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우리 시대의 공연, 몸과 권력과 관객 사이

안네 임호프 ‘House of Swans’가 불러낸 규율의 신체와 공동 창작의 저자성, 완전한 목격이 불가능한 시대의 예술

2026-08-30     임우경 기자
사진=Nadine Fraczkowski

[KtN 임우경기자]2026년 9월 홍콩 타이쿤에 백조들이 들어선다. 독일 작가 안네 임호프(Anne Imhof)의 ‘House of Swans’에 참여하는 홍콩발레단 무용수와 음악가, 아메리칸 발레 시어터 수석무용수 데번 토이셔(Devon Teuscher)다. 회화와 청동 조각, 영상과 음향 설치 사이에서 임호프의 첫 발레가 펼쳐진다.

무용수들이 들어설 공간에는 식민 통치의 역사가 남아 있다. 타이쿤은 옛 중앙경찰서와 중앙치안법원, 빅토리아 감옥을 보존·재생한 문화예술 공간이다. 체포된 사람은 경찰서를 거쳐 법정에 섰고, 유죄판결을 받은 사람은 같은 구역의 감옥에 수감됐다. 법률과 행정, 건축이 한 사람의 신체를 붙잡고 분류하며 이동을 제한했던 장소다.

임호프는 독재자들이 발레를 대표적인 소프트파워 수단으로 이용해왔다고 말했다. 권위주의 통치자가 발레를 사용했다는 이유만으로 발레 자체가 통치자의 소유물이 되는 것은 아니라며, ‘House of Swans’를 발레의 탈환에 가까운 작업으로 설명했다.

발레를 되찾겠다는 선언은 장르의 경계를 넓히는 시도보다 무겁다. 고전발레에는 궁정과 국가의 후원, 몸을 선발하고 훈련해온 제도, 특정한 신체를 아름다움의 기준으로 세워온 역사가 축적돼 있다. 발레를 탈환하려면 오래된 서사만 바꿀 것이 아니라 형식 안에 내장된 권력까지 다뤄야 한다.

자유를 표현하기 위해 통제되는 신체

무용수의 도약은 중력에서 벗어난 신체처럼 보인다. 공중에서 길게 뻗은 팔다리와 흔들림 없는 착지는 몸의 무게와 통증을 잠시 지운다. 관객에게 전달되는 가벼움은 자연스럽게 주어진 능력이 아니다. 어린 시절부터 이어진 반복 훈련과 자세 교정, 평가와 선별이 몸 안에 남긴 결과다.

발레는 신체를 자연 상태에 두지 않는다. 발의 각도와 팔의 높이, 고개의 방향과 시선이 머무는 위치까지 세밀하게 조직한다. 처음에는 교사와 거울을 통해 전달되던 기준이 반복을 거쳐 근육과 감각에 자리 잡는다. 외부의 명령은 더 이상 명령으로 느껴지지 않을 만큼 신체의 습관이 된다.

미셸 푸코(Michel Foucault)는 ‘감시와 처벌’에서 근대 권력이 신체를 파괴하기보다 훈련한다고 분석했다. 사람의 시간과 공간을 잘게 나누고, 행동을 관찰하며, 반복과 평가를 통해 명령에 정확히 반응하는 몸을 만든다. 학교와 군대, 공장과 감옥은 목적은 달라도 신체를 유용하고 순응적인 상태로 조직한다는 점에서 같은 규율의 기술을 사용했다.

발레와 감옥을 같은 체계로 묶을 수는 없다. 감옥의 규칙은 신체의 가능성을 줄이지만 발레의 규칙은 불가능해 보였던 움직임을 가능하게 한다. 반복 훈련이 없다면 도약과 회전, 균형도 성립하지 않는다. 규율은 몸을 제한하면서 몸이 도달할 수 있는 범위를 넓힌다.

자유와 규율은 발레 안에서 서로를 배제하지 않는다. 발레의 자유는 모든 규칙이 사라진 상태가 아니라 규칙을 완전히 익힌 신체가 형식의 경계를 밀어내는 순간에 나타난다. 무용수는 형식에서 벗어나기 위해 먼저 형식을 받아들여야 한다. 복종처럼 보이는 반복이 표현의 조건이 되고, 표현을 가능하게 한 규율은 다시 자유의 범위를 정한다.

