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트렌드③] 그림과 책이 한 전시에 놓였다…‘서사형 큐레이션’의 확장

회화·설치에 ‘American Psycho’ 초판과 17세기 ‘The Anatomy of Melancholy’까지…작품의 장르보다 하나의 주제를 따라가는 전시 구성

2026-09-21     임민정 기자

[KtN 임민정기자]전시장에서 책은 더 이상 작품을 설명하기 위한 참고자료에만 머물지 않는다. 회화와 설치 사이에 문학이 들어오고, 서로 다른 시대에 만들어진 이미지와 문장이 하나의 주제를 공유한다. 홍콩 소더비 메종(Sotheby’s Maison)의 ‘PSYCHO: Identity Alienation Shadow Duality’에서는 미술 작품을 읽는 범위가 전시장 벽을 넘어 책과 텍스트까지 확장된다.

‘PSYCHO’에는 마크 로스코(Mark Rothko), 요시토모 나라(Yoshitomo Nara), 테츠야 이시다(Tetsuya Ishida), 야요이 쿠사마(Yayoi Kusama), 한스 벨머(Hans Bellmer), 이불(Lee Bul), 프랭크 아우어바흐(Frank Auerbach), 폴라 레고(Paula Rego) 등의 작업과 함께 브렛 이스턴 엘리스(Bret Easton Ellis)의 ‘American Psycho’ 초판, 로버트 버턴(Robert Burton)의 ‘The Anatomy of Melancholy’ 17세기 판본이 놓였다. 정체성과 소외, 절망, 분열된 자아라는 전시의 주제가 시각예술과 문학 사이를 오간다.

작가별 작품을 차례로 소개하는 구성과는 방향이 다르다. 로스코의 색면과 나라의 인물, 이시다의 갇힌 신체가 서로 다른 미술사적 문맥에 놓여 있음에도 이번 전시에서는 ‘Identity’, ‘Alienation’, ‘Shadow’, ‘Duality’라는 단어를 중심으로 다시 연결된다. 문학 역시 별도의 영역으로 분리되지 않고 같은 질문을 다른 시대와 언어로 이어가는 역할을 맡는다.

[전시트렌드③] 그림과 책이 한 전시에 놓였다…‘서사형 큐레이션’의 확장. 사진=Yoshitomo Nara and Mark Rothko / Sotheby’s Hong Kong,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어두운 공간에 서적과 자료를 배치한 구성에서는 전시의 시선이 작품 한 점에서 텍스트로 이동한다. ‘American Psycho’와 ‘The Anatomy of Melancholy’를 미술 작품과 함께 불러들인 선택은 인간의 불안과 소외가 동시대 미술만의 주제가 아니라는 점을 드러낸다.

1991년 출간된 ‘American Psycho’는 소비와 욕망, 자기 이미지가 뒤엉킨 현대인의 정체성을 극단적으로 밀어붙인 소설이다. ‘The Anatomy of Melancholy’는 17세기에 멜랑콜리라는 상태를 방대한 인문적 지식과 함께 탐구한 책이다. 만들어진 시대도 문체도 크게 다르지만 인간 내부의 불안과 욕망, 자신을 바라보는 방식이 오랫동안 문화와 예술의 관심사였다는 연결점이 생긴다.

전시의 주제는 이 과정에서 특정 작가의 작품 세계를 넘어선다. 하나의 회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설명하는 대신 서로 다른 작품과 책이 정체성과 소외를 어떻게 다르게 다뤄왔는지를 비교하게 한다. 관객은 한 작품 앞에서 해석을 끝내기보다 다음 작품과 텍스트로 이동하면서 앞서 본 이미지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동시대 전시에서 이런 구성은 점점 중요해지고 있다. 작품을 작가와 연대순으로 배열하는 방식보다 하나의 개념을 중심으로 시대와 장르가 다른 작업을 교차시키는 기획이 늘면서 전시는 작품의 집합보다 하나의 서사를 설계하는 공간에 가까워진다. 작품 자체의 독립성은 유지하면서도 관객이 무엇을 먼저 보고 어떤 관계를 발견할지는 큐레이션이 결정한다.

