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바이오헬스 재편②] 동물시험 줄이고 임상 1상 6~12개월 당긴다…FDA가 다시 쓰는 ‘신약 개발의 시간’

AI 독성예측·오가노이드 데이터 IND 단계부터 활용…비임상 근거 체계 전환 Operation Trial Blazer로 초기 임상 진입기간 단축…마스터 프로토콜·CMC 개편 병행 TEFCA 데이터 교환 1000만건서 10억건 이상으로…규제 완화보다 ‘증거의 방식’ 재편

2026-09-13     김 규운 기자
사진=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KtN 김 규운기자]신약 개발에서 가장 비싼 자원 가운데 하나는 시간이다. 후보물질을 찾아도 독성시험과 임상시험계획 제출, 초기 임상 준비를 거치는 동안 연구비와 인건비가 계속 투입된다. 특허의 남은 기간도 줄어든다. 미국 식품의약국(FDA)과 보건복지부(HHS)가 최근 손대고 있는 것은 바로 이 시간의 구조다.

FDA는 동물시험을 줄이고 AI 기반 독성예측 모델과 오가노이드(Organoid)를 규제 판단에 활용하는 방향으로 비임상시험 체계를 바꾸고 있다. HHS는 임상시험계획(IND) 신청에서 임상 1상 개시까지 걸리는 준비기간을 6~12개월 단축하는 프로그램을 추진하고 있다. 의료기관과 보험자 사이에서는 보건의료 데이터 교환량이 1년 사이 1000만건에서 10억건 이상으로 늘었다. 신약을 개발하고, 검증하고, 실제 의료현장의 데이터를 다시 연구에 연결하는 시간이 동시에 짧아지고 있다.

FDA는 2025년 4월 단일클론항체(Monoclonal Antibody·mAb)를 시작으로 의약품 개발 과정의 동물시험 요건을 신접근법(New Approach Methods·NAMs)으로 단계적으로 전환하는 5개년 로드맵을 내놨다. 인간 세포와 조직을 기반으로 한 실험, 오가노이드, AI 독성예측 모델을 기존 동물시험과 함께 규제 판단에 활용하는 구조다. 임상시험계획 신청 단계부터 관련 데이터를 제출할 수 있도록 했다.

2026년에는 로드맵이 실제 지침으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FDA는 단일클론항체 개발 과정에서 비인간영장류(Non-Human Primate) 시험을 축소하거나 폐지하는 방향의 가이던스 초안을 제시했고, 투구게(Horseshoe Crab) 유래 내독소 시험을 대체하는 지침도 함께 손질했다. 오래 유지돼온 시험 절차를 그대로 반복하는 대신 새로운 실험 모델이 기존 증거를 대신할 수 있는 조건을 규제기관이 구체적으로 만들고 있다.

동물시험을 줄이는 흐름을 단순한 규제 완화로 읽기에는 변화의 폭이 더 크다. 규제가 요구하는 ‘증거의 형식’ 자체가 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특정 동물시험을 통과했는지가 안전성 검증의 중요한 기준이었다면, 앞으로는 인간 세포 기반 모델과 오가노이드, 계산모델이 어느 정도의 예측력을 갖는지까지 규제 판단에 들어온다.

제약사 입장에서는 시험을 하나 덜 하는 것보다 연구개발의 설계 순서가 달라진다는 의미가 더 크다. 후보물질을 발굴한 뒤 동물시험을 거쳐 규제기관에 제출하던 기존 흐름에서 AI 예측과 인간 유래 모델을 개발 초기부터 규제용 데이터로 설계하는 방향으로 이동할 수 있다. 실험실에서 사용하는 기술과 FDA에 제출하는 자료 사이의 간격이 좁아진다.