정치적 차이는 규율의 존재보다 규율을 결정할 권한에서 생긴다. 타인이 정한 명령을 정확하게 재현하는 몸과 자신이 익힌 형식을 이용해 새로운 해석을 만드는 몸은 같은 동작을 수행해도 다른 위치에 놓인다. 자유는 훈련받지 않은 상태가 아니라 훈련의 목적과 사용 방향을 스스로 바꿀 수 있는 능력에 가깝다.

‘House of Swans’는 2025년 뉴욕 파크애비뉴 아모리에서 발표한 ‘DOOM: House of Hope’의 마지막 발레에서 출발했다.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변주한 ‘DOOM’에는 캐풀렛과 몬터규 두 가문 사이에 ‘희망의 집(House of Hope)’이 추가됐다. 적대하는 두 편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질서 밖에 세 번째 소속이 생겼다.

고전발레에서 백조는 자유보다 저주에 가까운 존재였다. ‘백조의 호수’의 오데트는 낮에는 백조로 살고 밤에만 인간의 모습을 되찾는다. 사랑은 구원의 가능성으로 제시되지만 오데트의 몸과 운명은 마법사의 권력, 남성의 선택과 배신에 좌우된다. 백조의 아름다움은 자기 삶을 결정할 수 없는 존재의 비극과 분리되지 않는다.

임호프의 백조들은 주어진 운명을 연기하는 대신 자신들이 속할 집을 만든다. 가문은 혈통과 출생으로 결정되지만 집은 함께 모인 사람들이 세울 수 있다. 캐풀렛과 몬터규 사이에 세 번째 집을 둔다는 설정은 선택지를 하나 늘리는 데 머물지 않는다. 두 진영 가운데 하나에 속해야 한다는 적대의 문법을 중단한다.

희망도 예정된 구원이나 낙관적인 결말이 아니다. 이미 완성된 질서 안에서 더 나은 자리를 얻는 것이 아니라, 어떤 몸들이 함께 살아갈 수 있는지 새로 정하는 능력에 가깝다. 오데트가 타인의 사랑으로 저주에서 벗어나기를 기다렸다면 임호프의 백조들은 자신들의 집을 세우며 소속의 조건을 바꾸려 한다.

작가의 서명 아래 놓인 타인의 몸

‘House of Swans’는 안네 임호프의 첫 발레로 불린다. 전시와 공연은 임호프의 이름 아래 놓이고, 회화와 조각, 영상과 음향, 안무가 구축하는 세계도 한 예술가의 창작으로 기록된다. 그러나 발레는 작가 혼자 만들 수 없다. 무용수와 음악가가 각자의 기술과 판단을 보태야 공연이 비로소 형태를 얻는다.

화가는 물감의 농도와 색을 조절한다. 조각가는 청동과 돌을 깎거나 덧붙이며 형태를 고정한다. 무용수의 몸은 작가의 의도에 따라 완전히 통제할 수 있는 재료가 아니다. 피로를 느끼고 통증에 반응하며, 자신이 축적한 기억을 바탕으로 매 순간 판단한다.

같은 안무도 무용수에 따라 달라진다. 팔을 올리는 속도와 체중을 옮기는 방향, 상대를 바라보는 시간과 호흡이 변한다. 안무가 기록된 구조라면 공연은 구조가 특정한 몸을 만나 발생하는 사건이다. 안무는 반복할 수 있지만 공연은 완전히 반복되지 않는다.

모리스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는 신체를 정신이 사용하는 수동적 도구로 보지 않았다. 인간은 몸을 통해 공간과 타인의 존재를 이해하고 세계와 관계를 맺는다. 신체는 생각이 내려보낸 명령을 수행하는 물체가 아니라 지각하고 판단하는 주체다.

발레 무용수의 지식도 언어로 모두 옮길 수 없다. 수년 동안 반복한 움직임은 근육과 관절, 균형 감각에 저장된다. 무용수는 도약 각도를 매번 계산하지 않고도 몸의 위치를 안다. 상대의 호흡과 체중 이동을 감지해 다음 동작을 조절한다. 몸이 기억하고 사고하기 때문이다.

데번 토이셔의 신체에는 고전발레와 임호프의 퍼포먼스라는 두 개의 언어가 들어 있다. 토이셔는 아메리칸 발레 시어터에서 고전발레의 문법을 익혔고, ‘DOOM’에서는 정해진 구조와 우연이 교차하는 임호프의 세계를 경험했다. ‘House of Swans’에서는 완성된 형식을 정확하게 수행하는 몸과 불확실한 상황에서 자신의 판단을 사용하는 몸 사이를 오간다.

