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ddy Pike Figulus③] VR에서 빚고 AI로 미리 본다…Paddy Pike, 디지털을 실물 가구로 옮기는 법

Gravity Sketch로 3D 형태 조형…당기고 늘리고 복제하며 유기적 곡선 설계 AI는 완성 전 시각화에 활용…“실제로 만들 작품과 맞는 이미지”에 제작 책임 강조

2026-09-08     임민정 기자

[KtN 임민정기자]패디 파이크(Paddy Pike)의 ‘Figulus’는 베수비오산(Mount Vesuvius) 용암석에서 시작하지만 형태가 처음 만들어지는 곳은 작업대가 아니다. 파이크는 가상현실(VR) 프로그램 Gravity Sketch 안에서 컨트롤러를 움직이며 3D 형태를 만들고, 생성형 AI를 이용해 아직 제작되지 않은 가구의 모습을 미리 시각화한다. 디지털 환경에서 만든 곡선은 이후 실제 용암석 가공과 유약, 가마 소성을 거쳐 물리적인 가구가 된다.

[Paddy Pike Figulus③] VR에서 빚고 AI로 미리 본다…Paddy Pike, 디지털을 실물 가구로 옮기는 법. 사진=Paddy Pike,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녹색 좌석은 Figulus에서 반복되는 조형 특성을 압축해 보여준다. 하부는 좌우로 넓게 부풀고 상부에는 둥근 등받이가 이어진다. 직선으로 면을 나누기보다 하나의 덩어리를 당기고 눌러 변형한 듯한 곡선이 몸체 전체를 감싼다. 유약을 입힌 표면까지 매끄럽게 이어지면서 화산암의 거친 질감보다 부피와 윤곽이 먼저 드러난다.

파이크는 Gravity Sketch에서 3D 형태를 점토처럼 다룬다고 설명했다. 컨트롤러로 형태를 당기거나 늘릴 수 있고, 디지털 작업의 특성을 활용해 같은 부분을 복제하거나 크기를 바꾸는 작업도 가능하다. 실제 점토를 손으로 만지는 방식과 닮았지만 물리적인 재료에서는 어려운 확대·축소와 복제가 동시에 이뤄진다.

VR에서 작업하는 시간에 대해서는 “창문도 시계도 없는 곳”에 들어간 것과 비슷하다고 표현했다. 음악이나 팟캐스트를 틀어놓고 몇 시간씩 작업할 수 있으며, 재료를 끌어당기고 늘이는 과정이 반복되면서 형태가 자연스럽게 매끄럽고 유기적으로 변한다고 설명했다.

Figulus의 둥근 외형도 이런 작업 방식과 맞닿아 있다. 다만 사진에서 보이는 곡선을 특정 VR 동작의 직접적인 결과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파이크가 밝힌 제작 방식과 완성된 작품을 함께 놓으면, 각이 진 기하학적 구조보다 연속적인 곡면과 팽창한 부피를 선호하는 조형 언어가 디지털 작업 과정에서도 이어지고 있다는 점은 확인할 수 있다.

[Paddy Pike Figulus③] VR에서 빚고 AI로 미리 본다…Paddy Pike, 디지털을 실물 가구로 옮기는 법. 사진=Paddy Pike,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검은색 작품에서는 같은 조형 방식이 다른 비례로 나타난다. 두꺼운 외곽이 좌석을 둘러싸고 내부가 깊게 파이며, 좌우가 완전히 대칭을 이루지 않는 곡선이 이어진다. 검은 유약은 표면의 반사를 억제하면서 부피와 굴곡을 더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녹색 작품과 형태는 다르지만 단단한 석재를 부드러운 덩어리처럼 다루는 방식은 공통적이다.

디지털 조형이 끝났다고 해서 가구가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VR에서는 크기와 형태를 자유롭게 바꿀 수 있지만 Figulus가 실제 물체가 되는 순간부터 용암석의 가공과 무게, 가마 크기, 소성 과정이 개입한다. 앞선 제작 과정에서 작품을 여러 부분으로 나눠 가마에 넣어야 했던 이유도 디지털 형태와 실제 생산 조건 사이의 차이에서 발생했다.

파이크의 작업에서 VR은 물리적인 제작을 대신하기보다 실물로 옮길 형태를 만드는 단계에 가깝다. 디지털 공간에서는 연속된 하나의 덩어리로 설계할 수 있지만 제작 현장에서는 돌을 절단하고 가공해야 하며, 유약을 입힌 각 부분을 실제 가마 안에 넣을 수 있는 크기로 나눠야 한다. Figulus 표면에 남은 수평 분할선은 디지털 조형이 현실의 제작 조건을 만나면서 생긴 흔적이기도 하다.

