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ddy Pike Figulus②] 가마 크기가 남긴 수평선…Paddy Pike ‘Figulus’의 제작 흔적

대형 형태 여러 부분으로 나눠 소성…완성품에 접합 경계 그대로 남겨 기계공학에서 가구 프로토타이핑으로, 형태보다 제작 과정까지 설계한 접근

2026-09-07     임민정 기자

[KtN 임민정기자]붉은색 의자의 높은 등받이를 따라 여러 개의 수평선이 층층이 이어진다. 표면을 장식하기 위해 새긴 선이 아니다. 런던에서 활동하는 디자이너 패디 파이크(Paddy Pike)의 ‘Figulus’ 컬렉션을 실제 용암석으로 제작하는 과정에서 생긴 흔적이다. 완성된 크기의 작품을 가마에 한 번에 넣을 수 없자 몸체를 여러 부분으로 나눠 만들었고, 각각 유약을 입혀 구운 뒤 다시 하나의 가구로 결합했다. 제작 설비의 물리적 한계가 완성된 작품의 외관에 그대로 남았다.

[Paddy Pike Figulus②] 가마 크기가 남긴 수평선…Paddy Pike ‘Figulus’의 제작 흔적. 사진=Paddy Pike,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붉은색 좌석은 Figulus의 제작 구조를 가장 선명하게 드러낸다. 낮고 두꺼운 좌판 위에서 등받이가 위로 길게 솟고, 등받이와 하부 몸체에는 일정한 간격의 가로선이 반복된다. 둥글게 부풀린 듯한 전체 윤곽과 달리 선은 작품을 여러 구획으로 나눈다. 매끄러운 유약 표면을 따라 이어지는 분할선 때문에 하나의 덩어리처럼 보이는 형태 안에서도 제작 순서가 읽힌다.

Figulus 제작에는 이탈리아 베수비오산(Mount Vesuvius) 기슭에서 용암석을 다루는 라니에리(Ranieri)가 참여했다. 파이크가 구상한 가구는 크기와 부피 때문에 완성된 형태 그대로 가마에 넣을 수 없었다. 작품을 작은 부분으로 나눈 뒤 각각 가공하고 유약을 입혀 소성하는 방식이 필요했다. 가마의 내부 규격이 작품을 몇 개로 나눌지 결정했고, 나뉜 경계는 결합을 마친 뒤에도 표면에 남았다.

파이크는 수평선을 감춰야 할 결함으로 처리하지 않았다. 제작자와 재료, 디자이너 자신이 가진 성격을 최종 작품에서 함께 드러내는 데 관심이 있다고 설명했다. 완성품만 놓고 제작 과정을 지우기보다 어떤 조건을 거쳐 물체가 만들어졌는지 남겨두는 방식이다.

[Paddy Pike Figulus②] 가마 크기가 남긴 수평선…Paddy Pike ‘Figulus’의 제작 흔적. 사진=Paddy Pike,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같은 붉은색 좌석을 정면에서 보면 가로선의 기능이 더욱 분명해진다. 좌판 아래의 두꺼운 몸체와 위로 좁아지며 올라가는 등받이가 여러 단으로 나뉘어 있다. 수직으로 길게 뻗은 전체 비례와 수평 분할이 동시에 나타나면서 형태가 한 번에 만들어진 덩어리가 아니라 여러 부분의 결합으로 완성됐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Figulus의 제작 조건은 외형에도 직접 영향을 미쳤다. 파이크가 선호하는 크고 유기적인 형태를 실제 화산암으로 옮기려면 돌을 가공하는 기술뿐 아니라 가마에서 구울 수 있는 크기까지 고려해야 했다. 디지털 환경에서는 하나의 연속된 덩어리로 설계할 수 있지만 실제 제작 단계에서는 돌의 크기와 무게, 소성 설비의 범위가 개입한다. 작품의 최종 모습은 처음 구상한 형태와 제작 현장의 조건이 맞춰지는 과정에서 결정됐다.