임호프와 토이셔가 ‘DOOM’ 작업 과정에서 만나 연인이 됐다는 사실은 신작의 사랑 서사와 연결된다. 그러나 연인의 협업이라는 설명만으로 토이셔의 참여를 정리하면 발레 무용수로서 축적한 전문성과 창작 기여가 사적인 관계에 가려진다.

사랑은 타인을 자신의 일부로 만드는 일이 아니다. 친밀함이 깊어질수록 상대를 완전히 소유할 수 없다는 사실도 선명해진다. 공동 창작 역시 다른 사람의 몸을 자신의 작품 안에 편입하는 데서 완성되지 않는다. 상대가 지닌 독자적인 기술과 판단이 작품을 바꿀 수 있어야 한다.

공연예술은 한 사람의 서명으로 환원하기 어려운 예술이다. 작가가 전체 세계를 구상하고 안무가가 움직임을 설계해도, 무용수의 몸을 통과하지 않으면 작품은 관객에게 도달하지 못한다. 무용수는 작품을 읽는 사람이면서 읽은 문장을 몸으로 다시 쓰는 사람이다.

한 명의 저자를 중심에 놓는 방식은 작품의 책임과 권리를 분명하게 만든다. 동시에 여러 사람의 노동으로 제작된 작품을 한 예술가의 천재성으로 축소할 위험도 품는다. 국가로부터 발레를 되찾은 뒤 세계적인 작가 한 사람의 소유로 옮긴다면 권력의 중심만 이동한다.

탈환은 새로운 소유자를 정하는 일이 아니다. 형식을 수행하는 사람들이 움직임의 의미를 바꿀 수 있고, 각자의 기여가 작품의 역사에 남을 때 소유권 이전을 넘어설 수 있다. 참여자의 이름은 작품 뒤에 붙는 부속 정보가 아니라 작품이 누구의 노동과 판단을 거쳐 만들어졌는지 남기는 역사다.

완전하게 볼 수 없는 작품

공연이 시작되면 관객의 위치도 흔들린다. 회화와 조각은 같은 자리에 남아 관객을 기다리지만 발레는 무용수가 움직이는 동안에만 존재한다. 한 번 지나간 동작은 되돌릴 수 없다. 시선을 옮긴 사이 발생한 움직임과 다른 곳에서 동시에 벌어진 행동은 사라진다.

라이브 공연의 특별함은 완전한 경험을 제공하는 데 있지 않다. 누구도 작품 전체를 볼 수 없다는 조건에서 생긴다. 무용수와 관객은 하나의 시간을 공유하지만 서로 다른 위치에서 각기 다른 공연을 경험한다.

임호프는 ‘DOOM’에서 관객을 고정된 좌석에서 풀어놓았다. 관객은 넓은 공간을 돌아다니며 공연자를 따라가거나 멀리 물러나 전체 구성을 바라봤다. 가까이 다가간 사람은 몸의 세부를 보는 대신 다른 곳에서 벌어진 일을 놓쳤다. 멀리 선 사람은 전체의 움직임을 볼 수 있었지만 표정과 호흡을 잃었다.

하나의 시야를 선택하면 다른 시야가 닫힌다. 관객의 자유는 모든 것을 볼 권리가 아니라 자신이 감당할 결핍을 선택하는 권리에 가까워진다. 무엇을 봤는지뿐 아니라 무엇을 놓쳤는지도 작품 경험에 포함된다.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ère)는 관객을 수동적인 존재로 규정하는 관습을 비판했다. 바라보는 일도 단순한 수용이 아니다. 관객은 자신이 본 것을 과거의 경험과 연결하고, 작품이 제시한 요소를 선택하거나 거부하며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든다. 해석하는 순간 관객은 이미 활동하고 있다.

임호프의 퍼포먼스에서 관객의 활동은 정신적인 해석을 넘어 몸의 이동으로 나타난다. 어디에 설지 선택하고, 누구를 따라갈지 결정하며, 다른 사람과 공간을 나눈다. 바라보는 사람도 공연의 구도를 구성한다.

자유로운 이동이 모든 관객에게 같은 경험을 제공하지는 않는다. 키가 큰 사람과 작은 사람,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사람과 이동에 제약이 있는 사람이 확보하는 시야는 다르다. 공연자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데 익숙한 관객과 주변에 머무는 관객도 서로 다른 작품을 본다.

