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바이오헬스 재편①] 약값 낮추고 공장 끌어온다…MFN이 바꾼 미국 제약산업의 거래조건
MFN 참여 26개사, 미국 브랜드 의약품 시장 약 89%…대형 제약사 미국 투자 1500억달러 넘어 처방의약품 관세 최대 3년 면제와 현지 생산 투자 결합…가격정책이 통상·산업정책으로 확대 원료의약품 비축까지 연결…중국·인도 중심 공급망도 미국 안으로 재배치
[KtN 김 규운기자]미국이 제약사에 요구하는 것은 더 이상 ‘약값을 낮추라’는 한 문장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처방약 가격을 다른 선진국의 최저 수준과 연동하는 최혜국 대우(Most Favored Nation·MFN) 체계를 확대하는 동시에, 협약에 참여한 기업에는 처방의약품 관세를 최대 3년간 면제하는 유인을 붙였다. 가격을 낮춘 기업의 미국 내 생산시설 투자도 뒤따르면서 약가정책과 통상정책, 제조업 육성정책이 하나의 구조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2025년 5월 시작된 MFN 약가정책은 미국이 특정 의약품에 대해 다른 선진국이 지불하는 최저 가격보다 높은 가격을 부담하지 않도록 하는 방식이다. 처음에는 대형 제약사 17곳을 대상으로 가격 인하가 요구됐지만, 2026년 8월 말에는 참여 기업이 26곳으로 늘었다. 8월 31일 추가로 합류한 9개 중견 제약사는 미국 내 제조시설에 196억달러 이상을 투자하기로 했다.
참여 기업 26곳이 차지하는 미국 브랜드 의약품 시장 비중은 약 89%에 이른다. 대형 제약사의 미국 투자계획도 1500억달러를 넘어섰다. 약값을 낮추는 정책이 제약사들의 미국 투자 확대와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는 점에서 단순한 가격통제와는 성격이 다르다.
화이자(Pfizer)는 2025년 9월 최초로 MFN 협약을 체결하면서 미국 내 연구개발과 생산시설에 700억달러를 투자하기로 했다. 이후 아스트라제네카(AstraZeneca), 일라이 릴리(Eli Lilly), 머크(Merck) 등이 잇따라 미국 투자를 발표했고, 2025년 말까지 당초 대상이던 대형 제약사 17곳 가운데 14곳이 협약에 참여했다.
이 과정에서 가격과 관세가 직접 연결됐다. MFN 협약 참여 기업에는 미국 무역법 232조에 따른 처방의약품 관세를 최대 3년간 면제하는 구조가 함께 적용된다. 제약사가 미국이 요구하는 가격체계에 들어오면 시장 접근 비용의 일부를 낮춰주는 방식이다. 약가 인하로 줄어드는 수익과 관세 부담, 현지 생산 투자비용을 따로 계산하기 어려워진 이유다.
미국의 의약품 가격정책이 산업정책으로 확장되는 대목도 여기에 있다. 약가만 낮춘다면 제약기업 입장에서는 수익성 압박으로 끝날 수 있다. 미국은 여기에 관세 면제와 세계 최대 의약품 시장의 접근성을 결합하고, 생산시설을 미국에 짓도록 유도한다. 소비자가 지불하는 가격을 낮추면서 생산과 고용, 연구개발 투자는 미국 안으로 끌어들이는 구조다.
원료의약품 공급망도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MFN 협약 기업 가운데 상당수는 미국의 전략적 원료의약품 비축고(Strategic Active Pharmaceutical Ingredients Reserve·SAPIR)에 원료의약품을 공급하기로 했다. 중국과 인도 등에 집중된 원료의약품 의존도를 낮추고 필수의약품 생산 기반을 미국 내부에 더 많이 남기려는 정책과 연결된다.
신약의 최종 판매가격, 완제품 생산공장, 원료의약품 확보가 한 정책 흐름에서 이어지는 셈이다. 팬데믹 이후 각국이 의약품 공급망을 국가안보와 연결해 다뤄왔지만, 미국은 가격정책까지 공급망 재편에 끌어들이고 있다. 미국에서 약을 팔려는 기업의 가격 결정이 공장 위치와 원료 공급전략까지 영향을 받는 구조다.
