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혜자, 빛의 60년①] ‘지심’에서 시작된 추상…1961년 파리로 간 방혜자
‘서울풍경’의 구상에서 석굴암 인상의 비재현 회화로 앵포르멜의 거친 물성·프레스코와 이콘화 실험 거치며 평생 이어질 ‘빛’의 출발점 형성
[KtN 박준식기자]1958년 ‘서울풍경’에는 서울의 건물과 지붕이 남아 있다. 불과 3년 뒤 ‘지심(地心)’에서는 알아볼 수 있는 풍경이 거의 사라진다. 짙은 갈색과 청색, 검은색에 가까운 어둠이 겹치고 그 사이에 밝은 색이 들어선다. 후기 방혜자를 대표하는 원형과 청록빛, 중심에서 사방으로 퍼지는 방사 구조는 아직 나타나지 않는다. 60여 년 동안 이어질 방혜자의 빛은 완성된 상징에서 출발하지 않았다. 물감을 쌓고 밀어내며 어둠과 밝음이 맞닿는 추상에서 먼저 모습을 드러냈다.
1937년 태어난 방혜자는 경기여고 시절 미술의 길을 택했고 1956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 진학했다. 대학 재학기에는 김병기와 유영국이 운영한 현대미술연구소에서도 작업했다. 전후 한국 미술에서 비구상과 앵포르멜이 새로운 조형 언어로 부상하던 시기였다. 초기 작품인 ‘서울풍경’에도 이미 두터운 마티에르와 분방한 붓질이 나타났다. 풍경을 그리면서도 화면의 무게가 대상의 정확한 묘사보다 물감의 질감과 색면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1961년 ‘지심’에서는 변화가 훨씬 선명해진다. 경주 여행과 석굴암에서 받은 인상에서 출발했지만 석굴암의 형태를 옮기지 않았다. 구체적인 대상 대신 갈색과 짙은 청색, 검은색이 뒤엉킨 공간을 만들고 가운데에는 노랑과 흰색에 가까운 밝은 색을 남겼다. 거칠게 쌓인 물감과 불규칙한 붓질 때문에 밝은 부분도 또렷한 광원으로 고정되지 않는다. 어둠 한가운데에서 색이 밀려 나오듯 나타난다. ‘지심’은 방혜자의 초기 작업에서 구상적 형태가 거의 사라진 대표적인 추상작으로 꼽힌다.
‘지심’을 후기 방혜자의 원형과 우주 이미지가 미리 들어 있는 작품으로 보는 데에는 주의가 필요하다. 1961년 작품에서 먼저 확인되는 것은 원이나 천체보다 마티에르다. 색은 깨끗한 면으로 나뉘지 않고 서로 뒤섞이고, 붓질의 방향과 물감의 두께가 공간을 만든다. 후기 작품에서 빛이 중심부에 응축되고 바깥으로 번지는 구조와 닮은 부분을 찾을 수 있지만, 당시 방혜자가 다루던 조형 문제는 앵포르멜을 비롯한 전후 추상회화의 물질성과 더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었다. 국립현대미술관도 초기 ‘지심’에서 거친 마티에르와 추상에 대한 관심을 주요하게 짚는다.
제작연도를 한 해 앞당기면 프랑스 국립현대미술관 퐁피두센터가 소장한 ‘Au coeur de la Terre II’가 나온다. 1960년 제작된 유화로, 제목 역시 ‘대지의 중심’ 또는 ‘대지의 심장’에 해당한다. 퐁피두센터에는 이 작품과 1962년 무제 작품을 비롯해 1970년대부터 2020년까지 방혜자의 작업이 함께 소장돼 있다. ‘지심’의 관심이 한 점에서 우연히 나타난 것이 아니라 1960년 전후 이어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1961년은 작품과 활동 무대가 함께 바뀐 해였다.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서울 국립도서관에서 첫 개인전을 연 뒤 프랑스로 건너갔다. 같은 해 파리시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파리의 외국화가들’에도 참여했다. 프랑스 세르누치박물관은 방혜자를 1961년 프랑스 도착 이후 에콜 드 파리(École de Paris)의 흐름에 들어간 한국 작가로 다루고 있다. 당시 파리에는 이응노를 비롯해 한국에서 건너온 작가들이 새로운 추상 언어를 탐색하고 있었다.
파리행이 방혜자 추상의 시작은 아니었다. ‘서울풍경’의 마티에르와 ‘지심’의 비재현 회화가 이미 한국에서 만들어졌다. 프랑스에서 달라진 것은 추상의 존재 여부보다 실험할 수 있는 재료와 방법의 폭이었다.
