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패션을 설명하는 것들…Advisry SS27이 꺼낸 시간의 언어

제임스 볼드윈의 1969년 목소리, 1970년대의 영화와 스포츠, 아버지의 오래된 사진 트렌치·데님·체커보드 수트·시퀸 농구 쇼츠에 겹쳐진 미국의 반세기

2026-09-19     박인경 기자

[KtN 박인경기자]패션은 옷의 형태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재킷의 어깨선과 팬츠의 길이, 원단의 질감과 색을 읽는 일은 출발점에 가깝다. 한 벌이 왜 지금 등장했는지를 따라가려면 옷이 지나온 시간까지 살펴야 한다. 누가 입었던 옷인지, 어느 도시에서 반복됐는지, 어떤 세대가 기억하는지, 오래된 형태가 지금의 몸 위에서 얼마나 달라졌는지가 패션의 의미를 만든다.

Advisry의 2027 봄·여름 컬렉션 ‘AMERICA, STILL’은 그 시간을 옷 안으로 끌어들였다.

키스 헤런(Keith Herron)이 출발점으로 삼은 것은 제임스 볼드윈(James Baldwin)의 1969년 목소리와 1970년대 미국이었다. 영화 ‘택시 드라이버(Taxi Driver)’의 트래비스 비클(Travis Bickle), 무하마드 알리(Muhammad Ali), 맬컴 X(Malcolm X)가 컬렉션의 서로 다른 층위를 만들었다. 뉴욕 맨해튼 플랫아이언 디스트릭트에서 열린 쇼의 객석에는 약 50년 전 어린 시절 아버지의 사진이 인쇄된 부채가 놓였다.

미국 현대사의 거대한 이름과 한 가족의 오래된 사진이 같은 컬렉션에 들어왔다.

‘AMERICA, STILL’이 흥미로운 이유는 1970년대를 복원하려 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당시의 유행을 다시 입히는 방식보다 오래된 복식의 형태를 현재의 비례와 소재로 바꿨다. 트렌치코트의 어깨는 내려갔고, 데님은 팬츠를 넘어 미니드레스로 이동했다. 수트에는 붉은색과 검은색 체커보드가 번졌고 타탄은 베스트와 드레스, 상의로 이어졌다. 농구 쇼츠에는 시퀸이 붙었고 재킷에는 펄 장식이 들어갔다.

Advisry SS27 'AMERICA, STILL' Is a Three-Act Ode to American Resilience. 사진=Advisry,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긴 카멜 톤 트렌치코트 안에 데님을 겹친 착장은 헤런이 과거를 다루는 방식을 잘 드러낸다. 트렌치의 익숙한 형태는 남아 있지만 어깨와 품, 길이의 비례는 느슨해졌다. 안쪽 데님과 외투의 길이 차이도 크게 벌어졌다. 오래된 아우터의 문법을 그대로 지키지 않고 현재의 거리에서 익숙한 레이어링으로 다시 조정했다.

패션이 과거를 기억하는 방식은 역사 복원과 다르다. 똑같은 옷을 되살리지 않아도 몇 센티미터 내려간 어깨와 길어진 코트, 마모된 데님 표면만으로 시대의 감각은 달라진다. 오래된 형태를 남기면서 비례를 바꾸는 순간 옷은 과거의 복제품이 아니라 현재의 복식이 된다.

트래비스 비클 역시 영화 의상의 복제로 들어오지 않았다. 디스트레스드 데님 미니드레스와 드롭 숄더 트렌치코트, 버클 가죽 재킷이 대신 놓였다. 마모된 표면과 낮은 어깨, 가죽과 금속 부속이 1970년대 도시의 불안과 긴장을 옷으로 옮긴다.

패션은 얼굴을 프린트하지 않고도 한 인물을 말할 수 있다. 이름을 옷 위에 새기지 않고도 한 시대의 태도와 공기를 현재의 실루엣으로 옮길 수 있다.

