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베니 88년②] 다니엘 아샴 조각에 담긴 17병, 술에서 수집품으로
수제 크리스털·18캐럿 금·청동 파티나·88겹 오크로 구성…가격 비공개하고 개인 고객에게 배정
[KtN 신명준기자]88년 숙성한 발베니(The Balvenie) 싱글몰트가 현대미술가 다니엘 아샴(Daniel Arsham)의 조각 안에 들어갔다. 1931년 증류해 2019년 병입한 원액은 17병뿐이다. 발베니는 일반적인 위스키 상자 대신 수제 크리스털과 금, 청동, 오크로 구성한 외장 조각을 제작했다. 초고연산 원액에 미술가의 이름과 조형물을 더하면서 한 병의 술은 마시는 상품과 보관하는 수집품의 성격을 함께 갖게 됐다.
발베니는 2026년 9월 1일 서울 성동구 S50에서 ‘1931 컬렉션 88년’을 세계 최초로 공개했다. 발베니 몰트 마스터 켈시 맥케크니(Kelsey McKechnie)가 2019년 병입한 원액과 아샴이 설계한 조각을 결합한 협업에는 ‘The Dawn of Our Spirit’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원액을 담은 디캔터는 손으로 불어 만든 크리스털이다. 표면에는 18캐럿 금으로 글자와 숫자를 새겼다. 디캔터 형태는 스코틀랜드 스페이사이드에 있는 발베니 증류소의 구리 증류기에서 가져왔다. 둥근 몸체와 좁아지는 목 부분은 증류 과정에서 원액의 특성을 만드는 포트 스틸의 형태와 연결된다.
디캔터를 감싸는 외장은 청동과 오크로 구성됐다. 앞면에는 손으로 입힌 여덟 겹의 파티나가 사용됐다. 구리 표면이 산화하며 생기는 녹청과 얼룩, 증류소에서 오랜 시간 사용한 금속의 색을 옮긴 마감이다.
뒷면에는 88겹의 오크가 쌓였다. 원액이 오크통에서 보낸 88년을 나무 층의 수로 나타냈다. 사용이 끝난 발베니 증류기의 구리 일부도 조각에 들어갔다. 증류와 숙성에 사용된 구리와 오크가 병을 보호하는 외장으로 다시 배치됐다.
아샴은 손상되거나 침식된 사물을 통해 시간의 흔적을 표현해 왔다. 대표 작업인 ‘Bronze Eroded’ 연작은 익숙한 물건과 조각을 먼 미래에 발굴된 유물처럼 바꾼다. 표면 일부가 무너지고 결정이 자라난 듯한 형태를 만들어 현재의 물건에 오래된 유물의 시간을 입힌다.
발베니 협업에서는 표면이 침식된 조각 대신 파티나가 생긴 청동과 여러 겹의 오크가 시간을 나타냈다. 오크통에서 원액이 줄어들고 캐스크가 낡아가는 물리적 변화가 아샴의 작업 방식과 연결됐다. 디캔터와 조각은 새로 제작됐지만 88년 동안 증류소에서 진행된 산화와 증발, 나무의 변화를 형태와 재료에 담았다.
아샴은 고대와 동시대의 감각을 함께 지닌 물건을 만들고 시간의 흐름을 손으로 느낄 수 있도록 구성했다고 설명했다. 원액의 숙성 기간을 숫자와 라벨에만 표시하지 않고 청동 표면과 88겹의 나무로 바꾼 셈이다.
17병이라는 수량도 조각의 희소성과 겹친다. 발베니는 1931년 3월 5일 채운 캐스크 239의 원액을 2019년 병입했다. 장기 숙성으로 원액 대부분이 증발하면서 캐스크에 남은 양은 17병에 그쳤다. 추가 병입을 위한 같은 원액은 없다.
위스키 수집시장에서는 증류소와 연산, 캐스크 번호, 병입 수량, 보존 상태가 가격에 영향을 준다. 미개봉 여부와 라벨·밀봉 상태, 원래 상자의 보존 여부도 거래 조건으로 다뤄진다. 발베니 88년에는 아샴이 설계한 조각과 수제 크리스털 디캔터가 더해졌다. 원액의 상태뿐 아니라 청동과 오크, 크리스털의 보존 상태까지 제품 가치에 포함되는 구성이다.
