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창호, 영화와 인생③] 케냐 주재원에서 ‘바람불어 좋은날’ 조감독으로

수출 전선의 종합상사맨에서 충무로 연출부로…‘어둠의 자식들’까지, 도시의 그늘을 배우다

2026-09-14     박준식 기자

[KtN 임우경 · 박준식기자]1978년 케냐 암보셀리 국립공원. 넓게 펼쳐진 초원을 등지고 스물다섯 살의 배창호가 서 있다. 연세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현대종합상사에 입사한 청년은 당시 영화인이 아니라 아프리카에 파견된 종합상사 주재원이었다.

영화를 향한 꿈을 간직하고 있었지만, 현실에서 먼저 선택한 길은 기업이었다. 대학 졸업반 때 직접 쓴 시나리오를 들고 여러 영화사를 찾아갔으나 영화 제작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졸업반 때 시나리오를 들고 영화사를 몇 군데 돌아다녔습니다. 너무 성급했죠. 모든 일에는 때와 시기가 있는데 젊었을 때는 그걸 잘 몰랐습니다.”

1978년 현대종합상사 케냐 지사 근무 시절 암보셀리 국립공원에서 촬영한 배창호 감독. 사진=배창호 감독 제공,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1970년대 후반 한국 경제는 수출 확대를 국가 성장의 중심에 놓고 있었다. 1975년 도입된 종합무역상사 지정제도 아래 대기업들은 해외 지사망을 넓히며 새로운 시장을 찾았다. 세계 시장의 정보 수집과 판로 개척을 담당한 종합무역상사는 당시 산업화의 최전선으로 불렸다.

현대종합상사는 1976년 설립됐다. 배 감독은 인터뷰에서 “현대종합상사 1기 공채로 입사해 케냐의 1인 지사원으로 갔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한국 기업의 해외 진출이 본격화하던 시기, 아프리카 근무는 경영학을 전공한 청년에게 안정된 직장과 드문 해외 경험을 함께 보장하는 자리였다.

케냐에서의 삶은 어린 시절 극장에서 보았던 세계를 현실의 풍경으로 바꾸어 놓았다. 영화 속에서만 접했던 넓은 대륙과 낯선 사람들을 직접 만났지만, 영화에 대한 생각까지 사라지지는 않았다. 배 감독이 회사를 떠나기로 한 계기는 충무로에서 들려온 한 감독의 복귀 소식이었다.

1974년 ‘별들의 고향’으로 한국 영화계에 센세이션을 일으킨 이장호 감독과, 그의 뒤를 이어 한국 영화의 전성기를 이끈 배창호 감독의 특별한 인연. /사진=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최인호의 추천서, 이장호와의 인연

배 감독이 이장호 감독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케냐로 떠나기 전이었다. 영화 일을 하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소설가 최인호가 추천서를 써줬다고 한다. 이장호 감독은 배 감독의 고교 선배이기도 했다.

1974년 ‘별들의 고향’으로 데뷔한 이장호 감독은 최인호의 원작을 당대적인 감각으로 옮기며 한국영화계의 주목을 받았다. 이후 한동안 연출 활동을 중단했던 이 감독이 다시 영화 작업에 나선다는 소식이 케냐에 있던 배창호에게 전해졌다.

배 감독은 안정된 종합상사 생활을 내려놓고 귀국했다. 회사에서 쌓을 수 있었던 경력과 생활 기반을 뒤로하고, 감독이 될 수 있다는 보장이 없는 충무로 연출부를 택한 것이다.

영화 현장에 들어왔다고 곧바로 확신이 생긴 것은 아니었다. 인터뷰 도중 “연출부 생활이 행복했느냐”는 질문을 받은 배 감독은 짧게 답했다.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농담이 섞인 대답이었지만 당시의 현실은 가볍지 않았다. 조감독의 수입은 많지 않았고 영화 전공 교육을 받지 않은 배 감독에게는 자신의 재능을 입증할 기회도 없었다.

“영화를 전공하지 않았고 독학으로 준비했는데, 제 재능은 검증받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실패하면 미래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회사를 그만두고 영화 조감독이 됐다는 말을 들은 한 선배는 “창호야, 너 깡통 찬다”고 말했다. 걱정에서 건넨 말이었지만 배 감독에게는 영화계에서 살아남지 못할 수 있다는 경고로 남았다.

