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혜자, 빛의 60년⑤] ‘하늘의 땅’에서 ‘빛의 기쁨’까지…중심과 입자로 변주한 후기 회화

2011년 원형 지지체 자체를 빛의 구조로, 2014년에는 색의 입자를 세로로 응축 2020년 ‘빛의 기쁨 I’에서 밝은 핵·동심원·방사선 결합…‘지심’ 이후 60년 가까운 변화 집약

2026-10-21     박준식 기자

[KtN 박준식기자]2011년 ‘하늘의 땅’은 작품의 외곽부터 이전과 다른 질서를 만든다. 사각의 틀을 벗어난 둥근 지지체 한가운데 밝은 중심이 자리하고, 주황과 붉은빛, 자주색과 청록이 여러 겹의 띠를 이루며 둘레로 번진다. 중심을 에워싼 가느다란 선은 사방으로 뻗으며 원 전체에 미세한 움직임을 만든다. 작품 안에 머물던 원은 지지체의 형태와 맞물려 회화 전체의 구조로 확장됐다. 1960년대 어두운 유화의 밀도 속에서 시작된 빛은 반세기를 지나 색과 선, 지지체의 형태까지 조직하는 조형 원리로 깊어졌다.

방혜자, ‘하늘의 땅’, 2011, 패널, 종이에 천연안료, 지름 179㎝,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 밝은 중심을 둘러싸고 붉은색과 청록 계열의 색띠가 겹치며 가느다란 선이 사방으로 뻗는다. 원형 지지체와 색의 확산이 하나의 구조를 이루는 방혜자의 후기 대표작이다.  사진=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방혜자는 원을 무한성과 순환을 품은 형태로 받아들이며 작업에 꾸준히 사용했다. ‘하늘의 땅’에서는 원이 지지체의 외곽까지 확장된다. 안쪽의 밝은 중심과 가장자리 사이에 여러 색이 겹겹이 놓이며 시선은 중심에서 둘레로, 다시 둘레에서 중심으로 움직인다. 시작과 끝이 맞물리는 원의 구조 속에서 하늘과 땅, 빛과 에너지가 하나의 순환으로 응축된다.

중앙에는 흰색에 가까운 밝음이 열려 있고 그 주변을 따뜻한 주황빛이 감싼다. 짙고 가느다란 선은 중심에서 외곽으로 촘촘하게 이어지며, 둘레로 갈수록 청록 계열의 색이 넓어진다. 따뜻한 색과 차가운 색은 여러 층에서 맞닿고, 선의 밀도와 색띠의 간격이 달라지면서 중심과 외곽 사이에 운동감이 생긴다. 빛은 구체적인 광원의 형태보다 색과 선이 퍼지고 겹치는 과정에서 드러난다.

방혜자, 천지에 마음의 빛 뿌리며 간다. 사진=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1980년대 ‘별들의 노래’에서는 대지와 하늘을 연상시키는 영역이 위아래로 펼쳐졌고, ‘하늘과 땅과 손을 잡고’에서는 두 영역이 서로 스며들었다. ‘하늘의 땅’에서는 중심과 둘레가 새로운 공간의 기준이 된다. 위와 아래로 나뉘었던 관계가 원의 내부로 모이고, 중심에서 바깥으로 퍼지는 흐름이 작품 전체를 이끈다.

제목에서도 하늘과 땅은 하나의 관계 안으로 들어온다. 1980년대부터 이어진 두 영역의 교감은 2011년 ‘하늘의 땅’에서 둥근 구조 안에 더욱 밀도 높게 응축된다. 지지체의 형태와 작품 제목, 색의 확산이 같은 방향을 향하면서 후기 회화의 우주적 공간감이 만들어진다.

2014년 ‘빛에서 빛으로’에서는 빛의 구조가 다시 달라진다. 양옆에 넓은 푸른 색면이 펼쳐지고 가운데에는 짙은 청색의 세로 띠가 길게 내려온다. 중앙의 어두운 색 안에는 주황과 붉은빛의 작은 흔적이 촘촘하게 흩어져 있다. 원을 중심으로 퍼져 나가던 2011년의 구성에서 세로의 흐름과 미세한 색의 입자로 이동한 것이다.

방혜자, ‘빛에서 빛으로’, 2014, 닥지에 천연안료, 180×120㎝, 방혜자재단. 넓은 푸른 영역 사이의 짙은 세로 띠에 주황·붉은빛의 작은 색 흔적이 밀집해 있다. 원형의 확산에서 벗어나 수많은 색의 입자와 수직의 흐름으로 빛을 풀어낸 후기 작업이다. 사진=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빛에서 빛으로’에서는 작은 색의 흔적 하나하나가 전체의 흐름을 만든다. 멀리서는 중앙의 세로 띠가 하나의 긴 빛줄기처럼 이어지고, 가까이 다가가면 붉은색과 주황색의 작은 흔적이 짙은 청색 사이에서 각각의 밀도를 드러낸다. 거대한 원 안에 우주적 공간을 압축했던 ‘하늘의 땅’과 달리 미세한 색의 집적이 하나의 빛을 이루는 방식이다.

