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정, 빛의 나비⑤] 시냐크·모홀리나기·방혜자·터렐을 지나…‘바이탈 클라리타스’로
색점의 진동에서 실제 광원, 한지 속 내적 빛과 공간의 몰입까지 20년간 빛·색채·매체를 바꿔온 김현정, ‘빛나는 색채’에서 생명적 밝음의 미학으로 확장
[KtN 박준식기자]2024년 김현정의 ‘별과 별사이 2406(Interstellar 2406)’과 방혜자의 ‘마음의 빛(Heart of Light)’을 나란히 놓으면 먼저 원형 구조가 들어온다. 두 작품 모두 중심에 밝음이 응축돼 있고 색과 선은 바깥쪽으로 퍼져나간다. 푸른 계열이 넓게 자리한 가운데 중앙의 빛이 주변 공간을 조직한다는 점에서도 닮았다. 그러나 작품을 만드는 재료와 빛의 발생 방식은 크게 다르다. 방혜자가 한지와 천연안료의 층에서 밝음을 길어 올렸다면 김현정은 캔버스 안에 실제 LED를 넣고 아크릴 안료와 결합한다. 비슷하게 보이는 방사형 구조 안에 서로 다른 시대의 재료와 빛에 대한 인식이 들어 있다.
김현정이 20년 가까이 이어온 작업을 따라가면 빛은 한 가지 매체에 머무르지 않는다. 2005년 프라하에서 스테인드글라스를 통과한 자연광을 경험한 뒤 장지와 분채로 빛을 옮겼고, 나비와 흰 원형, 닥종이와 실크스크린을 거쳐 RGB LED와 플렉시글라스, 자개, 아크릴 부조로 재료를 넓혔다. ‘무한(Infinity)’에서는 광원의 밝기와 점멸이 시간과 움직임을 만들었고, ‘별과 별사이’에서는 실제 빛과 두꺼운 회화의 표면을 한 작품 안에 결합했다.
작업이 확장되는 동안 김현정이 붙잡은 문제는 단순히 작품을 밝게 만드는 데 있지 않았다. 물질인 색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과 그 색이 사람의 내면을 움직이는 경험 사이를 연결하는 데 관심이 있었다. 물감을 밝게 칠하는 것으로는 부족했고, 실제 빛만 강하게 내보내는 것으로도 원하는 결과에 닿지 않았다. 색채와 빛, 재료가 함께 작동하면서 작품 안에 생명감이 생기는 상태를 찾았다. 김현정은 이를 ‘빛나는 색채(Vital Color)’에서 더 나아가 ‘바이탈 클라리타스(Vital Claritas)’라는 자신의 미학적 언어로 정리했다.
폴 시냐크(Paul Signac)는 이 과정에서 색채 쪽에 놓이는 중요한 좌표다.
19세기 후반 신인상주의가 택한 분할주의(Divisionism)는 여러 색을 팔레트에서 섞지 않고 화면에 나누어 놓는 방식이었다. 물감은 섞을수록 탁해질 수 있지만 서로 다른 색을 작은 단위로 병치하면 관람자의 눈에서 시각적으로 혼합되며 색의 순도와 밝기를 유지할 수 있다. 시냐크는 과학적 색채 이론을 받아들이면서도 엄격한 규칙에 회화를 가두지 않았다. 작은 색점은 후기 작품에서 더 자유로운 모자이크 형태로 변했고 물과 하늘, 구름은 색의 진동과 리듬으로 움직였다.
김현정의 ‘날으는 빛(Flying Light)’에서 물감의 색점은 RGB 광원으로 바뀌었다. 시냐크가 서로 다른 안료를 나누어 놓고 관람자의 눈에서 색이 섞이도록 했다면 김현정은 빨강·초록·파랑 광원을 병치해 광색의 혼합을 만들었다. 색을 실제로 섞지 않으면서 밝음을 유지하려 했다는 구조는 닮았지만 한쪽은 안료, 다른 한쪽은 스스로 빛을 내는 광원이다.
시냐크에게서 김현정이 연결한 것은 점묘라는 외형보다 색채의 생명감이다. 과학적 원리에 기대면서도 회화가 계산된 색채 공식으로 굳어지지 않도록 색점의 크기와 위치, 붓질을 변화시켰던 태도는 김현정의 작업에서도 이어진다. LED의 파장과 색의 물리적 특성을 활용하지만 최종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기술의 시연이 아니라 나비와 빛이 살아 움직이는 듯한 감각이다.
라즐로 모홀리나기(László Moholy-Nagy)는 색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빛 자체를 재료로 다뤘다. 사진과 영화, 회화, 무대, 금속과 유리, 플렉시글라스를 넘나들며 산업사회에서 등장한 기술과 재료를 미술 안으로 적극적으로 끌어들였다. 1920~30년대부터 물감 중심의 회화를 넘어 물리적인 빛이 조형 재료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실험했다.