비임상시험에서 시작된 변화는 임상시험 진입 단계로 이어졌다. HHS는 2026년 6월 ‘오퍼레이션 트라이얼 블레이저(Operation Trial Blazer)’를 발표하고 IND 신청부터 임상 1상 개시까지의 준비기간을 6~12개월 줄이는 신속 IND 시범 프로그램을 도입했다. FDA와 국립보건원(NIH), 보건첨단연구계획국(ARPA-H)이 함께 참여하는 범정부 사업이다.

신약 개발에서 6개월이나 1년은 달력상의 차이에 그치지 않는다. 초기 임상에 들어가지 못한 기간에도 연구인력과 시설, 생산 준비에 비용이 들어간다. 자금조달에 의존하는 바이오기업에는 임상 진입이 늦어질수록 다음 투자 시점도 밀릴 수 있다. 특허기간과 상업화 가능기간까지 감안하면 규제기관의 처리 속도는 기업 가치와 직접 연결된다.

FDA는 여러 치료제와 적응증, 시험군을 하나의 구조에서 평가하는 마스터 프로토콜(Master Protocol)의 설계·분석 가이던스도 개정했다. 초기 임상 단계의 CMC(Chemistry, Manufacturing, and Controls) 요건 완화와 맞물려 개발기간과 비용을 줄이는 방향으로 규정이 움직이고 있다.

여기서 미국의 정책 방향은 ‘검사를 적게 하는 나라’와는 다르다. 동일한 정보를 더 빨리 확보하고, 여러 시험을 병렬적으로 진행하며, 기존 방식보다 실제 사람의 반응에 가까운 데이터를 일찍 확보하려는 쪽에 가깝다.

동물시험의 수를 줄여도 규제 판단에 필요한 근거까지 줄일 수는 없다. 오히려 AI 모델과 오가노이드, 새로운 시험법이 기존 동물시험을 대신하려면 예측 정확도와 재현성, 데이터 품질을 입증해야 한다. 규제 부담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부담의 위치가 바뀐다.

보건의료 데이터 인프라 확대가 함께 진행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미국 국가의료정보기술조정실(ONC)이 운영하는 전국 단위 보건의료 정보교환 체계 TEFCA(Trusted Exchange Framework and Common Agreement)를 통한 데이터 교환은 1년 안에 1000만건에서 10억건 이상으로 늘었다. 전자건강기록(EHR) 등 의료정보를 기관 사이에서 교환하는 규모가 급격히 커진 것이다.

이 숫자는 단순한 의료 전산화의 확대만을 뜻하지 않는다. 임상시험에서 얻은 데이터와 실제 의료현장에서 축적되는 실사용데이터(Real-World Data)가 더 넓은 네트워크 안에서 연결될 수 있는 기반이 커진다. 신약 개발 단계에서 만든 가설을 실제 환자 데이터로 확인하고, 의료현장의 정보가 다시 연구개발로 돌아오는 순환 속도도 빨라질 수 있다.

신약 산업에서 데이터는 원료와 비슷한 위치로 이동하고 있다. 새로운 치료제를 만드는 데 필요한 것은 후보물질만이 아니다. 어떤 환자에게 얼마나 효과가 있었는지, 부작용은 어떻게 나타났는지, 기존 치료제와 결과가 어떻게 달랐는지를 장기간 축적할 수 있어야 한다. 데이터가 병원과 보험자, 연구기관 사이에 갇혀 있을수록 신약 개발과 의료현장 사이의 시간도 길어진다.

미국은 비임상시험과 임상시험, 데이터 이동을 각각 따로 바꾸지 않고 있다. AI와 오가노이드로 비임상 근거를 더 일찍 만들고, 신속 IND로 임상 진입 시간을 줄이며, TEFCA를 통해 임상 이후의 의료데이터까지 더 빠르게 연결한다. 신약 개발을 하나의 긴 직선으로 보지 않고 여러 단계에서 동시에 시간을 줄이는 구조다.

