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혜자, 빛의 60년③] ‘별들의 노래’에서 하늘과 땅으로…우주가 열린 1980년대

자연의 음양·계절·오행에서 별과 성운, 존재의 사유로 확장 한지 앞뒤로 색을 겹치고 먹·아크릴릭·천연안료 실험…원형도 후기 회화의 중심으로 이동

2026-09-20     박준식 기자
방혜자, 천지에 마음의 빛 뿌리며 간다. 사진=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KtN 박준식기자]1987년 ‘별들의 노래’에는 땅과 하늘을 연상시키는 두 개의 영역이 맞닿아 있다. 아래쪽에는 갈색과 검은색이 밀집하고, 위쪽에는 청색과 청록빛이 넓게 퍼진다. 경계 사이로 밝은 형태가 굽이치며 지나간다. 별을 점이나 천체의 모습으로 직접 그리지 않았지만 작품 전체에는 위와 아래, 어둠과 밝음, 무거움과 가벼움이 동시에 놓인다. 1970년대 닥지를 만나 재료 안으로 빛을 끌어들였던 방혜자의 시선이 1980년대에는 땅의 물성에서 하늘과 별, 우주까지 넓어진다.

방혜자, ‘별들의 노래’, 1987, 한지 배접 캔버스에 먹·아크릴릭 물감·유화 물감, 116×81㎝, 방혜자재단. 짙은 갈색의 하부와 청록·청색의 상부 사이로 밝은 형상이 이어진다. 한지를 바탕으로 서로 다른 재료를 겹치며 대지와 하늘, 별과 빛의 관계를 확장한 1980년대 대표작. 사진=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1976년 다시 프랑스로 돌아간 뒤에도 한국에서 시작한 한지 작업은 계속됐다. 1980년대에는 자연의 음양과 계절, 오행에 대한 관심과 함께 원형의 모티프가 점차 작품에 등장했고, 천체와 성운, 새벽빛도 중요한 소재가 됐다. 방혜자의 빛이 개인의 내면과 자연에서 더 넓은 우주의 질서로 이동하는 시기였다.

재료를 다루는 방법도 깊어졌다. 세르누치박물관은 1980년대 방혜자가 한지의 앞면과 뒷면에서 색을 겹쳐 올리는 방법을 발전시키면서 안료의 층이 만드는 깊이를 작업의 중요한 원리로 삼았다고 설명한다. 유화 중심의 초기 작업에서 먹과 아크릴릭, 천연안료와 종이로 무게가 옮겨가기 시작한 것도 같은 시기다. 종이는 더 이상 색을 받치는 바탕이 아니라 빛의 깊이를 조절하는 재료가 됐다.

‘별들의 노래’에는 이러한 변화가 한 작품 안에 겹쳐 있다. 한지 위에 먹과 아크릴릭, 유화를 함께 사용하면서 어느 한 재료의 성질만 앞으로 나오지 않는다. 먹은 번지고, 유화는 밀도를 만들며, 아크릴릭은 상대적으로 빠르게 마르면서 층을 형성한다. 각기 다른 재료의 농도가 한지와 만나면서 색은 한 번에 결정되지 않고 여러 깊이로 남는다.

작품 아래쪽의 갈색도 단순한 배경색으로 머물지 않는다. 작은 점과 흔적이 촘촘하게 모여 대지를 떠올리게 하고, 위쪽의 푸른 영역은 넓게 열려 있다. 그 사이에 놓인 밝은 부분은 어느 한쪽에 속하지 않는다. 지상과 천상의 경계를 나누기보다 두 공간이 만나는 위치에 빛을 놓았다.

방혜자, 천지에 마음의 빛 뿌리며 간다. 사진=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1987년 프랑스 컬처(France Culture)와의 인터뷰에서 방혜자는 우주를 빛과 색, 에너지로 이루어진 것으로 설명하면서 검은색까지 빛의 일부로 보았다. 물질마다 빛이 나온다고 말한 대목도 남아 있다. ‘별들의 노래’의 짙은 갈색과 검은색을 단순한 어둠으로만 읽기 어려운 이유다. 방혜자에게 빛은 밝은 색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어두운 물질과 색의 진동까지 포함하는 개념으로 넓어지고 있었다.

