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esel FW26②] 모델은 사라지고 이미지가 남았다, ‘Multiplicities’의 물리적 합성
실제 해변과 거리 한가운데 놓인 평면 인물…AI가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지우는 시대에 오히려 붉은 외곽선과 카드보드의 물성을 드러낸 패션 이미지
[KtN 임민정기자]디젤(Diesel)의 2026 가을·겨울(FW26) 캠페인 ‘Multiplicities’에는 실제 장소와 실제 사람이 등장하지만, 정작 패션을 입은 모델은 현장에 없다. 스튜디오에서 먼저 촬영한 모델을 실물 크기의 카드보드 컷아웃으로 제작한 뒤 런던과 상하이, 카이로, 리우데자네이루, 뉴델리의 거리와 해변에 세웠다. 현지 사진가가 다시 셔터를 누르면서 한 장의 사진 안에 실제 공간과 이미 만들어진 인물이 동시에 들어왔다.
합성된 흔적을 감추지 않은 점이 이번 캠페인의 시각적 특징이다. 모델의 외곽에는 붉은 선이 남고, 인물은 주변 사람과 달리 평면적인 형태를 유지한다. 현실의 공간과 완벽하게 섞이도록 처리하기보다 어디까지가 실제이고 어디부터가 만들어진 이미지인지 구분할 수 있도록 했다.
디지털 기술이 인물과 배경을 자연스럽게 결합하고 생성형 AI가 실제 촬영처럼 보이는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환경에서 이런 방식은 역설적인 인상을 남긴다. 기술적으로 더 매끄러운 합성이 가능한 시기에 디젤은 종이에 출력한 사람을 실제 장소로 옮겼다.
다만 ‘Multiplicities’가 생성형 AI에 대한 반작용으로 기획됐다고 단정할 근거는 공개된 설명에 없다. FW26 캠페인이 보여주는 것은 AI에 대한 선언보다 실제 공간과 평면 이미지의 경계를 의도적으로 남겨 놓은 제작 방식이다.
해변에 놓인 인물은 주변 사람들과 처음부터 다른 존재로 읽힌다. 실제 사람의 몸에는 햇빛과 그림자가 따라붙고 자세도 순간마다 달라지지만, 붉은 테두리 안의 모델은 스튜디오에서 촬영됐던 자세를 그대로 유지한다. 바다는 뒤로 이어지고 사람들은 움직이지만 패션 인물만 한 순간에 멈춰 있다.
이 차이는 일반적인 패션 합성과 방향이 다르다. 디지털 합성은 서로 다른 시간과 공간에서 촬영한 이미지를 하나의 현실처럼 연결하는 경우가 많다. 경계를 얼마나 자연스럽게 지우느냐가 완성도를 결정하기도 한다. ‘Multiplicities’는 반대로 경계를 시각 요소로 사용한다.
인물 주변을 두른 붉은 선은 모델을 현실 속 사람으로 착각하게 만들지 않는다. 카드보드의 평면성 역시 숨겨지지 않는다. 관람자는 처음부터 ‘이 사람이 실제로 이곳에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면서 사진을 보게 된다.
패션 광고가 오랫동안 만들어 온 환상도 여기서 변한다. 모델이 파리의 거리나 열대의 해변에 서 있는 광고는 실제 촬영 여부와 관계없이 모델과 공간을 하나의 세계로 받아들이게 만드는 방향으로 제작돼 왔다. 디젤은 FW26에서 모델과 공간 사이에 이음새를 남겼다.
실제 해변을 소비하면서 동시에 가공된 패션 이미지를 본다는 두 가지 경험이 하나의 사진 안에서 겹친다.
모델이 현장에 없다는 사실은 옷을 바라보는 방식에도 영향을 준다. 바람이 불어도 옷자락은 움직이지 않고, 사람이 지나가도 모델의 시선은 바뀌지 않는다. 현지의 날씨와 온도, 촬영 순간의 움직임이 모델이 입은 FW26 제품에는 직접 작용하지 않는다.
옷은 사람이 입고 움직이는 물건이면서 동시에 이미 촬영을 마친 그래픽 이미지가 된다.