방혜자의 후기 회화에서는 원형과 사선, 불꽃과 날개를 연상시키는 움직임, 작은 입자와 넓은 색면이 함께 나타난다. 관심의 범위도 우주의 빛에서 미세하게 떨리는 색의 흔적까지 오간다. ‘하늘의 땅’에서는 빛이 거대한 원 안에 응축되고, ‘빛에서 빛으로’에서는 작은 입자로 나뉘어 세로 방향으로 밀집한다. 같은 빛을 다루면서도 크기와 방향, 밀도와 확산의 관계를 계속 새롭게 조정한 것이다.

원은 방혜자의 중요한 조형 언어였고, 그 주변에는 방사형으로 뻗는 선과 입자, 띠와 넓은 색면이 함께 변주됐다. 빛은 한 작품에서는 중심에서 둘레로 퍼지고, 다른 작품에서는 작은 흔적이 모여 하나의 흐름을 이루며, 다시 다른 작품에서는 여러 색의 층이 중심을 향해 응축된다. 후기 회화의 변화는 원이라는 형태 자체보다 빛이 모이고 흩어지는 방식을 얼마나 다양하게 조직했는가에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방혜자, 천지에 마음의 빛 뿌리며 간다. 사진=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재료는 서로 다른 형식을 이어주는 축이었다. ‘하늘의 땅’에는 종이와 천연안료가 사용됐고 ‘빛에서 빛으로’에서도 닥지와 천연안료가 이어진다. 1970년대부터 축적한 종이 작업과 1990년대 이후 깊어진 천연안료 연구는 후기까지 지속되면서 새로운 구성을 받아들이는 기반이 됐다. 오랫동안 손에 익힌 종이와 안료는 원형과 색띠, 세로의 흐름과 미세한 입자에 따라 매번 다른 빛을 만들어냈다.

2020년 ‘빛의 기쁨 I’에서는 원형이 다시 강하게 등장한다. 사각의 바탕 한가운데 주황빛의 밝은 중심이 놓이고 그 주위를 짙은 남색과 청록 계열의 원이 여러 겹 감싼다. 중심과 바깥 사이에는 매우 가느다란 선이 촘촘하게 뻗으며 색층을 연결한다. ‘하늘의 땅’에서 원형 지지체 전체가 하나의 우주처럼 열렸다면 ‘빛의 기쁨 I’에서는 사각의 공간 안으로 원을 가져와 밝은 중심과 주변의 밀도를 더욱 세밀하게 조율했다.

방혜자, ‘빛의 기쁨 I’, 2020, 캔버스에 닥지·천연안료, 125.3×125㎝, 프랑스 국립현대미술관 퐁피두센터 소장. 주황빛 중심을 남색과 청록의 원이 여러 겹 감싸고 가느다란 선이 둘레로 뻗는다. 중심의 밝음과 색의 파동을 사각의 공간 안에 응축한 방혜자의 후기 대표작으로, 2024년 방혜자재단 기증을 통해 퐁피두센터 컬렉션에 들어갔다. 사진=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빛의 기쁨 I’의 중심에는 따뜻한 주황빛이 응축돼 있다. 바깥으로 갈수록 남색과 청록이 이어지며 온도 차가 커지고, 중심을 에워싼 가느다란 선에는 촘촘한 부분과 성긴 부분이 교차한다. 일정한 간격으로 정돈된 동심원보다 손의 움직임과 색의 농도가 미세하게 달라지면서 원 전체에 떨림과 호흡이 생긴다.

후기 작품에서 빛은 넓게 퍼지는 흐름과 중심으로 모이는 흐름을 함께 오갔다. 부직포와 배채법을 활용한 2000년대 작업에서는 밝음이 넓은 공간으로 번졌고, ‘빛에서 빛으로’에서는 작은 입자가 세로의 흐름을 만들었다. ‘빛의 기쁨 I’에서는 다시 밝음이 중심으로 모이며 여러 색의 원이 주변을 에워싼다. 확산과 응축은 서로 교대하면서 후기까지 이어진 방혜자의 중요한 조형 리듬이 됐다.

‘빛의 기쁨 I’을 1961년 ‘지심’과 함께 놓으면 약 60년에 걸친 변화가 더욱 또렷해진다. ‘지심’에서는 짙은 갈색과 청색이 무거운 밀도를 이루고 그 사이로 밝은 부분이 좁게 열렸다. 밝음은 짙은 물감의 층 사이에서 서서히 떠오른다. 2020년 ‘빛의 기쁨 I’에서는 주황빛 중심이 작품 전체의 질서를 만들고 남색과 청록이 그 주변을 둘러싼다. 밝음과 어둠을 함께 다루던 관심이 중심과 외곽, 따뜻한 색과 차가운 색의 관계로 세분화된 것이다.

