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혜자, 빛의 60년④] 흙에서 빛으로…천연안료·루시용 황토·부직포가 바꾼 회화

1990년대 천연안료 본격화, 1996년 루시용 붉은 흙·1997년 부직포로 재료 확장 ‘비상’과 ‘물성과 빛’에서 색의 스밈·배채법·수평 작업이 만든 새로운 깊이

2026-10-08     박준식 기자
방혜자, ‘비상’, 2000, 부직포에 천연안료, 197×144㎝, 랄린 라흐마트 샤 소장. 옅은 바탕에 남청·보라 계열의 어두운 흔적과 갈색·주황빛이 흩어지고 겹치며 서로 다른 깊이를 만든다. 한지에서 이어온 색의 스밈을 부직포와 천연안료로 확장한 2000년 작업이다. 사진=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KtN 박준식기자]2000년 ‘비상’에는 1960년대 방혜자의 두꺼운 유화와 다른 물성이 자리한다. 옅은 바탕 위로 남청과 보랏빛에 가까운 어두운 흔적이 불규칙하게 번지고, 갈색과 주황빛이 사이사이 스며든다. 형태를 단단한 윤곽으로 묶기보다 밝고 어두운 색이 서로 다른 깊이에서 겹치며 공간을 만든다. 캔버스를 덮던 물감의 두께보다 천의 섬유와 안료가 만나며 만들어내는 스밈과 흔적이 앞으로 나온다. 1990년대 천연안료를 본격적으로 사용한 방혜자는 1996년부터 프랑스 남부 루시용(Roussillon)의 붉은 흙을 작품에 들였고, 1997년에는 부직포까지 작업 재료로 넓혔다.

방혜자, ‘비상’, 2000, 부직포에 천연안료, 197×144㎝, 랄린 라흐마트 샤 소장. 옅은 바탕에 남청·보라 계열의 어두운 흔적과 갈색·주황빛이 흩어지고 겹치며 서로 다른 깊이를 만든다. 한지에서 이어온 색의 스밈을 부직포와 천연안료로 확장한 2000년 작업이다.  사진=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1990년대 들어 방혜자의 재료 연구는 색을 이루는 물질 자체로 깊어졌다. 한지를 접고 구기고 다시 펼치면서 색이 섬유 안으로 스며드는 과정을 오래 다뤘고, 천연안료를 본격적으로 사용하면서 안료의 입자와 농도까지 회화의 일부로 끌어들였다. 1992년 ‘제목 없음’에는 아크릴릭 물감과 닥지, 먹, 천연안료, 파스텔이 함께 사용됐다. 서로 다른 재료가 지닌 흡수성과 농도, 표면의 차이가 겹치면서 한 가지 색 안에서도 여러 층의 깊이가 생겨났다.

1993년 ‘정관묘오(靜觀妙悟)’에서는 종이와 천연안료로 구성한 원형이 등장한다. 적갈색 원 안쪽에 서체가 놓이고, 천연안료의 색과 사유의 언어가 하나의 구성 안에서 만난다. 1980년대 ‘별들의 노래’와 ‘하늘과 땅과 손을 잡고’에서 대지와 하늘, 우주로 넓어졌던 시선은 1990년대 들어 색을 이루는 물질과 내면의 집중으로 한층 깊어진다.

방혜자, ‘정관묘오(靜觀妙悟)’, 1993, 종이에 천연안료, 40×40㎝, 적갈색 원과 서체를 간결하게 배치하면서 천연안료의 색과 내면의 성찰을 한 구성 안에 담았다. 사진=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1996년부터 사용한 루시용의 붉은 흙은 방혜자의 재료 연구에 새로운 층을 더했다. ‘지심’과 ‘별들의 노래’ 등 이전 작업에서도 갈색과 황토빛은 반복됐지만, 이 시기부터는 대지를 연상시키는 색과 함께 실제 흙의 입자가 작품 안으로 들어왔다. 자연의 색을 회화로 옮기는 단계에서 자연을 이루는 물질 자체를 작업의 재료로 받아들이는 변화였다. 1997년부터 사용한 부직포는 다시 색이 머물고 통과하는 방식을 바꾸면서 후기 회화의 중요한 지지체로 자리 잡았다.

