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베니 88년①] 1931년 증류·2019년 병입, 7년 뒤 공개된 17병
판매용 싱글몰트 최장 숙성 기록…캐스크 교체로 원액 소실 막고 알코올 도수 43.2%에서 병입
[KtN 신명준기자]1931년 3월 5일 스코틀랜드 스페이사이드의 발베니(The Balvenie) 증류소에서 오크통에 들어간 원액이 2019년 88년의 숙성을 마쳤다. 남은 원액은 17병에 담겼고 7년간 보관됐다. 발베니는 2026년 9월 1일 서울에서 ‘1931 컬렉션 88년’을 처음 공개했다.
발베니 88년은 판매용으로 출시된 싱글몰트 스카치위스키 가운데 숙성 기간이 가장 길다. 2025년 고든앤맥페일(Gordon & MacPhail)이 내놓은 글렌리벳 85년 기록을 3년 넘어섰다.
1931년은 증류 연도, 2019년은 병입 연도, 2026년은 공개 연도다. 위스키의 숙성 기간은 오크통에서 보낸 시간만 계산한다. 병에 담긴 뒤에는 숙성 기간이 늘어나지 않는다. 2019년 병입과 함께 발베니의 연산도 88년에서 멈췄다. 2026년 공개됐지만 95년산이 아닌 88년산으로 표기되는 배경이다.
스카치위스키는 스코틀랜드에서 700리터 이하의 오크통에 담아 최소 3년간 숙성해야 한다. 제품에 연산을 표시할 때는 들어간 원액 가운데 숙성 기간이 가장 짧은 위스키를 기준으로 삼는다. 증류 연도를 표시하면 병입 연도나 실제 숙성 기간도 함께 제시해야 한다. 증류 이후 병입까지의 기간과 병입 이후 보관 기간을 구분하기 위한 규정이다.
발베니 88년은 여러 원액을 섞어 연산을 맞춘 제품이 아니다. 1931년 채운 단 하나의 캐스크에서 나온 싱글몰트다. 캐스크 239는 스페인 헤레스에서 들여온 유럽산 오크 리필 셰리 버트였다.
원액이 88년 동안 같은 캐스크에 머문 것은 아니다. 처음 사용한 셰리 버트에서 약 80년간 숙성한 뒤 더 작은 캐스크로 옮겼다. 장기간 사용한 캐스크의 손상과 원액 증발을 줄이기 위한 조치였다.
위스키는 오크통 안에서 나무와 공기의 영향을 받으며 향과 색을 얻는다. 숙성이 이어지는 동안 물과 알코올의 일부는 캐스크 틈으로 증발한다. 증류업계에서는 증발해 사라지는 원액을 ‘에인절스 셰어(angel’s share)’라고 부른다.
스코틀랜드에서는 해마다 캐스크 원액의 약 2%가 줄어드는 수치가 흔히 쓰인다. 실제 증발량은 창고의 온도와 습도, 캐스크 크기와 상태, 숙성 기간에 따라 달라진다. 88년 동안 같은 비율로 원액이 줄었다고 단순 계산할 수는 없다.
숙성 기간이 길어질수록 원액의 희소성은 높아지지만 병입까지 버틸 가능성은 낮아진다. 캐스크를 구성하는 나무판은 시간이 흐르면서 약해지고, 증발로 원액의 양과 알코올 도수도 낮아진다.
스카치위스키는 병입 제품의 알코올 도수가 최소 40%를 유지해야 한다. 발베니 88년은 물을 섞어 도수를 낮추지 않은 캐스크 스트렝스(cask strength) 43.2%로 병입됐다. 법정 하한선과의 차이는 3.2%포인트였다.
몰트 마스터 켈시 맥케크니(Kelsey McKechnie)는 원액을 처음 사용한 셰리 버트에 그대로 뒀다면 전부 잃었을 것이라고 밝혔다. 작은 캐스크로 옮긴 뒤에도 원액 증발과 캐스크 노화는 계속됐다. 90년이나 100년 기록을 위해 숙성을 연장하면 병입할 원액이 남지 않을 가능성도 커졌다.