방혜자, 천지에 마음의 빛 뿌리며 간다. 사진=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재료의 변화도 두 작품 사이의 시간을 보여준다. ‘지심’에서는 두껍고 거친 유화 물감이 표면의 깊이를 만들었다. ‘빛의 기쁨 I’에서는 닥지와 천연안료, 겹겹의 색띠와 가느다란 선이 공간의 깊이를 만든다. 초기의 두터운 마티에르에서 종이의 섬유와 안료의 스밈으로 이동하고, 다시 색과 선의 밀도를 이용해 빛을 조직하는 단계로 이어졌다. 하나의 주제를 오래 품으면서도 빛을 만들어내는 물질과 구조는 계속 달라졌다.

‘하늘의 땅’과 ‘빛에서 빛으로’, ‘빛의 기쁨 I’도 서로 다른 구조를 갖는다. 2011년에는 원형 지지체가 작품의 외곽과 내부 질서를 함께 만들고, 2014년에는 세로의 색띠와 작은 입자가 빛의 흐름을 구성한다. 2020년에는 사각의 바탕 안으로 원이 돌아와 중심과 외곽의 관계를 보다 촘촘하게 나눈다. 원형에서 입자로, 다시 중심으로 이어지는 움직임 속에서 후기 회화의 변화가 드러난다.

색 역시 작품마다 다른 관계를 만든다. ‘하늘의 땅’에서는 청록과 붉은색이 여러 겹의 띠로 만나고, ‘빛에서 빛으로’에서는 넓은 푸른 영역과 주황빛 입자가 선명한 대비를 이룬다. ‘빛의 기쁨 I’에서는 따뜻한 주황빛 중심과 차가운 남색·청록의 외곽이 동심원의 구조 안에서 만난다. 초기부터 이어진 밝음과 어둠의 대비는 후기에서 색의 온도와 중심·외곽의 거리, 입자의 밀도까지 더욱 세분화됐다.

2020년 ‘빛의 기쁨 I’은 2024년 방혜자재단 기증을 통해 퐁피두센터 컬렉션에 들어갔다. 같은 기증에는 1960년 ‘Au coeur de la Terre II’, 1962년 무제, 1972년 ‘부활의 노래’, 1989년 ‘Univers’, 2000년 ‘Envols 2’ 등 서로 다른 시기의 작품들이 포함됐다. 초기 추상에서 닥지와 천연안료, 부직포를 거쳐 후기의 빛으로 이어진 작업의 변화를 한 컬렉션 안에서 함께 살필 수 있는 구성이 마련됐다.

방혜자, 천지에 마음의 빛 뿌리며 간다. 사진=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의 ‘하늘의 땅’과 퐁피두센터의 ‘빛의 기쁨 I’은 방혜자의 후기 작업이 한국과 프랑스의 주요 국립미술관 컬렉션에 나란히 자리하게 된 흐름과도 맞닿는다. 1961년 프랑스로 건너간 뒤 한국과 프랑스를 오가며 작업한 방혜자의 생애처럼 후기 대표작 역시 두 나라의 미술관에서 각기 다른 시간과 맥락으로 이어지고 있다.

2011년부터 2020년까지의 작품에서는 하나의 형식을 완성한 뒤 머무르기보다 빛의 구조를 계속 바꾸어온 방혜자의 움직임이 두드러진다. 원의 외곽까지 회화의 형태로 만든 ‘하늘의 땅’, 수많은 색의 입자를 세로의 흐름으로 모은 ‘빛에서 빛으로’, 사각의 공간 안에 다시 밝은 중심과 원을 응축한 ‘빛의 기쁨 I’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빛의 밀도와 방향을 다룬다.

1961년 ‘지심’에서 시작된 밝음은 오랜 시간 종이와 먹, 천연안료와 흙, 부직포를 거치며 형태를 달리했다. 후기에는 빛이 작품의 한 부분에 자리한 색채 효과에서 벗어나 전체를 조직하는 원리로 깊어졌다. 중심으로 모이고, 둘레로 퍼지고, 수많은 입자로 흩어지는 방식이 한 시기 안에서도 계속 달라졌다. ‘하늘의 땅’과 ‘빛에서 빛으로’, ‘빛의 기쁨 I’ 사이에는 방혜자가 말년에 하나의 양식에 도달했다는 결론보다 끝까지 재료와 구조를 바꾸며 빛의 형태를 새롭게 만들어간 회화의 시간이 더 선명하게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