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약값은 낮추고 개발 시간은 줄인다…미국이 ‘시장’으로 산업의 질서를 다시 쓰는 방식
MFN 참여 26개사·브랜드 의약품 시장 약 89%…가격정책이 생산·관세·공급망으로 확장 AI·오가노이드 허용하고 임상 1상 준비 6~12개월 단축…혁신의 비용은 ‘시간’에서 줄여 한국 바이오헬스가 마주한 변화, 제품 수출 넘어 생산·데이터·규제체계까지 이어진 시장 접근의 재편
[KtN 김 규운기자]약값을 낮추면서 제약회사의 투자를 늘리고, 규제를 바꾸면서 신약 개발의 시간까지 줄인다. 얼핏 보면 서로 충돌하는 정책이다. 가격을 누르면 기업의 수익성이 낮아지고, 수익성이 낮아지면 연구개발 투자도 위축될 수 있다는 것이 제약산업을 둘러싼 오래된 논리였다. 2026년 미국의 바이오헬스 정책은 이 익숙한 등식을 다른 방식으로 풀고 있다. 높은 약값을 혁신의 유일한 보상으로 두지 않고, 개발시간과 관세, 데이터 접근성, 세계 최대 시장의 규모를 함께 조정하기 시작했다.
미국의 최혜국 대우(Most Favored Nation·MFN) 약가정책은 처방의약품 가격을 다른 선진국의 최저 수준과 연결한다. 2026년 8월 말 참여 제약사는 26곳으로 늘었고, 이들이 차지하는 미국 브랜드 의약품 시장 비중은 약 89%에 이른다. 대형 제약사가 미국에 약속한 연구개발·생산시설 투자 규모도 1500억달러를 넘어섰다. 가격을 낮추라는 요구와 미국에 더 많이 투자하라는 요구가 동시에 움직이고 있다.
여기에 처방의약품 관세가 붙는다. MFN 협약에 참여한 기업은 무역법 232조에 따른 관세를 최대 3년간 면제받을 수 있다. 미국에서 받을 수 있는 가격을 낮추는 대신 국경에서 부담하는 비용을 줄여주는 구조다. 가격정책은 더 이상 보건재정의 영역에만 머물지 않고 통상정책과 산업정책으로 이어진다.
화이자(Pfizer)가 MFN 협약과 함께 미국 내 연구개발·생산시설에 700억달러를 투자하기로 하고, 아스트라제네카(AstraZeneca), 일라이 릴리(Eli Lilly), 머크(Merck) 등이 뒤따른 흐름도 같은 맥락에 놓인다. 협약 기업 상당수는 전략적 원료의약품 비축고에 원료를 공급하기로 했다. 완제품 가격을 낮추는 정책이 공장과 원료의약품, 중국·인도에 집중된 공급망의 위치까지 건드리고 있다.
여기서 미국이 사용하는 가장 강력한 자원은 보조금만도, 관세만도 아니다. 시장 자체다.
세계 최대 의약품 시장에 접근하려는 기업은 미국이 만든 가격질서를 완전히 외면하기 어렵다. 미국에 공장을 짓고, 미국이 요구하는 가격체계에 참여하고, 미국의 공급망 전략 안으로 들어갈수록 관세와 시장 접근에서 유리한 조건을 얻는다. 법으로 공장 이전을 직접 명령하지 않아도 기업이 스스로 미국을 선택하도록 경제적 조건을 바꾸는 방식이다.
시장경제에서 기업은 자유롭게 선택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선택지마다 붙어 있는 비용이 달라지면 자유의 방향도 달라진다. 미국은 지금 바로 그 비용을 설계하고 있다. 어디에서 생산할지, 어떤 가격으로 판매할지, 어느 공급망에 들어갈지를 기업이 결정하지만 각 선택에 붙은 관세와 시장 접근 조건은 국가가 정한다.