규제의 방향은 일방적인 완화와도 거리가 있다. HHS는 식품첨가물 안전성 관리에서 제조사의 자율판단에 의존해온 GRAS(Generally Recognized As Safe) 제도에 안전성 신고 의무를 부과하는 규칙을 제안했다. 의견수렴은 2026년 12월 9일까지 이어진다. 산업의 개발 속도를 높이는 정책과 안전성 정보에 대한 책임을 강화하는 정책이 함께 진행되고 있다.

위험한 기능획득 연구(Dangerous Gain-of-Function Research·DGOF)에는 더 강한 통제가 적용됐다. HHS와 미국 국무부는 2026년 7월 해당 연구에 대한 연방 지원을 전면 금지하는 정책을 내놨다. 세부 이행지침이 마련되기까지 120일이 걸리며 일부 과학계에서는 규제 범위가 넓을 경우 정상적인 생명과학 연구까지 위축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됐다.

미국 바이오헬스 규제의 변화는 이 대조에서 더 분명해진다. 신약 개발에서는 불필요한 시간과 반복시험을 줄이지만 생명안전 위험이 큰 연구에서는 규제를 강화한다. 식품 안전에서는 기업의 자율판단에 더 많은 신고 책임을 요구한다. 규제를 일괄적으로 줄이는 것이 아니라 어디에서는 속도를 높이고 어디에서는 통제를 강화할지 다시 나누고 있다.

한국 제약·바이오기업에는 연구개발 초기 단계부터 변화가 닿는다. 미국 허가를 목표로 하는 기업이라면 동물시험을 얼마나 수행했는지만으로 비임상 전략을 짜기 어려워진다. FDA가 받아들이는 AI 모델과 오가노이드 데이터의 형태, 검증 수준, IND 단계에서의 활용 기준을 연구개발 설계에 반영해야 한다.

국내 규제체계와의 간격도 중요해진다. 한국에서 익숙한 비임상 자료를 만들고 미국 제출 단계에서 다시 형식을 맞추는 방식은 미국 규제과학이 빠르게 바뀔수록 비용이 커질 수 있다. 글로벌 임상을 염두에 둔 기업에는 연구 초기부터 미국과 국내 규제기관이 요구하는 자료를 함께 설계하는 역량이 더 중요해진다.

데이터에서는 격차가 더 커질 수 있다. TEFCA를 통해 미국의 의료데이터 교환 규모가 10억건 이상으로 늘어난 상황에서 실사용데이터를 임상개발에 연결하는 능력은 제약사의 자산이 된다. 후보물질 하나의 경쟁력뿐 아니라 어떤 의료데이터에 접근할 수 있는지, 데이터를 규제 판단에 사용할 수 있는 형태로 만들 수 있는지가 신약 개발 속도를 결정한다.

미국이 바꾸고 있는 것은 임상시험의 몇 개 규정이 아니다. 동물시험을 줄이고, AI와 오가노이드의 자리를 넓히고, 임상 1상의 출발을 앞당기고, 의료데이터의 이동량을 키우면서 신약 개발 과정에서 시간이 소모되는 위치를 하나씩 걷어내고 있다.

제약산업에서 신약 후보물질은 국경을 넘지만 개발의 시간은 규제체계에 묶여 있다. 같은 후보물질도 어느 나라에서 어떤 규칙으로 개발하느냐에 따라 임상 진입 속도와 필요한 자본이 달라질 수 있다. FDA와 HHS가 규제과학을 다시 짜는 이유도 이 시간의 경쟁과 맞닿아 있다.

AI 독성예측 모델과 오가노이드, 신속 IND, 마스터 프로토콜, 10억건을 넘어선 데이터 교환은 서로 다른 제도가 아니다. 미국이 신약 개발의 증거를 만드는 방법과 검증하는 속도, 환자 데이터가 다시 연구로 돌아오는 경로를 동시에 바꾸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신약 경쟁의 무게중심도 얼마나 많은 실험을 했느냐에서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 근거를 얼마나 빨리 만들었느냐로 이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