파이크의 이력에서도 제작 과정에 대한 관심은 일찍 나타났다. 에든버러 칼리지(Edinburgh College)에서 기계공학을 공부했고, 많은 내용을 암기하거나 글로 풀어내는 과목보다 수학과 물리처럼 과정과 개념을 이해하는 분야에 흥미가 있었다고 회고했다. 학교에서 가구 프로토타이핑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뒤 Francis Sultana, Peter Mikic Interiors, Barber Osgerby 등에서 경력을 쌓았다.

기계공학과 가구 제작 사이의 연결은 Figulus에서도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형태를 구상하는 단계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재료를 어떤 크기로 나누고, 각 부분을 어떻게 제작해 다시 하나로 만들지까지 작업에 포함된다. 대형 가구를 가마에 넣을 수 없다는 조건은 설계 바깥에서 발생한 문제가 아니라 실제 형태를 결정하는 제작 변수로 들어왔다.

[Paddy Pike Figulus②] 가마 크기가 남긴 수평선…Paddy Pike ‘Figulus’의 제작 흔적. 사진=Paddy Pike,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붉은색 좌석을 다른 각도에서 보면 수평선은 정면에만 머물지 않는다. 등받이와 측면을 따라 경계가 이어지면서 작품 전체가 여러 부분으로 나뉘어 제작됐다는 점을 보여준다. 유약의 광택은 각각의 곡면을 하나로 연결하면서도, 분할선은 몸체가 어떻게 구성됐는지를 그대로 남긴다.

Figulus의 다른 작품에서도 같은 방식이 반복된다. 녹색과 검은색의 둥근 좌석, 황색의 높은 형태에서도 몸체를 가로지르는 경계가 확인된다. 작품마다 크기와 비례는 다르지만 여러 부분으로 나눠 제작한 흔적은 공통적으로 남아 있다. 색과 형태가 달라져도 제작 방식이 컬렉션 전체의 외관을 연결하는 요소로 작동한다.

[Paddy Pike Figulus②] 가마 크기가 남긴 수평선…Paddy Pike ‘Figulus’의 제작 흔적. 사진=Paddy Pike,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녹색 작품은 수평 분할과 유기적인 곡면이 한 몸체 안에 동시에 나타난다. 좌우로 크게 부풀어 오른 하부와 위쪽의 둥근 등받이가 이어지고, 표면에는 제작 과정에서 생긴 경계가 남아 있다. 유약을 입힌 화산암이 매끄러운 광택을 내면서 돌의 거친 표면은 거의 드러나지 않지만, 분할선만큼은 제작의 흔적으로 유지됐다.

파이크가 Figulus에서 택한 방식은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모든 흔적을 지우는 접근과 거리가 있다. 가마 크기 때문에 발생한 분할을 감춘 뒤 하나의 매끈한 덩어리처럼 정리하는 대신 제작 과정의 경계를 남겼다. 작품을 만든 기술적 조건이 외형의 일부가 된 셈이다.

파이크는 자신의 작업에서 새로운 방식으로 재료를 사용하거나 기존에 익숙하지 않았던 용도로 옮기는 데 관심이 있다고 밝혔다. Figulus에서는 화산암을 가구로 사용하는 선택과 함께, 대형 형태를 실제 제작 가능한 크기로 나누고 다시 결합하는 과정까지 디자인에 포함됐다. 재료의 특성만큼 제작자가 사용하는 설비와 기술도 최종 결과를 바꿨다.

작품의 수평선은 Figulus가 하나의 아이디어에서 곧바로 완성된 물체로 옮겨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남긴다. 파이크가 만든 형태는 라니에리의 가공과 가마 소성을 거치면서 여러 부분으로 나뉘었고, 완성된 가구에는 나뉘었던 경계가 다시 이어진 흔적이 남았다. Figulus의 둥근 윤곽 안에는 디자이너의 조형뿐 아니라 용암석의 가공 조건과 제작자의 기술, 가마의 크기까지 함께 기록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