‘빛-공간 변조기(Light-Space Modulator)’는 금속과 유리, 플라스틱, 전기 모터를 결합한 장치다. 기계가 움직이는 동안 빛은 반사되고 굴절되며 주변에 계속 다른 형태와 그림자를 만든다. 빛은 완성된 이미지를 비추기 위한 조명이 아니라 작품의 형태를 지속해서 바꾸는 재료가 된다.
모홀리나기의 작업은 김현정이 LED와 플렉시글라스를 사용하는 방식과 직접 비교할 만하다. 모홀리나기는 산업 재료와 광원을 이용해 빛의 반사와 투과, 그림자가 공간을 바꾸도록 했다. 김현정은 플렉시글라스와 아크릴, LED를 회화 안에 들여 나비 자체에서 빛이 나오도록 했다. ‘무한 8’에서는 캔버스 평면 옆으로 아크릴 구조가 돌출되고 내부 광원의 색이 시간에 따라 변한다. 회화와 입체, 빛의 경계가 한 작품 안에서 동시에 작동한다.
두 작업 사이에는 시대적 거리만큼 차이도 있다. 모홀리나기의 관심이 빛과 기계, 새로운 시각 환경에 있었다면 김현정의 광원은 나비라는 생명체의 형상과 내면의 밝음에 밀착돼 있다. LED의 점멸을 호흡이나 심장박동에 가까운 리듬으로 조절한 것도 빛을 기계의 운동으로 남겨두지 않고 생명의 움직임과 연결하려는 선택이었다.
방혜자(Bang Hai Ja)를 만나면 김현정의 빛은 다시 다른 방향을 향한다. 방혜자는 실제 전기광을 사용하지 않았다. 한지와 닥지, 천연안료를 겹치고 색을 스며들게 하면서 작품 내부에서 밝음이 올라오도록 했다. 한지의 섬유와 주름, 안료의 투명성은 빛을 묘사하는 도구가 아니라 빛이 생겨나는 조건이 됐다.
‘자연의 숨결(Breath of Nature)’에는 밝은 입자들이 푸른 공간 전반에 퍼져 있다. 물감을 한 덩어리의 광원으로 처리하지 않고 작은 색의 흔적과 재료의 층에서 미세한 진동이 발생한다. 방혜자의 작업에서 빛은 외부에서 화면을 비추는 효과보다 종이와 안료 내부에서 천천히 드러나는 상태에 가깝다.
김현정과 방혜자의 접점은 작품 외형보다 작업 태도에서 더 깊어진다. 빛을 단순한 희망의 상징으로 사용하지 않고 재료와 작업 과정 자체가 빛의 의미를 만들어내도록 했다는 점이다. 방혜자가 한지를 겹치고 구기며 천연안료를 반복해서 올리고 닦아냈다면 김현정은 안료와 LED, 반사재와 투명재를 바꾸면서 빛이 작품 안에서 실제로 작동하는 조건을 찾았다. 한쪽의 빛은 재료 속에서 천천히 우러나오고, 다른 쪽의 빛은 실제 광원과 색층이 만나며 진동한다.
방혜자의 ‘마음의 빛’과 김현정의 ‘별과 별사이 2406’에서 나타나는 시각적 유사성도 여기에서 다시 읽힌다. 중앙의 밝은 핵과 사방으로 퍼지는 구조는 닮았지만 방혜자의 밝음은 한지와 자연안료의 중첩에 기반하고 김현정의 밝음은 LED와 아크릴 안료의 결합에서 발생한다. ‘빛’이라는 동일한 언어가 재료에 따라 전혀 다른 회화를 만든다.
제임스 터렐(James Turrell)에 이르면 빛을 보는 사람의 경험이 앞으로 나온다.
터렐의 ‘간츠펠트(Ganzfeld)’에서는 특정한 형상을 찾기 어렵다. 공간 전체가 하나의 색과 빛으로 채워지고 벽과 천장, 깊이의 경계가 흐려진다. 관람자는 그림 앞에 서서 이미지를 바라보는 대신 빛으로 만들어진 환경 안에 직접 들어간다. 공간의 경계를 판단하기 어려워지면서 평면과 깊이에 대한 감각도 흔들린다.
터렐의 작업에서 중요한 것은 빛의 강렬함만이 아니다. 일정한 시간 동안 빛 속에 머무르며 눈이 색과 깊이에 적응하는 과정이 작품에 포함된다. 공간과 빛, 관람자의 신체가 함께 있어야 작품의 경험이 완성된다. 터렐은 빛을 물질로, 지각을 매체로 바라보며 관람자의 감각 자체가 달라지는 환경을 만들어왔다.
김현정의 작업에서도 이 문제는 점차 중요해졌다. ‘별과 별사이’는 같은 작품이라도 전시장 조도가 밝을 때와 어두울 때 전혀 다른 색의 깊이를 만든다. 벽에서 나온 빛은 바닥에 반사되고, 여러 작품을 함께 배치하면 개별 캔버스를 넘어 전시장 전체에 색의 관계가 생긴다. 작품의 완성 범위가 캔버스 안에만 머물지 않고 공간과 관람자의 지각까지 넓어진다.
