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카텔란의 시대…권위의 크기를 줄이고, 확신의 자리를 흔들다

베를린 ‘Night’에서 다시 읽는 마우리치오 카텔란의 30년 장소 특정적 설치와 비선형 큐레이션, 신체적 관람으로 이동하는 2026년 전시 흐름과 맞물린 오래된 문법

2026-09-16     임민정 기자
Welcome to Maurizio Cattelan’s “Church” of Failure. 사진=Neue Nationalgalerie,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KtN 임민정기자]베를린의 브란덴부르크문이 작아졌다. 도시 한복판에서 사람을 압도하던 기념물은 노이에 나치오날갈레리(Neue Nationalgalerie) 안에서 몇 걸음이면 통과할 수 있는 크기가 됐다. 마우리치오 카텔란(Maurizio Cattelan)의 ‘Purgatory’다. 카텔란은 브란덴부르크문의 형태를 없애지 않고 크기만 줄였다. 사람이 기념물을 올려다보던 관계도 함께 달라졌다.

권위는 오랫동안 높이와 크기를 사용해왔다. 높은 단상과 거대한 궁전, 넓은 광장, 사람보다 큰 동상은 정치와 종교, 국가가 자신을 드러내는 오래된 방식이었다. 카텔란은 이런 권위에 새로운 상징을 맞세우기보다 원래 있던 대상의 크기와 위치를 바꾼다. 거대한 것은 작아지고, 아래에 있던 것은 위로 올라가며, 관람하는 사람과 관람 대상의 자리도 뒤집힌다.

베를린 노이에 나치오날갈레리에서 열리고 있는 ‘Night’에는 카텔란의 지난 30년 작업과 신작이 함께 들어왔다. 루트비히 미스 반 데어 로에(Ludwig Mies van der Rohe)가 설계한 유리홀도 별도의 장치로 가리지 않았다. 넓은 바닥과 높은 천장, 투명한 유리벽 사이에 작품을 흩어 놓으면서 건축 자체가 전시의 일부로 남았다.

전시 제목은 ‘Night’지만 공간은 어둡지 않다. 외부의 빛이 들어오고 유리벽 너머 도시도 보인다. 어둠을 재현하는 대신 카텔란은 익숙하다고 믿었던 대상의 크기와 위치를 바꿔 판단의 순서를 흔든다. 보이는 것은 분명한데 의미는 한쪽으로 쉽게 정리되지 않는다.

Welcome to Maurizio Cattelan’s “Church” of Failure. 사진=Neue Nationalgalerie,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2001년작 ‘Him’에서는 작은 체구의 인물이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은다. 뒤에서 보면 어린아이처럼 보이지만 정면으로 돌아가면 아돌프 히틀러의 얼굴이 나타난다. 히틀러를 거대한 악의 기념물로 세우는 대신 몸을 줄이고 기도하는 자세를 부여했다. 관람객은 연약해 보이는 몸과 역사적 폭력의 얼굴을 한 작품 안에서 동시에 보게 된다.

‘Him’ 앞에서 불편함을 만드는 것은 충격적인 외형만이 아니다. 악을 멀찍이 세워두고 안전하게 혐오할 수 있는 거리를 없앴다는 데 있다. 기도라는 익숙한 몸짓과 히틀러라는 역사적 인물이 겹치면서 첫인상만으로 판단을 끝내기 어려워진다. 카텔란의 작업이 오랫동안 논쟁을 만든 배경도 이런 판단의 지연과 맞닿아 있다.

1997년작 ‘Novecento’의 말은 공중에 매달려 있다. 달리고 사람을 태우던 동물의 몸이 땅에서 떨어진 채 움직임을 잃었다. ‘People’의 비둘기들은 사람의 발밑이 아니라 높은 곳에 자리해 관람객을 내려다본다. 사람이 동물을 관찰하는 박물관의 익숙한 위치 역시 뒤집힌다.

카텔란의 작업을 ‘도발’이라는 한 단어로 설명하면 이런 변화가 잘 보이지 않는다. 벽에 바나나를 테이프로 붙인 ‘Comedian’이나 18캐럿 금으로 만든 변기 ‘America’는 강한 이미지로 대중에게 각인됐지만, 지난 30년 동안 반복된 방식은 사물의 위치와 위계를 바꾸는 일이었다. 교황은 쓰러졌고 히틀러는 무릎을 꿇었으며 말은 공중으로 올라갔다. 브란덴부르크문도 사람 가까운 높이로 내려왔다.

2026년 국제 전시 현장은 카텔란이 오래 사용해온 문법과 흥미롭게 겹친다. 작품을 흰 벽에 걸고 일정한 거리에서 바라보게 하는 방식과 함께 벽과 천장, 통로, 건물 전체를 전시에 포함하는 설치가 늘고 있다. 서울에서는 아트페어의 가벽을 해체해 구조물로 만들고, VIP 라운지 전체를 하나의 작업으로 바꾸고, 수천 개의 대나무 사이를 관람객이 직접 걷는 설치가 등장했다.

전시가 다루는 범위도 작품에서 공간으로 넓어졌다. 무엇을 보여주는가뿐 아니라 관람객을 어디에 세우고 어느 방향으로 이동시키는가가 전시 구성에 들어간다. 대형 스크린과 프로젝션으로 시야를 둘러싸는 디지털 몰입형 전시와 달리 실제 건축과 작품의 위치, 사람의 몸을 이용하는 방식도 동시에 확장되고 있다.