여러 컷아웃이 해변에 흩어진 이미지에서는 이런 성격이 더 강해진다. 한 명의 모델이 실제 공간을 차지하는 대신 서로 다른 포즈의 인물들이 해변 곳곳에 배치됐다. 서 있는 사람, 몸을 낮춘 사람, 앉아 있는 사람이 동시에 존재하지만 각자의 움직임에는 연결이 없다.
실제 모델 여러 명을 같은 공간에서 촬영하면 서로의 시선과 자세가 영향을 주고받는다. 누군가 자리를 옮기면 다른 모델의 위치도 달라질 수 있다. 카드보드는 그런 상호작용을 갖지 않는다. 각각의 인물은 스튜디오에서 이미 완성된 상태로 현장에 도착한다.
여러 개의 컷아웃을 한 장소에 모으면서 사람의 집단보다 패션 이미지의 집합에 가까운 구성이 만들어진다.
붉은 외곽선도 이런 성격을 강화한다. 인물 하나하나가 배경에서 분리돼 독립적인 오브젝트처럼 남는다. 실제 공간에 속한 사람이면서 동시에 광고를 위해 삽입된 그래픽 요소라는 두 상태가 겹친다.
캠페인 제목 ‘Multiplicities’도 이 구조와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하나의 현실 안에 서로 다른 방식으로 만들어진 여러 인물이 들어오고, 최초의 스튜디오 사진은 카드보드가 된 뒤 다시 사진 속 이미지로 바뀐다.
모델을 촬영한 최초의 사진이 첫 번째 이미지라면 실물 크기로 출력된 컷아웃은 두 번째 형태다. 현지 사진가가 실제 공간에서 다시 촬영한 최종 컷은 세 번째 이미지가 된다. 한 인물이 촬영과 출력, 재촬영을 거치면서 매체를 반복해서 바꾸는 셈이다.
‘Multiplicities’는 세계 여러 도시의 다양성뿐 아니라 하나의 패션 이미지가 여러 형태로 증식하는 제작 과정까지 포함해 읽을 수 있다.
이런 반복은 FW26 제품에도 흥미로운 배경을 만든다. 디젤이 시즌 주요 품목으로 내세운 3-D Denim과 트롱프뢰유(trompe l’oeil) 케이블 니트 데님은 실제 소재와 시각적 착시 사이를 오가는 옷이다. 이름 그대로 입체감이나 눈속임을 디자인의 일부로 사용한다.
입체를 강조하는 옷이 평면의 카드보드 위에 놓이고, 평면 인물이 다시 실제 입체 공간에 세워진다.
상하이에서 등장한 3-D Denim은 이런 중첩을 특히 선명하게 만든다. 입체 효과를 가진 데님이 먼저 모델의 몸에 입혀지고 사진으로 촬영된 뒤 평면 출력물로 변한다. 이후 실제 도시 공간에 다시 세워져 새로운 사진의 일부가 된다.
옷의 물성, 모델의 몸, 사진, 출력물, 도시 공간이 순서대로 겹친다.
트롱프뢰유 케이블 니트 데님도 비슷한 방식으로 읽힌다. 트롱프뢰유는 실제와 다른 표면을 실제처럼 인식하게 만드는 시각적 기법이다. 그런 제품을 입은 모델이 현실의 사람처럼 보이면서도 명백하게 평면인 카드보드로 등장한다는 점에서 옷의 디자인과 캠페인의 제작 방식 사이에 공통된 시각적 성격이 생긴다.
디젤이 이런 제품과 캠페인 방식을 의도적으로 같은 개념으로 연결했다고 밝힌 내용은 제공된 설명에서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결과물에서는 표면과 입체, 실제와 이미지의 관계가 시즌 제품과 광고 양쪽에서 반복된다.
인물과 가방이 크게 잡힌 이미지에서는 카드보드 모델이 패션 오브젝트에 가까워지는 변화가 한층 또렷하다. 사람의 존재보다 이미 완성된 자세와 의상, 가방의 형태가 먼저 남는다.
FW26의 대표 액세서리인 D-ONE 백은 부드럽게 처지는 가죽 실루엣과 버클 스트랩을 갖췄다. 낡은 벨트가 데님 루프 사이로 미끄러지는 형태에서 착안했으며 트리티드 레더와 패치워크 버전으로 전개된다.
