참여를 강조하는 작품이 모든 관객을 동등한 공동 창작자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는 공연자의 가까운 거리에서 작품에 개입하고, 누군가는 안전한 가장자리에 머문다. 선택처럼 보이는 위치에는 신체 조건과 문화적 익숙함, 공간을 차지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함께 작용한다.
‘House of Swans’가 신체의 존재와 제한, 권위를 탐구한다면 관객의 몸도 분석에서 빠질 수 없다. 무용수의 신체에 가해지는 규율만 비판하면서 관객에게 하나의 이상적인 관람 방식을 요구한다면 작품이 다루는 제한은 다른 형태로 반복된다.
같은 작품을 보지 못한다는 사실에서 시작되는 공동체
공동체는 모두가 같은 것을 보고 같은 감정을 느낄 때만 만들어지지 않는다. 서로 다른 위치에서 본 것을 나누고, 자신이 보지 못한 부분을 다른 사람의 경험을 통해 받아들일 때도 형성된다.
‘House of Swans’의 관객은 각기 다른 작품을 경험한다. 라이브 발레를 본 사람과 사물이 남은 전시를 본 사람, 공연자 가까이에 있던 사람과 멀리서 전체를 바라본 사람의 기억은 같을 수 없다. 같은 시간에 전시장에 있었던 관객도 서로 다른 방향을 바라본다.
차이는 작품의 실패가 아니다. 하나의 완전한 시야가 존재한다는 믿음을 흔드는 조건이다. 누구도 전체를 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면 다른 사람의 경험이 필요해진다. 관객은 자신이 목격한 부분을 말하고, 다른 관객의 기억을 들으며 보지 못한 작품을 구성한다.
임호프의 백조들이 캐풀렛과 몬터규 밖에서 세 번째 집을 만든다는 서사도 관람의 구조와 만난다. 새로운 공동체는 하나의 중심과 시선을 공유하는 집단이 아니다. 서로 다른 위치와 기억을 유지하면서 함께 머물 수 있는 관계에 가깝다.
‘House of Swans’가 남기는 관객의 자유는 가장 좋은 위치를 차지해 작품 전체를 확보하는 능력에 있지 않다. 자신의 시야가 부분적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타인의 시선이 자신이 보지 못한 세계를 품고 있음을 인정하는 데 있다.
공연은 사라지고 사물은 남는다. 기억은 흐려지고 기록은 선택된 이미지를 반복한다. 어느 한쪽도 작품 전체를 소유하지 못한다. 작품은 무용수의 몸과 전시된 사물, 현장에 있었던 사람과 뒤늦게 도착한 사람 사이에 나뉘어 존재한다.
같은 작품을 보지 못한 관객들이 서로의 경험을 통해 하나의 세계를 구성할 때 ‘House of Swans’의 세 번째 집도 완성된다. 관객은 더 이상 완성된 작품을 받아가는 소비자가 아니다. 각자 불완전하게 목격한 것을 나누며 작품이 머물 공동체를 만드는 사람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