맥케크니는 2019년 원액의 향과 맛이 완성됐다고 판단하고 병입을 지시했다. 캐스크에 남아 있던 원액을 모두 옮긴 결과는 17병이었다. 별도로 보관한 원액은 없었다.
1931년 원액을 캐스크에 채운 작업자와 2019년 병입을 결정한 몰트 마스터 사이에는 여러 세대의 몰트맨과 쿠퍼, 창고 관리자가 있었다. 한 사람이 처음부터 끝까지 관리할 수 없는 숙성 기간이었다.
2019년의 병입은 품질과 기록 사이에서 내려진 결정이었다. 오크통에 더 오래 두면 숫자는 89년, 90년으로 늘어날 수 있었지만 원액과 알코올 도수는 계속 줄어든다. 캐스크 손상으로 원액 전체를 잃을 가능성도 있었다. 맥케크니는 오래됐다는 사실만으로 품질이 높아지는 것은 아니라고 밝혔다.
병입된 17병은 곧바로 출시되지 않았다. 발베니는 서늘하고 어두운 공간에 병을 보관하고 열쇠도 별도로 관리했다. 제품을 공개할지, 창업가문이 보관할지 결정하지 않은 채 7년이 흘렀다.
유리병 안에서는 오크통 숙성과 같은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직사광선을 피하고 밀봉 상태를 유지하면 장기 보관도 가능하다. 2019년부터 2026년까지 흐른 7년은 숙성 기간이 아니라 완성된 원액의 보관 기간에 해당한다.
발베니 88년이 세운 기록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위스키 병과도 구분된다. 발베니 88년은 판매용으로 출시된 싱글몰트 스카치위스키 가운데 오크통 숙성 기간이 가장 긴 제품이다.
기네스월드레코드가 2026년 확인한 가장 오래된 현존 위스키는 베트남 수집가가 소유한 1842년산 올드 배티드 글렌리벳 스카치위스키다. 해당 기록은 병에 담긴 술의 생산 연도를 기준으로 한다. 발베니의 기록은 캐스크에서 숙성된 기간과 판매용 출시 여부를 기준으로 삼는다.
발베니 이전에는 고든앤맥페일의 글렌리벳 85년이 최장 숙성 기록을 갖고 있었다. 1940년 캐스크에 들어간 원액을 2025년 출시한 제품이다. 맥캘란도 2024년 84년 숙성 제품 ‘Time:Space’를 내놓았다. 발베니가 캐스크 239에서 나온 88년 숙성 원액을 공개하면서 기록은 다시 3년 늘어났다.
초고연산 싱글몰트는 단순히 캐스크를 오래 보관한다고 완성되지 않는다. 수십 년 동안 캐스크가 무너지지 않아야 하고 법정 기준 이상의 알코올 도수와 병입할 원액도 남아 있어야 한다. 몰트 마스터가 향과 맛이 더 이상 숙성을 연장하지 않아도 될 수준에 도달했다고 판단해야 병입으로 이어진다.
발베니가 소개한 88년 원액의 향에는 버터 퍼지와 민트 잎, 가죽, 헤더 꽃이 포함됐다. 맛은 토피와 향신료, 꿀로 설명됐다. 17병만 제작된 데다 공개 판매도 진행되지 않아 일반 소비자가 직접 맛을 접할 수 있는 범위는 제한적이다.
발베니는 88년 제품의 가격을 밝히지 않았다. 17병은 일부 개인 고객과 수집가에게 배정된다. 원액을 담은 수제 크리스털 디캔터에는 18캐럿 금 각인이 들어갔다. 외부 조각은 현대미술가 다니엘 아샴(Daniel Arsham)이 설계했다.
‘1931 컬렉션’에는 88년 제품과 함께 12년·15년 싱글몰트가 포함됐다. 12년 제품은 일부 국가에서 판매되며 15년 제품은 글로벌 면세점 전용으로 유통된다.
발베니 88년의 숙성은 2019년 캐스크에서 병으로 옮긴 날 끝났다. 1931년부터 이어진 원액은 17병에 나뉘어 담겼고 2026년 9월 서울에서 공개됐다. 판매 가격과 국가별 배정 수량은 공개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