“한번 해보고 인정받거나 성공하면 계속하고, 그렇지 않으면 재능이 없는 사람이니 그만두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배창호가 조감독으로 참여한 첫 작품은 이장호 감독의 ‘바람불어 좋은날’이었다.  /사진=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개발의 빛보다 그늘을 비춘 ‘바람불어 좋은날’

배창호가 조감독으로 참여한 첫 작품은 이장호 감독의 ‘바람불어 좋은날’이었다. 1980년 제작된 이 영화는 최일남의 중편소설 ‘우리들의 넝쿨’을 바탕으로, 서울의 개발 지역에서 살아가는 세 청년의 삶을 그렸다.

중국집 배달원 덕배와 여관 종업원 길남, 이발소 보조 춘식은 농촌을 떠나 서울에 왔지만 개발의 성과를 나누는 주역이 되지는 못한다. 고층 건물과 부동산 개발이 빠르게 번지는 도시에서 세 청년은 일자리와 사랑, 정착할 곳을 찾아 헤맨다.

한국영상자료원은 ‘바람불어 좋은날’을 사회비판적 리얼리즘의 대표작으로 평가한다. 산업화와 도시화가 성공의 언어로 기록되던 시절, 이장호 감독의 카메라는 개발 과정에서 밀려나는 원주민과 도시 하층 청년들의 생활을 향했다. 암울한 현실만 강조하기보다 해학과 온기를 함께 담은 연출은 이후 한국영화의 현실주의 흐름에도 영향을 미쳤다.

케냐에서 기업의 해외 진출을 경험했던 배창호는 귀국 후 서울 개발지의 이면을 다룬 영화 현장에 섰다. 경제 성장의 바깥과 안쪽을 연이어 통과한 경험이었다.

1980년 조감독 시절 촬영 현장. 카메라 옆은 이장호 감독이며 화면 오른쪽은 배창호 감독이다. 사진=배창호 감독 제공,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사진 속 배창호는 카메라 오른쪽에 서서 촬영 현장을 지켜보고 있다. 대학 연극 무대에서 배우와 연출을 익혔던 청년이 실제 영화 제작의 언어와 질서를 배우기 시작한 때였다.

이듬해에는 이장호 감독의 ‘어둠의 자식들’에 조감독으로 참여했다. 이동철의 원작을 영화화한 작품으로, 성매매 집결지에서 살아가는 영애의 삶을 따라간다. 나영희가 영애를 연기했고 안성기·김희라·이대근 등이 출연했다.

‘바람불어 좋은날’이 도시 개발의 변두리에 놓인 청년들을 바라봤다면, ‘어둠의 자식들’은 도시의 가장 낮은 곳에서 생존하는 여성의 삶으로 들어갔다. 경제성장의 속도와 도시의 화려함 뒤에 가려졌던 사람들을 영화의 중심으로 불러낸 작품들이었다.

두 편의 조감독 경험은 촬영 기술과 제작 절차를 익히는 수업에 머물지 않았다. 가난한 인물을 구경거리로 소비하지 않는 태도, 고통 속에서도 인간의 존엄과 웃음을 발견하는 시선이 이 시기에 축적됐다. 배창호의 데뷔작 ‘꼬방동네 사람들’이 도시 빈민의 삶에서 출발한 배경도 이장호 감독의 두 작품과 분리해 보기 어렵다.

조감독 생활을 이어가던 배창호는 다시 시나리오를 썼다. /사진=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정오의 미스터 리’, 감독의 가능성을 알리다

조감독 생활을 이어가던 배창호는 다시 시나리오를 썼다. 작품명은 ‘정오의 미스터 리’. 당시 영화진흥공사 시나리오 공모에 당선되면서 감독 지망생 배창호의 이름이 영화계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대학 졸업반 때 영화사 문을 두드렸던 시나리오는 제작되지 못했지만, 충무로 현장을 경험한 뒤 쓴 작품은 공식적인 평가를 받았다. 이장호 감독의 조감독이라는 경력도 비교적 이른 감독 데뷔에 힘을 보탰다.

1978년 암보셀리에서 찍은 사진과 1980년 영화 현장의 사진 사이에는 2년의 시간이 놓여 있다. 첫 번째 사진에서 배창호는 한국 기업의 아프리카 진출을 담당하는 주재원이었다. 두 번째 사진에서는 이장호 감독과 카메라 곁에 서 있다.

안정된 직장을 떠난 선택이 곧 성공을 보장하지는 않았다. 낮은 보수와 불확실한 미래, 검증되지 않은 재능에 대한 두려움이 뒤따랐다. 배창호는 그 불안을 시나리오와 현장 경험으로 통과했다. ‘바람불어 좋은날’과 ‘어둠의 자식들’에서 도시의 주변부를 배운 조감독은 1982년 ‘꼬방동네 사람들’로 자신의 이름이 적힌 첫 영화를 내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