소비자와 정부 재정 측면에서는 절감 규모가 전면에 놓인다. 백악관 경제자문위원회(CEA)는 MFN을 메디케이드에만 적용해도 10년 동안 643억달러를 절감할 수 있다고 추산했고, 신규 의약품 전반으로 확대할 경우 절감 규모를 5290억달러로 제시했다.
미국 정부가 직접 운영하는 처방약 구매 플랫폼 트럼프Rx(Trump Rx)도 같은 가격정책의 연장선에 있다. 2026년 2월 출범 당시 40종이던 등재 의약품은 같은 해 중반 800종 이상으로 늘었다. 보험을 거치지 않고 제조사의 현금 할인가로 의약품을 구매하도록 한 구조이며, HHS가 발표한 누적 소비자 절감액은 7억달러를 넘어섰다.
병원과 약국에서도 환자별 약가와 사전승인 요건을 처방 단계에서 실시간으로 조회하도록 제도가 바뀌었다. 환자가 처방전을 받은 뒤 가격을 확인하던 구조에서 의사가 처방할 때 가격과 보험조건을 함께 고려하는 방향으로 이동한 것이다. 약값을 낮추는 정책이 제조사 협상뿐 아니라 처방과 구매 단계까지 내려왔다.
제약기업에는 이전보다 복잡한 손익계산이 필요해졌다. 미국에서 높은 가격을 유지하는 대신 관세를 부담할 것인지, 가격을 낮추고 MFN 체계에 들어가 관세 혜택을 받을 것인지, 현지 생산시설까지 확대해 장기적인 시장 접근성을 확보할 것인지가 서로 연결된다. 미국 시장에서의 가격전략이 더 이상 영업 부문의 결정만으로 끝나지 않는 이유다.
공장 입지도 같은 계산 안으로 들어왔다. 제약산업은 생산설비를 단기간에 옮기기 어렵고, 품질관리와 규제 승인까지 거쳐야 한다. 미국 내 투자 결정은 단순한 관세 회피보다 장기적인 공급망 재배치를 의미한다. 화이자를 비롯한 대형 제약사의 대규모 투자계획이 현실화될수록 글로벌 생산능력의 지역별 배분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미국 밖에서 제품을 생산해 수출해온 기업에는 부담이 더 커질 수 있다. 미국은 2026년 4월 특허의약품에 무역법 232조를 적용해 최대 100% 관세를 부과하는 체계를 도입했고, 한국에는 15% 우대세율을 적용했다. 바이오시밀러와 제네릭은 당분간 면제 대상이지만 제네릭 면제는 2027년 4월까지 미국 상무부가 추가 관세 필요성을 다시 검토하게 된다.
온쇼어링을 약속한 기업에는 20%, MFN 협약까지 체결한 기업에는 0%를 적용하는 차등 구조도 현지 생산시설을 갖춘 기업과 그렇지 않은 기업의 조건을 갈라놓는다.
한국 제약·바이오기업도 미국을 단순한 수출시장으로만 보기 어려워졌다. 미국에서 받을 수 있는 가격, 수출 때 부담할 관세, 현지 생산시설 투자비, 공급망 안정성을 한꺼번에 계산해야 한다. 바이오시밀러와 제네릭의 당분간 관세 면제가 시간을 벌어주고 있지만 미국 정책이 현지 생산과 가격협약에 더 큰 혜택을 주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MFN 확대에서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약가 인하 자체보다 미국이 제약기업과 거래하는 방식이다. 세계 최대 의약품 시장이라는 구매력을 이용해 낮은 가격을 요구하고, 그 대신 관세와 시장 접근에서 유인을 제공한다. 기업이 받아들인 가격조건은 미국 공장 투자와 원료의약품 공급망까지 이어진다.
미국에서 약을 파는 일과 미국에서 약을 만드는 일 사이의 거리가 빠르게 좁아지고 있다. 26개 제약사, 브랜드 의약품 시장 89%, 1500억달러가 넘는 투자계획은 그 변화를 숫자로 드러낸다. 미국의 약가정책은 이제 처방전의 가격만 바꾸는 제도가 아니라 글로벌 제약사의 생산 위치와 공급망까지 다시 배치하는 산업정책으로 움직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