루시용의 황토는 산이나 들의 외형을 재현하기보다 종이와 안료 사이에서 색의 밀도와 빛을 조절하는 물질로 작용했다. 흙의 미세한 입자가 안료와 섞이고 종이에 스며들면서 표면에는 균질한 색면 대신 미묘한 농담이 생긴다. 같은 황토빛 안에서도 밝고 어두운 부분이 갈리고, 종이의 결에 따라 색이 머무는 깊이가 달라진다. 방혜자에게 자연은 묘사의 대상에서 재료의 성질과 생성 과정을 함께 받아들이는 회화의 조건으로 확장됐다.

1997년 이후 작업에 들어온 부직포는 한지와 다른 투과성과 섬유 구조를 제공했다. 닥지가 물과 안료를 품으며 주름과 섬유의 결을 드러낸다면, 부직포에서는 열린 섬유 사이로 안료가 스며들고 통과하면서 색의 퍼짐이 한층 자유로워진다. 방혜자는 닥지와 부직포 각각의 성질을 살리며 빛이 나타나는 경로를 넓혔다. 2000년 ‘비상’은 부직포와 천연안료의 결합이 방혜자의 조형언어로 자리 잡아가던 시기의 작업이다.

‘비상’의 밝음은 특정한 한 점에 모이기보다 작품 전반으로 분산된다. 남청과 보라 계열의 흔적이 위아래로 흩어지고, 갈색과 주황빛 사이로 옅은 바탕이 드러난다. 색이 머문 부분과 비워진 부분 사이에 여백이 생기면서 작품 전체에는 가벼운 상승감이 퍼진다. 제목에서 연상되는 비상의 움직임도 날개나 새의 형상보다 색의 방향과 밀도, 여백의 확산을 통해 형성된다.

방혜자, 천지에 마음의 빛 뿌리며 간다. 사진=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2000년대 초 부직포를 사용한 대형 작업에서는 전통 회화의 배채법(背彩法)을 응용한 제작 방식도 한층 적극적으로 이어졌다. 안료를 지지체의 뒤쪽에서 스며들게 하면 앞면에는 색이 직접 쌓였을 때와 다른 부드러운 밝음이 나타난다. 방혜자는 밝은 색을 표면에 덧붙이는 방식보다 지지체 안쪽을 통과한 색이 전면으로 배어나오도록 하면서 빛의 깊이를 만들었다. 후기 작품에서 작은 빛이 넓은 공간으로 퍼지거나 중심부에서 은은하게 응축되는 효과도 이런 재료와 제작 방식 속에서 형성됐다.

2001년 ‘우주의 빛’은 부직포에 유화 물감을 사용한 대형 작업이며, 같은 시기 ‘우주의 춤’에는 펠트와 천연안료가 쓰였다. 한지와 천연안료를 중심으로 한 작업에서 다시 부직포와 펠트, 유화 물감까지 조합을 넓히면서 지지체와 안료의 관계를 계속 새롭게 조정했다. 후기 회화의 빛은 하나의 고정된 재료에서 나온 결과보다 서로 다른 물질을 만나게 하며 얻은 긴 실험의 축적에 가깝다.

방혜자, 천지에 마음의 빛 뿌리며 간다. 사진=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부직포 작업은 제작 자세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캔버스를 세워 정면에서 그리던 방식에서 벗어나 지지체를 바닥에 수평으로 펼쳐놓고 작업하는 시간이 늘었다. 종이나 천의 주름, 안료가 흘러들어가는 방향과 머무는 깊이, 섬유가 물질을 받아들이는 속도가 작품의 결과에 직접 개입했다. 작가의 손과 재료의 성질이 함께 화면의 질서를 만드는 방식으로 작업의 리듬이 바뀌었다.

작업 전 이어온 명상과 기공도 이런 제작방식과 가까워졌다. 작품을 바닥에 펼쳐놓고 종이나 천을 만지며 안료가 스며드는 시간을 지켜보는 과정은 초기 유화의 빠르고 밀도 높은 붓질과 다른 호흡을 만든다. 후기 작업에서는 지지체를 다루는 행위와 내면을 가다듬는 시간이 자연스럽게 맞물리며 색과 빛의 생성 과정으로 이어졌다.

방혜자, 천지에 마음의 빛 뿌리며 간다. 사진=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2007년 ‘물성과 빛’은 방혜자의 재료 연구가 도달한 한 지점을 제목에 그대로 담는다. 세 점으로 구성된 작품에는 닥지와 천연안료, 루시용 황토가 함께 사용됐다. 청록 계열의 색이 아래쪽에서 넓게 올라오고, 위쪽에는 황토와 적갈색이 겹친다. 두 색이 만나는 경계 부근에는 금빛에 가까운 밝은 흔적이 번지며 서로 다른 색층을 이어준다. 경계는 날카롭게 갈리지 않고 안료가 스미고 겹치는 과정에서 밝음이 천천히 올라온다.