고정 좌석을 없앤다고 관람의 권력까지 사라지지는 않는다. 제도가 지정한 중심은 없어지지만 관객은 스스로 중심과 주변을 만든다. 좋은 위치를 선점하고 중요한 움직임을 찾아내는 능력이 새로운 위계가 될 수 있다.

자유롭게 보라는 요청도 특정한 신체를 표준으로 삼으면 또 다른 규율이 된다. 오래 서 있을 수 있고, 군중 사이를 빠르게 움직이며, 공연자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데 주저하지 않는 몸이 더 많은 시야를 얻는다. 관객을 작품 안으로 끌어들일수록 신체마다 다른 조건을 받아들여야 한다.

관객의 해방은 모든 사람이 같은 권한을 갖는다고 선언하는 데서 오지 않는다. 서로 다른 몸이 실제로 어떤 위치에 놓이는지 살피는 데서 시작된다. 참여라는 말이 곧 평등을 뜻하지 않으며, 열린 공간이 모든 사람에게 같은 방식으로 열리는 것도 아니다.

사라지는 몸과 남겨진 이미지

라이브 공연을 본 관객은 무용수의 호흡과 발이 바닥에 닿는 소리, 신체 사이의 거리와 긴장을 경험한다. 공연이 끝난 뒤 전시장에 들어온 관객은 영상과 음향, 회화와 조각, 움직임이 지나간 자리를 마주한다. 한쪽은 사건을 목격하고 다른 한쪽은 사건의 흔적을 읽는다.

직접 봤다는 사실에는 목격자의 권위가 붙는다. 무용수와 같은 시간과 공간에 있었다는 경험은 영상으로 완전히 대체하기 어렵다. 공연이 끝나면 같은 순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조건도 목격의 가치를 높인다.

라이브 공연을 작품의 완성된 형태로만 여기면 공연을 보지 못한 관객은 불완전한 작품을 접한 사람이 된다. 전시장은 이미 끝난 사건의 주변부가 되고, 남겨진 사물은 현장을 대신하지 못하는 잔여물로 낮아진다.

흔적은 원래 사건보다 열등한 복사본이 아니다. 공연자의 몸이 사라진 자리를 드러내고, 관객이 부재한 움직임을 상상하도록 만든다. 공연을 보지 못한 관객은 현존하는 몸을 잃는 대신 남아 있는 사물과 기록을 자신의 시간 안에서 다시 구성한다.

공연 관객은 살아 있는 신체와 같은 시간을 보내지만 작품 전체를 보지 못한다. 전시 관객은 신체의 현존을 잃지만 사라진 움직임과 남은 사물의 관계를 오래 들여다볼 수 있다. 어느 경험도 다른 경험을 완전히 대신하지 못한다.

사진과 영상 역시 공연을 중립적으로 보존하지 않는다. 카메라는 어떤 몸을 가까이 보여주고 누구의 얼굴을 오래 남길지 선택한다. 편집은 현장에 존재했던 수많은 움직임 가운데 일부를 작품의 공식적인 기억으로 만든다.

라이브 관객은 바라볼 방향을 선택할 수 있지만 기록 영상을 보는 관객은 촬영자와 편집자가 선택한 시선을 따라간다. 현장에서 주변부에 있던 움직임이 영상에서는 중심이 되고, 중요한 행동이 기록 밖으로 사라질 수도 있다. 안무가 무용수의 움직임을 구성한다면 기록은 이후 관객의 시선을 구성한다.

기록되는 순간 무용수의 몸도 다른 시간에 들어간다. 한 번의 실연은 반복해서 상영할 수 있는 이미지가 된다. 살아 있는 신체는 나이를 먹고 변화하지만 영상 속 움직임은 같은 모습으로 남는다. 공연자의 몸에서 떨어져 나온 이미지는 미술관과 시장이 다루는 지속 가능한 작품이 된다.

발터 베냐민(Walter Benjamin)이 기술 복제 시대의 예술에서 살핀 변화도 이 지점과 맞닿는다. 복제는 예술을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서 풀어내 더 많은 사람에게 전달한다. 접근 범위는 넓어지지만 원본과 마주했다는 유일한 경험의 권위는 약해진다.