이 시기의 우주는 밤하늘을 재현하는 공간과도 다르다. 별자리의 위치나 행성의 형태는 중요하지 않다. 색과 물질이 서로 다른 밀도로 모이고 흩어지면서 우주라는 감각을 만든다. 거대한 우주와 작은 색의 입자가 같은 작품 안에서 연결되는 후기 방혜자의 방식도 여기서 뿌리를 찾을 수 있다.

원형 역시 1980년대부터 점차 중요해졌다. 그러나 방혜자의 원을 태양이나 행성으로 하나의 의미에 고정하면 작품의 변화가 좁아진다. 원은 작품에 따라 천체처럼 보이기도 하고, 생명의 씨앗이나 에너지가 모이는 중심처럼 작동하기도 한다. 후기에는 중심에서 빛이 퍼지는 동심원 구조로 발전하지만 1980년대에는 아직 여러 조형 요소 가운데 하나로 변화하고 있었다. 자연의 순환과 오행, 천체에 대한 관심이 함께 깊어졌다는 기록도 원형이 하나의 도상보다 넓은 사고에서 나왔음을 보여준다.

1988년 ‘하늘과 땅과 손을 잡고’에서는 ‘별들의 노래’보다 경계가 한층 느슨해진다. 청록과 옅은 황토색, 살구빛이 서로 겹치고, 중앙의 갈색 형태도 주변 색과 완전히 분리되지 않는다. 위와 아래를 갈라놓던 구조가 여러 색층이 안쪽으로 스며드는 구성으로 바뀐다.

방혜자, ‘하늘과 땅과 손을 잡고’, 1988, 캔버스·닥지에 유화 물감, 195×130㎝,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옅은 청록과 황토빛, 살구색이 겹치면서 중앙의 형태와 주변 공간을 이어준다. ‘별들의 노래’에서 비교적 뚜렷했던 상하의 구분이 풀리며 하늘과 땅이 서로 스며드는 구조로 바뀐다.  사진=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두 작품은 불과 1년 차이지만 빛이 놓이는 방식은 다르다. ‘별들의 노래’에서는 대지와 하늘 사이의 밝은 영역이 두 공간을 잇는다. ‘하늘과 땅과 손을 잡고’에서는 특정한 빛의 띠보다 색 전체가 서로 침투하며 공간을 만든다. 빛이 어떤 한 부분에 있는 것에서 작품의 관계 전체로 옮겨가는 변화다.

작품 제목도 방혜자의 당시 사유와 맞물린다. 하늘과 땅을 서로 다른 두 세계로 세우지 않고 ‘손을 잡고’ 있는 관계로 놓았다. 방혜자의 회화에서 자연과 우주가 점차 대립의 구조에서 순환과 연결의 구조로 바뀌고 있음을 보여준다.

색의 변화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1961년 ‘지심’에서는 짙은 갈색과 청색이 강하게 충돌했고, 1972년 ‘부활의 노래’에서는 닥지의 밝은 색과 여백이 넓어졌다. 1988년에는 청록, 갈색, 살구빛이 서로를 완전히 밀어내지 않는다. 각각의 색이 주변 색을 일부 받아들이면서 경계를 남기고 동시에 흐린다.

방혜자, 천지에 마음의 빛 뿌리며 간다. 사진=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방혜자가 1980년대 자연을 바라본 방식은 동양 철학과 연결되지만 ‘동양적 우주관’이라는 말만으로 정리하는 것도 부족하다. 파리에서 익힌 추상회화와 마티에르, 한국에서 발견한 닥지, 먹과 서양 회화 재료가 이미 한 작업 안에 함께 들어와 있었다. 철학적 관심과 재료 실험이 별개로 움직인 것이 아니라 서로 영향을 주면서 작품의 공간을 바꿨다.