Advisry SS27 'AMERICA, STILL' Is a Three-Act Ode to American Resilience. 사진=Advisry,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무하마드 알리와 맬컴 X가 연결된 부분에서는 옷이 몸을 다루는 방식부터 달라진다. 붉은색과 검은색 체커보드가 재킷과 팬츠 전체를 덮고, 수트는 어깨와 몸통의 형태를 선명하게 잡는다. 박스형 타탄 베스트는 몸에 달라붙지 않고 상체의 폭을 넓힌다. 케이프는 재킷과 다른 방식으로 어깨를 확장한다.

‘dignity’라는 단어는 문구보다 비례에서 읽힌다. 몸을 작게 정리하지 않고 폭을 남기고, 패턴을 숨기지 않고 전면에 배치한다. 수트의 형식은 유지하지만 격자의 크기와 색은 더 강해진다.

존엄을 반드시 엄격한 검은 수트로 표현할 필요도 없다. 어깨를 얼마나 넓게 잡는지, 옷이 몸 주변의 공간을 얼마나 차지하는지, 반복되는 패턴이 시선을 어디에 머물게 하는지가 사람의 인상을 바꾼다. Advisry가 체커보드와 타탄을 다루는 방식에는 그런 신체의 비례가 먼저 놓인다.

Advisry SS27 'AMERICA, STILL' Is a Three-Act Ode to American Resilience. 사진=Advisry,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농구 쇼츠가 등장하면서 미국을 설명하는 방법은 다시 달라진다.

농구 쇼츠는 미국 스포츠웨어를 대표하는 가장 대중적인 복식 가운데 하나다. 경기장에서 출발했지만 거리와 일상복으로 오래전에 영역을 넓혔다. Advisry는 익숙한 형태를 없애지 않았다. 넉넉한 폭과 무릎 주변에서 끝나는 길이를 남기고 표면에 시퀸과 광택을 더했다.

옷의 형태는 그대로인데 성격은 달라진다.

활동성과 편안함을 전제로 한 쇼츠에 빛을 반사하는 소재가 들어가면서 경기복과 장식복 사이의 거리가 줄어든다. 메탈릭 니트 스웨터도 마찬가지다. 익숙한 풀오버의 형태를 유지하면서 표면만 금속성 광택으로 바꾼다. 펄 역시 주얼리에서 벗어나 재킷 위로 이동했다.

패션의 변화가 언제나 새로운 형태의 발명에서 시작하는 것은 아니다. 이미 알고 있는 옷에 전혀 다른 소재를 입히고, 길이를 달리하고, 다른 종류의 옷과 연결하는 것만으로도 복식의 의미는 이동한다.

Advisry가 ‘transformation’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대목도 여기와 맞닿는다. 농구 쇼츠는 농구 쇼츠의 형태를 지키고, 재킷은 재킷으로 남으며, 니트도 기본 구조를 잃지 않는다. 달라지는 것은 표면과 질감, 옷이 놓이는 맥락이다.

Advisry SS27 'AMERICA, STILL' Is a Three-Act Ode to American Resilience. 사진=Advisry,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밝은 색 재킷과 깊은 블루 팬츠의 조합에서는 장식과 일상복의 경계가 더 가까워진다. 상의에는 입체적인 장식이 촘촘하게 들어가지만 하의는 넓고 편안하게 떨어진다. 화려한 표면을 갖췄다고 한 벌 전체가 이브닝웨어로 이동하지 않는다. 장식적인 상체와 느슨한 팬츠를 한 착장에 놓으면서 서로 다른 복식의 성격을 나란히 남겼다.

남성복과 여성복을 구분해 온 오래된 관습도 같은 방식으로 느슨해진다. 펄과 시퀸, 드레이프가 한쪽 성별의 옷에만 머물지 않고, 넓은 팬츠와 수트 역시 다른 쪽에만 고정되지 않는다. 복종을 성별에 따라 나누기보다 소재와 비례를 서로 이동시킨다.

패션을 설명할 때 결국 돌아오게 되는 것은 몸이다.

같은 재킷도 어깨선이 몇 센티미터 넓어지면 사람이 달라 보인다. 같은 드레스도 허리와 골반을 얼마나 따라가는지에 따라 태도가 달라진다. 옷은 몸에 걸리는 순간 사람의 비례를 새로 만들고, 보는 사람이 느끼는 거리까지 바꾼다.