‘Night’에서 관람객은 같은 자세를 유지하기 어렵다. ‘Purgatory’를 통과하고, 공중에 매달린 말을 올려다보고, 높은 곳의 비둘기를 따라 고개를 든다. 작품 사이에는 넓은 빈 공간이 남아 있어 다음 작업까지 직접 걸어가야 한다. 관람객의 이동과 시선의 방향이 작품 감상에서 빠지지 않는 구조다.

Welcome to Maurizio Cattelan’s “Church” of Failure. 사진=Neue Nationalgalerie,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작가의 시간을 정리하는 방식도 달라졌다. ‘Night’에는 1990년대와 2000년대 작업, 2026년의 신작이 제작연도 순서와 무관하게 함께 놓였다. 초기작에서 대표작을 거쳐 최근작으로 이동하는 전통적인 회고전보다 죽음과 권위, 종교와 역사적 기억처럼 반복되는 요소가 서로 다른 시기의 작품을 연결한다.

25년 전 제작된 ‘Him’도 2001년에 머물지 않는다. 작품은 그대로지만 2026년 독일에서 다시 히틀러의 얼굴을 마주하는 관객은 제작 당시와 다른 정치적 시간을 살아간다. 미술작품의 제작일은 변하지 않지만 작품을 둘러싼 사회는 계속 변한다. 오래된 작품을 다시 전시하는 일은 과거를 복습하는 것보다 현재가 과거를 새로 읽는 작업에 가까워진다.

‘카텔란의 시대’라는 표현도 이 지점에서 성립한다. 카텔란이 장소 특정적 설치나 비선형 전시, 관람객의 신체를 끌어들이는 방식을 처음 만든 작가라는 뜻은 아니다. 지금의 전시장과 사회가 카텔란이 오랫동안 다뤄온 문제와 가까워지고 있다는 의미에 가깝다.

우리는 어느 때보다 빠르게 판단한다. 짧은 영상과 제목, 몇 줄의 문장으로 사람과 사건의 위치를 정하고 정치와 문화에서도 찬성과 반대를 먼저 요구하는 경우가 많다. 판단이 빨라질수록 모호함이 머물 자리는 줄어든다. 카텔란의 작업은 반대로 익숙한 대상을 남겨둔 채 위치 하나를 옮겨 결론에 도달하는 시간을 늦춘다.

Welcome to Maurizio Cattelan’s “Church” of Failure. 사진=Neue Nationalgalerie,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작아진 브란덴부르크문 앞에서는 기념물이 어떤 방식으로 권위를 얻는지 다시 보게 된다. 기도하는 히틀러 앞에서는 선과 악을 구분하는 도덕적 판단과 인간의 형상을 바라보는 감각이 충돌한다. 죽은 말 앞에서는 움직임과 정지, 생명과 소진의 간격이 남는다. 작품이 정답을 제시하기보다 판단을 시작했던 기준을 다시 살피게 만든다.

모호함 자체를 미덕으로만 볼 수는 없다. 모든 충돌을 관람객의 해석에 맡기면 작가의 책임도 쉽게 사라진다. 도발이 반복되면 하나의 브랜드가 되고 불편함도 미술시장에서 거래되는 스타일로 바뀔 수 있다. ‘Comedian’ 이후 카텔란의 이름이 작품과 가격, 미디어와 유명세가 결합하는 미술시장의 중심에서 움직여왔다는 사실도 함께 봐야 한다.

그래서 ‘Night’에서는 새로운 충격을 얼마나 만들었는가보다 기존 작품을 어떻게 다시 놓았는지가 더 중요하다. 미스의 건축을 가리지 않았고 과거 작품을 연대기 속에 가두지도 않았다. 작품을 한 방향으로 따라가도록 전시장을 잘게 나누는 대신 관람객이 넓은 공간을 움직이도록 두었다. 오래된 작품의 위치를 바꾸는 방식만으로도 30년의 작업은 다시 현재의 시간으로 들어왔다.

Welcome to Maurizio Cattelan’s “Church” of Failure. 사진=Neue Nationalgalerie,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노이에 나치오날갈레리의 유리홀은 투명하다. 안에서 밖이 보이고 밖에서도 내부를 볼 수 있다. 숨겨진 것이 없는 듯한 건축 안에 카텔란은 의미를 한쪽으로 고정하기 어려운 작품을 놓았다. 많이 보인다고 판단까지 단순해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 투명한 건축과 불확실한 이미지 사이에서 드러난다.

2026년의 전시장에서는 벽이 해체되고 작품이 천장과 통로, 건물 밖으로 움직인다. 연대기는 느슨해지고 관람객의 몸은 작품 사이로 들어간다. 형식은 이전보다 자유로워졌지만 카텔란의 작업은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작품 안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자신의 확신 밖으로 나가는 일이 더 어렵다는 사실을 남긴다.

베를린의 유리홀 한가운데에는 작은 브란덴부르크문이 서 있다. 모양은 익숙하고 크기만 달라졌다. 카텔란이 지난 30년 동안 반복한 일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미 알고 있다고 믿었던 것의 크기와 위치를 조금씩 옮겨놓고, 그 변화 앞에서 판단을 다시 시작하게 했다.

권위의 높이가 낮아지고 보는 사람과 보이는 대상의 자리가 뒤집힌 뒤 남는 것은 거대한 선언이 아니다. 익숙했던 판단을 곧바로 확정하지 못하는 짧은 시간이다. 확신이 넘치는 시대에 카텔란이 다시 현재형으로 읽히는 이유도 그 망설임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