세르누치박물관은 방혜자의 초기 유화에서 중앙 색면의 밝기가 강조됐고, 이후 작품 전체가 점차 빛을 발하는 방향으로 변했으며 동시에 콜라주와 우주적 모티프가 나타났다고 분석한다. 특히 1980년대 한지 앞뒤에서 안료를 겹치는 제작법이 이후 작업의 중요한 토대가 됐다고 평가한다.

1988년 방혜자의 ‘무제’도 이런 변화가 한 작품에 그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퐁피두센터가 소장한 3폭 작업에는 유화와 천연안료, 구아슈, 한지가 함께 사용됐다. 세 폭을 이어 하나의 넓은 공간을 만들면서 재료와 색층을 확장했다. 해당 작품은 2024년 방혜자재단 기증으로 퐁피두센터 컬렉션에 들어갔다.

1989년 ‘Univers’에서는 천연안료와 한지가 전면으로 나온다. 작품명부터 ‘우주’를 가리킨다. 퐁피두센터 소장 기록에는 천연안료와 닥종이를 캔버스에 사용한 작품으로 등록돼 있다. 1980년대 후반 방혜자의 작업에서 우주가 제목과 재료 양쪽에서 보다 분명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방혜자, ‘Univers’, 1989, 캔버스에 천연안료·닥종이, 퐁피두센터 소장. 한지와 천연안료를 중심으로 우주적 공간을 전개한 1980년대 후반 작품으로, 다음 시기 천연안료와 자연 물질 연구가 본격화되는 흐름과 맞닿는다. 방혜자재단 기증, 2024. 사진 © Centre Pompidou, MNAM-CCI/Janeth Rodriguez-Garcia/Dist. GrandPalaisRmn.

‘Univers’까지 이어 놓으면 방혜자의 1980년대가 후기 회화의 단순한 준비기간이 아니었다는 사실도 분명해진다. 종이의 앞과 뒤를 오가며 색의 깊이를 만들고, 자연의 순환을 천체와 우주의 질서로 넓히며, 원형과 색의 입자를 새로운 조형 언어로 받아들인 시기였다.

‘별들의 노래’의 아래쪽에는 아직 대지의 무게가 강하다. ‘하늘과 땅과 손을 잡고’에서는 두 영역의 경계가 희미해진다. 1989년 ‘Univers’에서는 작품명 자체가 우주를 향한다. 몇 년 사이 방혜자의 공간은 땅에서 하늘로 올라간 것이 아니라 땅과 하늘을 함께 포함하는 쪽으로 넓어졌다.

방혜자의 1980년대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것은 ‘우주를 그렸다’는 사실보다 우주를 만드는 방법이 달라졌다는 데 있다. 한지의 앞과 뒤, 먹과 유화, 아크릴릭과 천연안료가 여러 층에서 만나며 깊이를 만들었다. 빛도 특정한 밝은 형태에서 점차 작품 전체에 퍼지는 상태로 이동했다.

방혜자, 천지에 마음의 빛 뿌리며 간다. 사진=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1980년대 말 방혜자는 천연안료를 작품의 주요 재료로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1990년대에는 자연에서 얻은 안료가 더 넓게 사용되고, 1996년부터는 프랑스 남부 루시용의 붉은 흙까지 작품 안으로 들어온다. 국립현대미술관은 1980년대 이어진 우주적 성찰이 이후 후기 작품의 빛으로 깊어졌다고 보고 있다.

‘별들의 노래’에서 시작해 ‘하늘과 땅과 손을 잡고’, ‘Univers’로 이어지는 흐름에는 방혜자의 우주가 만들어지는 과정이 담겨 있다. 별과 행성을 재현하는 대신 종이와 색, 물질의 층으로 하늘과 땅의 경계를 풀었다. 1990년대 방혜자는 여기에 한 걸음 더 나아가 색으로 그렸던 대지 대신 실제 자연에서 얻은 안료와 흙을 작품 속으로 가져오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