‘AMERICA, STILL’에는 몸 가까이 붙는 검은 드레스와 넓게 퍼지는 케이프, 박스형 베스트와 긴 트렌치, 짧은 쇼츠와 폭넓은 팬츠가 함께 등장한다. 하나의 이상적인 실루엣을 반복하지 않는다. 몸을 좁게 감쌌다가 다시 넓히고, 길게 덮었다가 다리를 드러내며, 직선을 세웠다가 드레이프로 흐르게 한다.

Advisry SS27 'AMERICA, STILL' Is a Three-Act Ode to American Resilience. 사진=Advisry,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검은 드레스는 컬렉션 안에서도 서로 다른 몸을 만든다. 몸을 따라 길게 떨어지며 깊은 슬릿을 낸 드레스가 있는가 하면, 상체의 주름을 촘촘하게 잡고 아래로 갈수록 볼륨을 크게 확장한 드레스도 등장한다. 같은 검정이지만 한쪽은 신체의 선을 따라가고 다른 한쪽은 몸 바깥의 공간을 넓힌다.

색 하나만으로 패션을 설명할 수 없는 이유다. 어깨선의 위치, 옷의 길이, 원단이 빛을 받는 방식, 몸과 옷 사이에 남겨진 공간이 같은 색의 옷을 전혀 다른 것으로 만든다.

‘AMERICA, STILL’에서 가장 오래 남는 것은 객석의 가족사진일지 모른다.

볼드윈과 알리, 맬컴 X는 미국 문화사와 정치·사회사의 큰 이름으로 남아 있다. 트래비스 비클 역시 영화사를 통해 반복해서 호출돼 왔다. 헤런 아버지의 어린 시절 사진은 성격이 다르다. 공적인 기록이 아니라 한 가족이 보관해 온 개인의 시간이다.

한 시대를 구성하는 것은 유명인의 기록만이 아니다. 당시를 살아간 평범한 사람들의 옷과 사진, 가족 앨범에 남은 한 컷도 같은 시간을 구성한다. 헤런이 태어나기 이전의 미국은 역사책과 영화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가족의 기록에도 남아 있었다.

패션은 그 사적인 기억을 공적인 문화와 연결할 수 있다. 가족 앨범 속 사진이 런웨이의 객석으로 옮겨지고, 약 반세기 전의 시간이 현재 컬렉션의 제목과 이어진다. 옷은 과거를 보존하는 기록물이 아니지만 기억이 현재에 머무는 형태를 바꿀 수 있다.

Advisry가 미국을 설명하면서 성조기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은 것도 흥미롭다. 국가를 가장 직접적으로 상징하는 기호보다 트렌치와 데님, 수트와 체크, 농구 쇼츠와 니트를 택했다.

사람들이 실제로 입어 온 옷이다.

미국이라는 문화 역시 국기와 지도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거리에서 입는 데님, 경기장에서 나온 스포츠웨어, 일터의 수트와 코트, 영화와 음악, 가족이 간직한 오래된 사진이 함께 쌓여 하나의 시대를 만든다. 패션은 거대한 국가의 서사를 사람의 몸 가까이 끌어오는 몇 안 되는 문화적 언어 가운데 하나다.

‘AMERICA, STILL’을 따라가고 나면 트렌치와 데님, 체커보드 수트와 시퀸 농구 쇼츠만 남지 않는다. 1969년의 목소리와 1970년대의 영화가 있고, 스포츠와 정치·문화의 기억이 있으며, 객석에는 어린 소년의 오래된 사진 한 장이 놓여 있다.

패션을 설명하는 가장 오래된 재료 가운데 하나는 결국 시간이다.

누가 입었던 옷이 어떻게 남았는지, 한 시대의 형태가 다음 세대의 몸에서 얼마나 달라졌는지, 가족의 기억이 소재와 실루엣으로 어떻게 옮겨졌는지가 옷의 의미를 쌓는다.

키스 헤런은 1970년대를 다시 입히지 않았다. 반세기 전 미국을 트렌치의 길이와 데님의 마모, 수트의 격자, 농구 쇼츠의 시퀸, 아버지의 어린 시절 사진에 나눠 놓았다.

패션은 시간을 복제하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며 달라진 몸과 소재, 기억까지 함께 입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