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ddy Pike Figulus①] 베수비오 용암석으로 만든 가구…Paddy Pike ‘Figulus’, 유약과 가마로 완성
화산암에 유약 입혀 다시 불 속으로…베수비오산 기슭 Ranieri와 제작 2025년 ‘Arnardo’의 금속 대신 용암석 선택, 부풀어 오른 곡선은 그대로
[KtN 임민정기자]이탈리아 베수비오산(Mount Vesuvius) 기슭의 용암석이 의자와 조각적 가구로 다시 태어났다. 런던에서 활동하는 디자이너 패디 파이크(Paddy Pike)는 용암석 가공업체 라니에리(Ranieri)와 함께 ‘Figulus’ 컬렉션을 제작했다. 화산 활동으로 만들어진 돌을 가공한 뒤 유약을 입히고 가마에서 다시 굽는 방식이다. 서기 79년 분화로 폼페이를 매몰시킨 베수비오산의 지질학적 시간이 현대 가구 제작 공정과 맞닿았다.
붉은색 작품은 두꺼운 몸체가 바닥에서 올라와 상부에서 둥근 아치를 만든다. 중앙의 작은 개구부에는 불이 놓였고, 적갈색 유약 표면은 불빛을 받아 광택을 낸다. 단단한 화산암을 사용했지만 윤곽은 무겁거나 각지지 않았다. 둥글게 부풀어 오른 외형과 매끄러운 표면이 돌이라는 재료가 가진 익숙한 인상을 바꾼다.
Figulus에는 파이크가 이전 작업에서 이어온 유기적인 형태가 남아 있다. 2025년 ‘Arnardo’ 컬렉션에서도 부피가 팽창한 듯한 곡선과 매끄러운 외형을 사용했다. 두 컬렉션을 가르는 가장 큰 차이는 재료와 마감 방식이다. Arnardo가 거울처럼 연마한 금속을 사용했다면 Figulus는 베수비오 용암석에 유약을 입혀 가마에서 굽는다.
재료가 바뀌면서 표면의 성격도 달라졌다. 금속의 반사 효과 대신 Figulus에서는 색을 입힌 유약과 넓은 곡면이 앞에 나온다. 짙은 청색과 적색, 녹색, 검은색, 분홍색, 황색 등으로 제작된 작품은 빛을 받는 위치에 따라 광택의 강도가 달라진다. 색상은 요청에 따라 달리 제작할 수 있다.
짙은 청색 작품 역시 두꺼운 곡면 안쪽에 작은 불을 품고 있다. 몸체는 바닥 가까이에서 안으로 말려 들어가며 개구부를 만들고, 상부는 둥근 덩어리처럼 이어진다. 붉은 작품과 같은 재료와 제작법을 공유하면서도 색과 비례가 달라지자 전체 인상은 크게 달라진다.
Figulus 제작에는 베수비오산 기슭에서 작업하는 라니에리가 참여했다. 파이크가 구상한 대형 형태를 실제 용암석으로 옮기는 과정에서는 가마의 크기가 중요한 제작 조건으로 작용했다. 작품을 한 번에 넣을 수 없어 형태를 여러 부분으로 나눠 제작했고, 각각 유약을 입힌 뒤 가마에서 구웠다.
완성된 작품에 반복해서 나타나는 수평선도 이 과정에서 생겼다. 붉은색의 높은 등받이형 좌석과 황색 작품, 일부 둥근 좌석에는 몸체를 가로지르는 선이 여러 층으로 남아 있다. 장식으로 덧붙인 선이 아니라 가마에 넣기 위해 작품을 나눴던 제작 과정의 흔적이다.
파이크는 이런 흔적을 완성 단계에서 감추지 않았다. 제작자와 재료, 디자이너가 가진 성격을 최종 작품 안에 함께 남기는 작업을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형태를 완벽하게 하나로 보이도록 정리하기보다 실제 제작 과정에서 생긴 경계를 작품의 일부로 받아들인 것이다.
옅은 청색 작품에서는 Figulus의 곡선이 보다 단순하게 드러난다. 아래쪽 원통형 몸체 위로 상부가 비스듬히 솟고, 중앙은 안쪽으로 좁아진다. 유약을 입힌 표면에는 빛이 맺히고, 둥근 외곽을 따라 반사가 이어진다. 거칠고 불규칙한 화산석의 외관을 그대로 남기는 대신 가공과 소성을 거쳐 전혀 다른 표면을 만든 방식이다.
파이크는 새로운 재료를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다루거나, 익숙하지 않은 용도로 옮기는 작업에 관심을 가져왔다고 밝혔다. 용암석 자체가 디자인 가구에서 전례가 없는 재료는 아니지만 Figulus에서는 소재 선택만으로 차별화를 시도하지 않았다. 화산석을 둥글고 팽창한 형태로 가공하고, 유약과 소성을 적용해 파이크가 지속해온 조형 언어 안으로 끌어들였다.
불은 Figulus에서 재료의 기원과 실제 제작을 잇는다. 베수비오산의 화산 활동으로 만들어진 용암석은 사람의 손으로 가공된 뒤 다시 가마의 열을 통과한다. 자연에서 만들어진 돌이 제작 현장에서 또 한 번 불을 거치면서 색과 광택을 갖춘 가구로 완성된다.
가마의 크기 때문에 생긴 분할선까지 그대로 남긴 선택은 Figulus의 제작 방식을 가장 구체적으로 드러낸다. 베수비오산의 용암석, 라니에리의 가공과 소성, 파이크의 둥근 형태가 한 작품 안에서 함께 작동한다. Figulus는 화산암이라는 재료를 앞세우는 데서 멈추지 않고, 돌이 가구가 되는 과정 자체를 완성된 형태에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