술을 마신 뒤에도 디캔터와 외장 조각은 남는다. 일반 위스키는 개봉과 함께 수집 가치가 크게 낮아지지만 발베니 88년은 원액을 비운 뒤에도 아샴이 설계한 물체를 보관할 수 있다. 다만 조각을 디캔터와 분리해 거래할 수 있는지, 작품 번호와 병 번호가 각각 부여되는지, 작가 또는 제작사의 별도 인증서가 제공되는지는 공개되지 않았다.
발베니는 88년 제품의 판매 가격도 밝히지 않았다. 일반 매장이나 온라인 판매망에 공급하지 않고 일부 개인 고객과 수집가에게 배정한다. 구매자가 같은 제품끼리 가격을 비교하기 어려운 판매 방식이다.
해외 보도에서는 병당 20만∼25만파운드가 거론됐지만 발베니가 발표한 공식 가격은 아니다. 가격 공개 없이 개인 거래로 배정되는 만큼 실제 판매가와 국가별 수량도 외부에 드러나지 않는다.
초고연산 위스키에 건축가나 미술가의 디자인을 결합하는 방식은 발베니에서 처음 등장하지 않았다. 발베니에 앞서 판매용 싱글몰트 최장 숙성 기록을 보유했던 고든앤맥페일(Gordon & MacPhail)은 글렌리벳 85년 제품의 디캔터를 미국 건축가 진 갱(Jeanne Gang)에게 맡겼다.
글렌리벳 85년은 125병이 제작됐고 병당 권장가격은 12만5000파운드였다. 청동으로 만든 나뭇가지 형태의 구조물이 유리 디캔터를 감싸도록 설계됐다. 오크통이 85년 동안 원액을 품은 형태를 청동 구조물로 옮긴 디자인이었다.
1번 디캔터는 2025년 11월 크리스티 뉴욕 온라인 경매에서 20만달러에 팔렸다. 경매 물품에는 위스키 한 병과 캐스크 336의 나무판, 진 갱의 원본 스케치, 별도의 체험 프로그램이 함께 포함됐다. 판매 수익금은 비용을 제외하고 산림보호단체 아메리칸 포리스트에 전달됐다.
글렌리벳 85년의 권장가격과 경매 결과는 초고연산 위스키가 원액만으로 거래되지 않는 흐름을 보여준다. 건축가가 설계한 디캔터와 캐스크 조각, 원본 스케치, 체험 프로그램을 하나로 묶어 경매에 올리면서 위스키 한 병의 가격을 여러 구성품이 함께 만들었다.
발베니 88년은 수량이 17병으로 더 적고 숙성 기간도 3년 길다. 외장 조각에는 아샴의 작업 방식이 반영됐다. 다만 발베니가 가격과 판매 조건을 공개하지 않아 글렌리벳 85년과 직접 비교할 기준은 마련되지 않았다.
미술품과 위스키는 소유 이후의 관리 방식도 다르다. 위스키는 세워서 보관하고 직사광선과 급격한 온도 변화를 피해야 한다. 병을 눕히면 알코올이 코르크에 지속적으로 닿아 밀봉 상태에 영향을 줄 수 있다. 아샴의 조각은 청동의 파티나와 88겹 오크, 크리스털의 상태를 함께 관리해야 한다.
이동 과정에서도 주류와 조각의 조건이 겹친다. 병 파손과 누액, 마개 손상뿐 아니라 청동 표면과 오크 구조의 훼손도 거래 가격에 영향을 줄 수 있다. 국가 간 이동에는 고가 미술품의 전문 운송과 함께 주류 반입·통관 절차가 적용된다.
발베니는 88년 원액을 담은 조각을 프리즈 서울 기간에 맞춰 공개했다. 아샴이 연출한 몰입형 퍼포먼스도 9월 1일 열렸다. 위스키 신제품 발표를 증류소나 주류 박람회가 아닌 서울의 국제 미술행사 기간에 배치하면서 수집 대상으로서의 성격을 앞세웠다.
17개의 디캔터에는 같은 캐스크에서 나온 원액이 담겼다. 병마다 아샴이 설계한 청동·오크 조각이 함께 제공되며 공개 판매는 진행되지 않는다. 발베니는 개인 고객과 수집가를 대상으로 배정을 진행하고 있지만 가격과 국가별 수량, 거래 일정은 공개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