라이브 공연은 복제 시대에도 강한 유일성을 유지한다. 바로 그 유일성이 목격자의 특권을 만들고, 기록은 특권을 넓히는 동시에 다른 시선으로 통제한다. 현장성과 접근성 가운데 하나만 선택할 수 없는 이유다. 공연은 사라짐으로써 유일해지고, 기록됨으로써 살아남지만 기록되는 순간 다른 작품이 된다.

권력이 없는 무대보다 권력이 이동하는 무대

우리 시대의 공연은 무대 위에서 완성되지 않는다. 누가 몸을 훈련하고 움직임을 결정하는지, 누구의 이름으로 작품이 남는지가 공연의 일부가 된다. 관객이 어디에 서고 무엇을 놓쳤는지, 기록이 어떤 몸을 선택했는지도 작품의 의미를 바꾼다.

공연은 사람의 몸을 가장 가까이에서 다루는 예술이다. 바로 그 때문에 권력의 구조도 숨기기 어렵다. 지시하는 사람과 수행하는 사람, 바라보는 사람과 보이는 사람, 기록하는 사람과 기록되는 사람의 위치가 한 공간에서 드러난다.

권력이 전혀 없는 공연은 존재하기 어렵다. 누군가는 시간을 정하고 공간을 설계하며, 움직임의 순서를 결정한다. 관객에게 자유로운 이동을 허용하는 선택조차 작가와 기관이 만든 규칙 안에서 이뤄진다. 권력을 없앴다는 선언은 권력이 다른 자리로 이동한 사실을 가릴 수 있다.

좋은 공연은 권력이 없는 공간을 가장하지 않는다. 작품 안에 존재하는 권력을 드러내고 이동할 수 있게 한다. 작가의 권한이 공연자의 해석과 만나고, 무용수의 움직임이 관객의 기억으로 이어지며, 한 관객이 보지 못한 부분을 다른 관객의 경험이 채우도록 한다.

임호프의 ‘House of Swans’가 발레를 소프트파워에서 되찾는 방법도 같은 방향에 있다. 고전발레를 폐기하거나 정치적 메시지를 덧붙이는 것만으로 탈환은 완성되지 않는다. 무용수가 작가의 재료에 머물지 않고, 관객이 정해진 의미를 받아가는 소비자에서 벗어나며, 기록되지 않은 몸과 시선까지 작품의 역사에 남아야 한다.

캐풀렛과 몬터규 밖에서 세워지는 백조들의 집은 완벽하게 통일된 공동체가 아니다. 모두가 같은 움직임과 생각을 공유하는 집단도 아니다. 각자의 몸과 위치, 서로 다른 기억을 지닌 채 함께 머물 수 있는 관계에 가깝다.

자유는 규율이 사라진 빈자리가 아니다. 자신을 움직이는 규칙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규칙을 바꾸는 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상태다. 공동 창작도 한 사람의 권위를 지우는 데 머물지 않는다. 서로 다른 기여를 없애지 않은 채 하나의 작품을 만드는 일이다. 관객의 해방도 모든 것을 볼 수 있다는 약속이 아니라 자신의 시야가 부분적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서 시작한다.

공연이 끝나면 무용수의 몸은 사라지고 사물과 이미지가 남는다. 관객의 기억도 시간이 지나며 달라진다. 작품은 작가와 기관, 공연자와 기록 가운데 어느 한곳에도 완전한 형태로 보존되지 않는다. 여러 몸과 시선, 기억과 흔적 사이에 나뉘어 존재한다.

우리 시대의 공연은 완성된 세계를 보여주는 예술이 아니다. 여러 사람이 같은 시간과 공간에 들어와 서로 다른 위치를 견디고, 누구도 작품 전체를 소유할 수 없다는 사실을 경험하는 예술이다. 자유로운 몸은 혼자 날아오르는 몸이 아니라 다른 몸의 자리를 없애지 않고 함께 움직일 수 있는 몸이다.

타이쿤에 들어설 백조들이 세우려는 집도 하나의 완전한 질서가 아니다. 몸을 통제해온 역사를 기억하면서 어느 한 사람의 이름과 시선, 권력이 움직임의 의미를 독점하지 못하도록 자리를 나누는 공동체다. 발레의 탈환은 백조가 더 높이 날아오르는 데서 완성되지 않는다. 도약한 몸들이 서로의 자리를 침범하지 않고 함께 내려설 수 있을 때 비로소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