파이크가 생성형 AI를 사용하는 방식도 같은 흐름 안에 놓인다. AI로 완성품을 대신 만드는 것이 아니라 아직 제작되지 않은 작품을 실제에 가까운 이미지로 보여주는 데 활용한다. 파이크는 AI를 3D 모델링이나 종이 위의 연필과 마찬가지로 아이디어에서 실물까지 이어지는 과정에 들어가는 하나의 도구로 설명했다.

[Paddy Pike Figulus③] VR에서 빚고 AI로 미리 본다…Paddy Pike, 디지털을 실물 가구로 옮기는 법. 사진=Paddy Pike,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분홍색 좌석형 작품은 Figulus가 디지털 이미지에 머물지 않고 실제 부피를 가진 물체로 제작됐다는 점을 보여준다. 좌판과 등받이가 하나의 굵은 덩어리처럼 이어지고, 바닥 가까이에서 넓어진 몸체가 위쪽으로 솟는다. 광택을 가진 분홍색 유약은 곡면을 따라 빛을 반사한다.

파이크는 AI 렌더링을 자신의 인스타그램에도 공개해 왔다. 실제 제작 전 고객에게 앞으로 만들어질 작품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보여줄 수 있다는 점을 AI 활용의 장점으로 꼽았다. 디자인 아이디어를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최종 결과물과 가까운 이미지를 사전에 제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AI를 사용하는 기준도 분명히 밝혔다. 생성된 이미지가 실제 제작 가능성과 멀어지지 않도록 관리하는 일을 디자이너의 책임으로 보고 있다. AI가 작업 전체를 주도하도록 두거나 실물을 만드는 현실적인 조건과의 연결을 잃는 상황은 경계했다. 고객에게 보여주는 이미지 역시 나중에 실제로 만들어질 작품과 맞아야 한다는 설명이다.

[Paddy Pike Figulus③] VR에서 빚고 AI로 미리 본다…Paddy Pike, 디지털을 실물 가구로 옮기는 법. 사진=Paddy Pike,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같은 분홍색 작품을 다른 각도에서 보면 등받이의 두께와 좌판의 깊이, 아래쪽 몸체의 부피가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한 방향에서 완성된 이미지만 보는 것과 달리 실제 가구는 여러 각도에서 형태가 이어져야 하고, 사람의 몸을 받칠 구조와 자체 무게도 갖춰야 한다. 디지털 시각화가 결국 물리적 제작으로 검증돼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파이크가 VR과 AI를 사용하는 목적에는 차이가 있다. Gravity Sketch에서는 형태 자체를 만들고 다듬는다. AI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결과물을 실제에 가까운 이미지로 보여주는 데 사용한다. 이후 가공업체 라니에리가 베수비오 용암석을 실제 크기로 제작하고, 유약과 가마 소성을 거쳐 가구를 완성한다.

디지털 작업과 실제 제작 사이에는 계속 조정이 필요하다. VR에서는 제한 없이 키운 형태도 가마 안에 들어가야 하고, AI가 만들어낸 이미지는 현실의 재료와 공정으로 구현할 수 있어야 한다. Figulus에서 기술은 제작 조건을 없애는 수단이 아니라 실물 제작으로 넘어가기 전 형태와 결과를 구체화하는 도구로 사용된다.

파이크가 기계공학을 공부했던 배경도 이런 접근과 연결된다. Edinburgh College에서 기계공학을 공부했고, 암기나 긴 글쓰기보다 수학과 물리처럼 과정과 개념을 이해하는 분야에 흥미를 느꼈다고 회고했다. 학교에서 가구 프로토타이핑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뒤 Francis Sultana, Peter Mikic Interiors, Barber Osgerby 등에서 경력을 쌓았고, 이후 자신의 스튜디오를 설립했다.

현재 작업은 큐레이터 나초 폴로(Nacho Polo), 로버트 오누스카(Robert Onuska)와의 협업을 거쳐 확장됐으며, 파이크의 작품은 STUDIOTWENTYSEVEN이 독점적으로 다루고 있다.

Figulus가 보여주는 제작 순서는 명확하다. VR에서 형태를 만들고, AI로 완성될 모습을 구체화한 뒤, 용암석을 실제로 가공한다. 제작 규모에 맞춰 몸체를 나누고 유약을 입힌 뒤 가마에서 구워 다시 하나의 가구로 결합한다. 디지털 기술이 앞단에 놓여 있지만 완성 여부를 결정하는 단계에는 여전히 돌의 물성과 가마의 크기, 제작자의 손이 남아 있다.

파이크가 AI를 연필이나 3D 모델링과 같은 도구로 설명하는 이유도 Figulus의 제작 과정에서 드러난다. 생성된 이미지는 종착점이 아니라 실물을 만들기 위한 중간 단계다. 베수비오 용암석으로 완성된 Figulus는 VR과 생성형 AI가 가구 제작에 들어온 이후에도 최종 결과가 물리적 재료와 제작 기술에서 결정된다는 사실을 구체적인 형태로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