시냐크의 색채, 모홀리나기의 물리적 빛, 방혜자의 내적 밝음, 터렐의 지각 공간은 김현정의 작업에 그대로 옮겨온 양식이 아니다. 네 작가가 보여준 서로 다른 빛의 방식은 김현정이 20년에 걸쳐 이동해온 지점을 구분하는 좌표에 가깝다.
시냐크와 만나는 곳에서는 색이 나뉘고 다시 눈에서 결합한다. 모홀리나기와 만나는 곳에서는 기술과 새로운 물질이 예술의 재료가 된다. 방혜자와 만나는 곳에서는 빛이 작품 표면의 효과를 넘어 내면과 재료의 깊이로 들어간다. 터렐과 만나는 곳에서는 빛을 바라보는 관람자의 감각까지 작품의 일부가 된다. 네 방향은 김현정의 ‘빛나는 색채’를 색채 효과 하나로 설명하기 어렵게 만든다.
‘바이탈 클라리타스(Vital Claritas)’는 여기에서 김현정 자신의 언어로 들어온다.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가 미의 조건으로 제시한 클라리타스(Claritas)는 밝음, 빛남, 명료성과 연결되는 개념이다. 김현정은 클라리타스를 단순히 작품이 밝게 보이는 상태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물질적인 형상과 내적인 본질이 분리되지 않고 명료하게 드러나는 밝음에 주목했다.
여기에 생명성을 뜻하는 ‘바이탈(Vital)’을 결합했다. 김현정이 말하는 ‘바이탈 클라리타스’는 정지된 밝음보다 색과 빛, 매체가 서로 작용하면서 생명성과 운동성을 얻는 상태에 가깝다. 색채가 호흡하고 빛이 진동하며 작품의 물질과 관람자의 감각이 서로 반응하는 밝음이다.
‘빛나는 색채(Vital Color)’와도 구분된다. ‘빛나는 색채’는 물질적인 색채 안에서 정신적인 밝음이 드러나는 조형 표현을 가리킨다. ‘바이탈 클라리타스’는 밝음이 생명적 리듬과 조형적 생동감을 얻고, 감각적 경험과 내면의 사유까지 하나의 미적 경험으로 결합되는 상태를 가리킨다. 김현정이 오래 사용해 온 나비는 이 연결을 구체적인 형상으로 붙들어주는 매개가 된다.
단어만 떼어놓으면 개념은 어렵게 들리지만 작품의 변화와 연결하면 흐름은 비교적 선명하다. ‘프라하의 창’에서는 스테인드글라스의 실제 빛을 바라봤고, ‘햇살 내리는’에서는 안료로 투명한 빛을 만들려 했다. ‘날으는 빛’에서는 RGB 광원을 사용했고, ‘제로’에서는 자개의 반사를 끌어들였다. ‘무한’에서는 LED의 점멸이 나비의 호흡을 만들었으며 ‘별과 별사이’에서는 실제 빛과 여러 겹의 아크릴 색층이 하나의 회화 안에서 만났다.
‘바이탈 클라리타스’는 작품보다 먼저 세워놓고 작업을 맞춘 명칭과 거리가 있다. 20년 동안 색과 재료를 바꾸면서 축적된 경험을 뒤에서 하나의 언어로 묶는 성격이 강하다. 밝은 색을 칠하는 데서 출발한 작업이 실제 광원을 받아들이고, 다시 물감의 물성과 공간, 관람자의 경험까지 끌어들이면서 김현정이 추구한 밝음의 성격도 달라졌다.
2024년 ‘별과 별사이 2406’의 중앙에는 작은 나비가 실제 빛을 낸다. 그러나 작품을 이루는 것은 LED 하나가 아니다. 나비 주변의 푸른 색층, 원을 따라 이어지는 붓질, 중심에서 밖으로 퍼지는 밝음, 전시장 조도에 따라 변하는 색과 반사가 함께 작동한다. 물리적 빛과 회화적 색, 내부의 사유와 외부의 지각이 한 작품에서 만난다.
시냐크에서 모홀리나기, 방혜자와 터렐까지 이어놓은 빛의 계보는 김현정의 작업을 네 작가 가운데 한곳에 편입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다. 색의 진동, 새로운 광원, 물질 내부의 밝음, 관람자의 지각이라는 서로 다른 축을 통과하면서 김현정이 사용해온 나비와 빛의 성격을 더 구체적으로 드러낸다.
2005년 프라하에서 바라본 빛은 유리 바깥에서 들어왔다. 이후 빛은 나비의 색이 됐고, LED가 됐으며, 캔버스 내부에서 점멸하고 공간으로 반사됐다. ‘바이탈 클라리타스’는 이 긴 이동 끝에서 색채와 빛, 재료와 내면을 하나로 묶기 위해 선택된 언어다. 김현정의 빛은 밝음 자체보다 존재가 다시 생기를 얻고, 색과 매체가 그 생기를 실제 감각으로 드러내는 상태에 가까워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