신약 개발에서는 정반대처럼 보이는 일이 진행된다. 가격에는 강한 압력을 가하면서 개발 과정에서는 비용을 줄여준다. 미국 식품의약국(FDA)은 동물시험을 AI 기반 독성예측 모델과 오가노이드 등 신접근법(New Approach Methods·NAMs)으로 단계적으로 전환하고 있다. 임상시험계획(IND) 신청 단계부터 이런 데이터를 활용할 수 있도록 했고, 비인간영장류 시험을 축소하거나 폐지하는 방향의 가이던스도 구체화됐다.
HHS의 ‘오퍼레이션 트라이얼 블레이저(Operation Trial Blazer)’는 IND 신청부터 임상 1상 개시까지 준비기간을 6~12개월 줄이는 프로그램을 담고 있다. 여러 치료제와 적응증, 시험군을 함께 평가하는 마스터 프로토콜 개편도 진행됐다.
제약산업에서 1년은 단순한 시간이 아니다. 연구인력의 인건비이고, 생산시설의 유지비이며, 다음 투자유치까지 버텨야 하는 자본이다. 동시에 특허가 보호해주는 상업화 기간의 일부이기도 하다. 신약 개발에서 시간을 줄이는 일은 기업의 비용 구조를 바꾸는 것과 다르지 않다.
미국 정책을 가격통제로만 읽으면 이 부분이 빠진다. 약의 판매가격에서는 기업이 양보하도록 만들면서 연구개발 과정에서는 시간을 돌려주는 구조다. 높은 가격만으로 혁신을 보상하는 대신 개발기간과 관세, 시장 접근성이라는 다른 자원을 이용해 기업의 손익계산을 바꾸고 있다.
보건의료 데이터도 같은 방향으로 움직인다. 전국 단위 정보교환 체계인 TEFCA를 통한 데이터 교환 건수는 1년 안에 1000만건에서 10억건 이상으로 늘었다. 전자건강기록과 실사용데이터가 의료기관과 보험자 사이를 더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 기반이 커진 것이다.
21세기 바이오산업에서 데이터는 단순한 기록이 아니다. 환자의 치료 결과와 부작용, 약물 반응이 축적되면 다음 임상시험의 설계가 바뀌고 새로운 적응증이 만들어질 수 있다. 실험실에서 발견한 물질이 병원으로 가고, 병원에서 축적된 정보가 다시 연구실로 돌아오는 시간이 짧아질수록 신약 개발의 속도도 달라진다.
미국이 줄이려는 것은 규정의 숫자보다 산업이 기다리는 시간에 가깝다. 비임상에서는 동물시험의 일부를 AI와 오가노이드로 옮기고, 임상에서는 IND 이후의 준비기간을 줄이며, 의료현장에서는 데이터의 이동량을 늘린다. 연구와 임상, 실제 치료 사이에 놓여 있던 시간의 벽을 여러 방향에서 낮추는 방식이다.
모든 규제를 풀고 있는 것도 아니다. 위험한 기능획득 연구(Dangerous Gain-of-Function Research·DGOF)에 대해서는 연방 지원을 전면 금지하는 정책이 나왔고, 식품첨가물 GRAS 제도에는 제조사의 안전성 신고를 의무화하는 방안이 추진되고 있다. 산업의 속도를 높일 수 있는 영역과 생명안전 위험이 큰 영역을 나눠 규제의 무게를 다시 배치하는 모습이다.
미국의 바이오헬스 정책에서 눈여겨볼 대목은 규제가 많아졌느냐 적어졌느냐가 아니다. 규제가 산업의 어느 부분에서 시간을 빼고, 어느 부분에서 책임을 더하는지가 달라지고 있다.
이 변화는 국가와 기업의 관계도 바꾼다. 과거 산업정책에서 국가는 공장 건설에 보조금을 지급하고, 기업은 제품을 만들어 시장에서 경쟁했다. 지금 미국은 더 안쪽으로 들어간다. 약의 가격, 임상시험의 절차, 연구에 쓰는 데이터의 형태, 공장의 위치까지 서로 연결한다.