1963년 파리 에콜 데 보자르(École des Beaux-Arts)의 프레스코 아틀리에에서 장 오잠(Jean Aujame)과 알베르 르 노르망(Albert Le Normand)에게 수학하기 시작했다. 1964년부터는 뫼동의 러시아 연구센터에서 이콘화도 익혔다. 이후 스테인드글라스와 판화로 작업 영역을 넓혔다. 캔버스에 유화만 올리는 방식에서 벗어나 벽과 모래, 석회, 서로 다른 표면과 빛을 접하는 경험이 1960년대 파리 생활에 축적됐다.
이 시기의 회화에서는 사포 같은 비회화 재료도 등장했다. 1961년 무제 작품에는 유화와 사포가 함께 사용됐고, 1960년대 후반으로 가면 가죽 등 다른 물질까지 작품에 들어온다. 방혜자는 물감의 색만 바꾸기보다 표면 자체를 달리하면서 밝음과 어둠, 매끄러움과 거침, 깊고 얕은 공간을 만들었다. 1970년대 한지를 만난 뒤 재료가 작업 전체를 바꾸게 되는 과정도 이런 초기 물질 실험과 단절돼 있지 않다.
1965년 ‘빛’에서는 평생 지속될 단어가 작품 제목으로 전면에 등장한다. 거친 마티에르와 드리핑, 표면을 긁은 흔적, 나이프로 문질러 만든 매끄러운 부분이 한 작품에 함께 놓인다. 밝음과 어둠이 색채 대비로만 갈리지 않고 표면의 두께와 질감 차이에서도 만들어진다. ‘빛’이라는 제목을 사용했다고 해서 이후의 생명·우주·마음에 관한 사유가 이 시점에 모두 완성됐다고 볼 수는 없다. 오히려 빛을 회화의 물질로 어떻게 드러낼 것인가를 시험하던 단계에 가깝다.
‘지심’과 ‘빛’ 사이의 4년을 놓고 보면 방혜자의 초기 변화가 더 뚜렷하다. ‘지심’에서는 밝음이 짙은 색 사이에 좁게 놓여 있다. ‘빛’에서는 서로 다른 질감과 기법이 작품 전반으로 퍼진다. 밝은 곳과 어두운 곳을 나누는 것보다 물감 자체가 빛을 받아들이는 상태를 달리하는 쪽으로 실험이 확장됐다.
후기의 방혜자를 먼저 알고 초기 작품을 보면 청록색이나 원형, 명상과 우주의 이미지를 거꾸로 찾아내기 쉽다. 1960년대 방혜자는 아직 한지의 흡수성도, 루시용 황토의 입자도, 부직포를 통과하는 천연안료도 만나기 전이었다. 작품 앞에 놓인 문제는 훨씬 물질적이었다. 유화를 얼마나 쌓을 것인지, 어느 부분을 긁을 것인지, 사포 같은 다른 표면을 어떻게 결합할 것인지가 그림을 바꾸고 있었다.
1967년 파리에서 현지 첫 개인전을 열었고, 이듬해 한국으로 돌아왔다. 프랑스에서 익힌 추상과 재료 실험을 내려놓고 한국적인 양식으로 돌아선 것은 아니었다. 파리에서 확보한 물질에 대한 관심을 유지한 채 한국의 자연과 전통, 종이를 새롭게 만나게 된다. 국립현대미술관은 1968년부터 8년 동안 한국에 머문 시기를 고대의 아름다움과 한국의 기운을 연구하고, 이후 주요 재료가 되는 한지의 물성을 다시 발견한 중요한 전환기로 정리한다.
방혜자의 60년을 ‘빛의 화가’라는 이름만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초기 회화가 후기의 준비 과정으로 축소될 수 있다. ‘서울풍경’에서 ‘지심’, 다시 ‘빛’으로 이어지는 1950~60년대 작업에는 당시 한국과 파리에서 움직이던 추상미술의 긴장, 두꺼운 유화와 사포를 다루는 손, 서로 다른 표면에서 밝음이 발생하는 과정이 먼저 있었다.
‘지심’이 남기는 출발점도 여기에 있다. 방혜자의 빛은 처음부터 원형의 광휘로 완성돼 있지 않았다. 땅을 떠올린 어두운 추상 속에서 밝은 색이 생겨났고, 파리에서는 그 밝음을 만들기 위해 물감과 표면을 계속 바꿨다. 이후 종이와 흙, 부직포까지 이어지는 긴 재료의 이동은 1960년대 이미 시작된 회화의 물성에 대한 집요한 탐구 위에서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