D-ONE의 디자인은 매끈하고 고정된 기하학적 형태보다 사용하면서 형태가 달라지는 가죽의 움직임을 강조한다. 반면 캠페인 속 모델은 움직일 수 없는 평면이다. 부드럽게 처지는 가죽과 고정된 카드보드의 대비가 제품의 물성을 더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실제 모델이 가방을 들었다면 팔의 움직임과 무게에 따라 스트랩의 위치나 가죽의 주름이 달라질 수 있다. 컷아웃에서는 최초 스튜디오 촬영에서 만들어진 형태가 그대로 고정된다. 제품 역시 촬영 당시의 한 순간에서 멈춘 채 새로운 도시로 이동한다.
현지의 현실이 제품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고정된 제품 이미지 주변으로 현실이 들어오는 방식이다.
이 구조는 패션 광고가 제품을 보여주는 오래된 방식과도 거리를 만든다. 로케이션 화보에서는 옷과 가방이 도시의 날씨와 빛, 모델의 움직임을 만나 새로운 모습으로 촬영된다. ‘Multiplicities’에서는 제품 이미지의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배경만 현실로 바뀐다.
브랜드는 제품의 색과 형태를 일정하게 유지할 수 있고, 현지 사진가는 제품을 다시 연출하기보다 제품이 놓일 현실을 선택한다.
소비자가 접하는 최종 사진에는 서로 다른 시간도 겹친다. 모델을 촬영했던 스튜디오의 시간과 카드보드를 현지에 세운 시간이 같지 않다. 실제 사람들은 현지 촬영 순간에 존재하지만 모델은 이전 촬영의 순간을 품은 채 들어온다.
한 프레임 안에 서로 다른 장소와 시간이 동시에 존재한다.
생성형 이미지가 존재하지 않는 인물과 장소를 하나의 사진처럼 만들어내는 시대에, 디젤은 실제로 존재하는 모델 사진과 실제 도시를 사용하면서도 둘이 같은 순간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완벽한 현실처럼 만드는 대신 서로 다른 시간의 흔적을 그대로 남겼다.
이 차이는 소비자가 패션 이미지를 받아들이는 방식에도 변화를 준다. 사진 속 모든 상황을 실제 사건처럼 믿을 필요가 없다. 제작된 이미지라는 사실을 알고도 옷과 공간, 사람 사이의 관계를 즐길 수 있다.
광고의 설득 방식도 ‘실제로 이런 사람이 이곳에서 이 옷을 입었다’는 재현에서 멀어진다. 실제와 허구를 섞은 상태 자체가 비주얼이 된다.
FW26 ‘Multiplicities’에서 카드보드는 모델을 대신하기 위한 값싼 대체재로만 기능하지 않는다. 모델이 실제 공간에 없다는 사실을 계속 드러내는 장치다. 붉은 외곽선과 평면적인 몸, 움직이지 않는 포즈가 현실과 이미지 사이의 거리를 끝까지 남긴다.
3-D Denim과 Bicolor Leather, Cut Out Floral Knits, 트롱프뢰유 케이블 니트 데님처럼 표면과 구조에 변화를 준 시즌 제품들도 이런 사진 안에서 한 번 더 평면과 입체 사이를 오간다. 옷은 실제 물건에서 사진으로, 사진은 카드보드로, 카드보드는 다시 도시 사진의 일부로 바뀐다.
디지털 이미지가 갈수록 현실과 비슷해지는 시기에 디젤은 현실을 닮게 만드는 기술보다 현실과 이미지가 다르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쪽을 선택했다. AI에 대한 직접적인 선언으로 확대할 근거는 없지만, ‘Multiplicities’가 만들어낸 시각적 결과는 현재의 이미지 환경과 흥미로운 대비를 이룬다.
모델은 현장에 없었지만 모델의 이미지는 세계 여러 도시를 돌았다. 실제 사람과 가짜 사람을 구분하지 못하게 만드는 대신, 누가 종이이고 누가 현실의 사람인지 처음부터 보여줬다. 디젤 FW26의 카드보드 캠페인은 완벽한 합성보다 드러난 이음새를 광고의 구성 요소로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