국경의 의미도 달라지고 있다. 과거의 무역장벽은 항구나 세관에서 만나는 관세였다. 바이오헬스산업에서는 국경이 연구실 안으로 이동하고 있다. FDA가 어떤 비임상 데이터를 받아들이는지, 미국 병원의 데이터가 어떤 형식으로 움직이는지, 어떤 가격협약에 참여하는지가 시장 접근의 조건이 된다.
한국 제약·바이오산업이 마주한 변화도 이 대목에서 무거워진다. 미국은 특허의약품에 최대 100% 관세를 부과하는 체계를 도입했고 한국에는 15% 우대세율이 적용됐다. 바이오시밀러와 제네릭은 당분간 면제됐지만 제네릭 면제는 2027년 4월까지 미국 상무부가 다시 검토한다. 온쇼어링만 약속한 기업에는 20%, MFN 협약까지 체결한 기업에는 0%를 적용하는 구조도 제시돼 있다.
공장의 위치가 기업의 원가 문제에서 시장 접근의 문제로 이동하는 이유다. 한국에서 가장 효율적으로 생산한 제품이 미국 국경을 넘는 순간 가격경쟁력을 잃을 수 있고, 상대적으로 생산비가 높더라도 미국 안에서 만든 제품이 관세와 정책 유인으로 더 유리해질 수 있다.
체외진단기기(In Vitro Diagnostics Device·IVD)의 긴급사용승인도 2026년 12월 26일 종료될 예정이다. 코로나19 기간의 예외적 시장 접근이 끝나면서 정식 허가체계로 들어가야 하는 기업도 생긴다.
한국 기업에 필요한 변화는 미국 공장을 하나 더 짓는 문제보다 넓다. 연구개발은 FDA가 받아들이는 새로운 증거체계에 맞춰야 하고, 임상전략은 미국이 단축하고 있는 시간표를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생산과 가격, 통상, 데이터 전략도 서로 다른 부서의 업무로 남겨두기 어려워지고 있다.
바이오헬스산업의 경쟁력은 오랫동안 좋은 물질을 발견하는 능력에서 출발했다. 이제 좋은 물질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얼마나 빨리 검증할 수 있는지, 어느 시장의 데이터를 연결할 수 있는지, 어디에서 생산하고 어떤 가격으로 공급할 것인지까지 하나의 경쟁력이 된다.
미국은 이 모든 요소를 하나의 산업 질서로 묶고 있다.
여기에는 더 근본적인 변화가 있다. 시장은 더 이상 정책이 작동하는 마지막 장소가 아니다. 정책을 실행하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 되고 있다. 기업에 무엇을 하라고 명령하는 대신 세계 최대 시장에 들어오는 조건을 바꾼다. 시장에 접근하려는 기업들이 스스로 공장을 옮기고 가격을 낮추며 연구방식을 바꾸도록 만든다.
약값을 낮추고도 기업 투자를 끌어들이며, 규제를 바꾸면서 개발시간을 줄이는 미국의 방식은 단순한 보건정책으로 읽기 어렵다. 가격과 기술, 통상과 공급망을 하나의 체계로 다루는 산업전략에 가깝다.
세계 바이오헬스 경쟁에서 가장 강한 국가는 반드시 가장 많은 신약을 가진 국가만은 아닐 수 있다. 어떤 신약이 어떤 가격으로 팔리고, 어떤 데이터로 검증되며, 어느 공장에서 생산되는지를 결정하는 규칙을 설계할 수 있는 국가도 강하다.
2026년 미국이 보여주는 힘은 바로 여기에 있다. 약을 사는 시장의 크기를 이용해 약이 만들어지는 방식까지 바꾸고 있다. 바이오헬스산업에서 미국이라는 ‘시장’은 이제 판매가 끝나는 곳이 아니라 연구와 생산, 가격과 공급망의 방향이 시작되는 곳으로 바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