방혜자, ‘물성과 빛’, 2007, 닥지에 천연안료·루시용 황토, 41×31㎝ 3점, 청록과 황토·적갈색 계열이 서로 스며들고 경계 부근에 밝은 색이 겹친다. 닥지와 천연안료, 실제 흙의 입자가 만나 색층 안에서 빛의 깊이를 만들어낸다  사진=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물성과 빛’에서는 흙의 무게와 빛의 밝음이 하나의 표면에서 만난다. 닥지와 황토, 천연안료가 겹치며 물질 자체가 밝음을 만들어내고, 청록과 황토빛 사이에서 나타나는 밝은 부분은 색층의 안쪽에서 번져 나온 듯한 깊이를 갖는다. 대지에서 얻은 물질을 사용하면서도 작품은 점차 가볍고 투명한 감각으로 향한다.

2019년 파리 세르누치박물관에서 열린 방혜자 회고전의 제목 ‘Et la matière devint lumière’는 ‘그리고 물질은 빛이 되었다’는 뜻을 담고 있다. 방혜자가 평생 이어온 종이와 안료, 흙과 천의 실험을 빛이 생성되는 과정으로 압축한 제목이다. 빛은 작품의 외부에서 더해지는 효과보다 재료의 내부에서 태어나고 번지는 감각으로 자리했다.

세르누치박물관이 소장한 ‘물성과 빛’은 이런 작업의 흐름을 집약한다. 종이와 흙이라는 구체적이고 촉각적인 재료가 청록과 황토, 밝은 금빛의 층으로 이어지며 무게와 투명성을 함께 만든다. 정신적인 세계로 깊어질수록 재료의 존재감도 더 세밀해졌다. 종이의 섬유, 안료의 입자, 흙의 질감이 빛의 감각을 만들어내는 적극적인 요소로 자리 잡았다.

2000년 제작된 ‘Envols 2’ 역시 부직포에 안료를 사용한 작업으로 2024년 방혜자재단 기증을 통해 퐁피두센터 소장품이 됐다. 2009년 ‘Lumière de la terre’에도 부직포와 안료가 사용됐으며 같은 기증 컬렉션에 포함됐다. 부직포와 안료의 결합은 2000년대를 지나며 방혜자의 후기 회화를 지탱하는 중요한 제작 방식으로 이어졌다.

방혜자, 천지에 마음의 빛 뿌리며 간다. 사진=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1990~2000년대를 거치면서 ‘빛의 화가’라는 수식도 한층 구체적인 의미를 얻는다. 방혜자의 빛은 밝은 색 자체보다 종이와 흙, 부직포가 색을 받아들이고 통과시키는 과정에서 형성됐다. 물감이 표면을 덮는 대신 안료가 섬유 속으로 스며들고, 여러 층의 농담이 겹치면서 실제 광원 없이도 작품 안쪽에서 밝음이 올라오는 듯한 깊이가 생겼다.

1960년대 ‘지심’에서는 유화 물감의 짙은 밀도 속에서 빛을 끌어냈고, 1970년대에는 닥지가 색을 품으며 새로운 표면을 만들었다. 1980년대에는 하늘과 땅, 별과 우주의 관계가 작품의 공간을 넓혔다. 1990년대 이후 천연안료와 루시용의 흙, 부직포가 더해지면서 빛은 색채의 효과에서 물질이 생성하는 감각으로 한층 깊어졌다.

‘비상’에서 ‘물성과 빛’으로 이어지는 시간에는 방혜자의 후기 회화를 결정한 변화가 응축돼 있다. 빛을 표현하는 색을 찾는 데서 나아가 빛이 생겨날 수 있는 재료의 조건 자체를 만들어갔다. 흙은 대지의 색을 넘어 빛의 깊이를 조절하는 입자가 되고, 종이와 부직포는 색을 받는 바탕에서 안료를 품고 통과시키는 적극적인 물질로 바뀌었다. 방혜자의 손을 거친 종이와 흙, 천과 안료는 서로의 성질을 받아들이며 마침내 빛을 이루는 재료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