‘PSYCHO’에서는 제목부터 관람의 방향을 설정한다. 정체성에서 출발해 소외와 그림자, 이중성으로 이어지는 단어들은 작품을 하나의 심리 상태로 묶기보다 인간 내부에서 공존하는 여러 층위를 나눈다. 요시토모 나라의 어린 인물과 마크 로스코의 추상회화가 같은 전시에 들어갈 수 있는 이유도 외형적인 유사성이 아니라 주제의 연결에 있다.

나라의 인물에서는 친근한 외형과 경계심이 함께 나타나고, 테츠야 이시다의 작업에서는 개인과 사회 시스템의 관계가 불안하게 맞물린다. 이불의 설치에서는 개인적인 기억과 현대사가 겹치며, 로스코의 회화에서는 구체적인 인물과 사건이 사라진 자리에서 색과 규모가 심리적인 깊이를 만든다. 각각의 작품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내면’을 다룬다.

문학은 이 작품들을 하나의 해석으로 고정하기보다 시간의 폭을 넓힌다. 멜랑콜리는 17세기에도 인간을 이해하기 위한 주제였고, 욕망과 자기 이미지, 분열된 정체성은 현대 문학에서도 반복돼 왔다. 시각예술과 문학 사이에 놓인 수백 년의 시간 차이가 오히려 인간 내면이라는 주제가 얼마나 오래 지속돼 왔는지를 드러낸다.

서적을 전시장에 넣는다고 곧바로 서사형 전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책이 장식이나 참고자료로 남는다면 작품과 텍스트는 여전히 분리돼 있다. ‘PSYCHO’에서는 문학이 전시 제목과 직접 연결되고, 회화와 설치가 다루는 소외·욕망·불안의 범위를 다른 언어로 확장한다. 책이 작품 주변의 보조물이 아니라 큐레이션의 한 축으로 들어온 구성이다.

[전시트렌드③] 그림과 책이 한 전시에 놓였다…‘서사형 큐레이션’의 확장. 사진=Yoshitomo Nara and Mark Rothko / Sotheby’s Hong Kong,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요시토모 나라의 설치공간에서는 서사를 만드는 방법이 다시 달라진다. 벽면을 채운 수많은 드로잉 앞에 관람객이 서면 한 점의 대표작보다 이미지의 축적이 먼저 들어온다. ‘The Crated Room in Iceland / Drawing Room’에는 97점의 드로잉과 의자, CD 플레이어, 개인적인 물건, 대형 회화가 함께 배치된다.

한 작품을 오래 바라보는 관람법과 달리 여러 이미지와 사물을 차례로 읽게 하는 구조다. 드로잉 하나가 모든 내용을 설명하지 않는다. 비슷하면서도 다른 표정과 이미지가 반복되고, 사물과 음악을 위한 장치가 더해지면서 한 사람의 작업 세계가 공간 안에 축적된다.

이런 방식에서는 ‘대표작’이라는 개념도 조금 달라진다. 전통적인 회화 전시에서는 한 점의 주요 작품이 전시의 시선을 집중시키는 경우가 많지만 공간형 설치에서는 개별 요소보다 전체 환경이 중요해진다. 관람자는 그림을 보는 사람에서 공간을 통과하며 여러 단서를 연결하는 사람으로 이동한다.

서사형 전시의 확장은 관람 시간에도 영향을 준다. 한 점을 보고 다음 작품으로 이동하는 방식보다 책의 제목을 확인하고, 드로잉 사이의 관계를 살피고, 공간 안에 놓인 사물의 의미를 연결해야 한다. 작품을 보는 시간이 읽는 시간으로 바뀌고, 전시 동선 자체가 해석의 과정이 된다.

소더비 메종이 이 방식을 선택했다는 점도 전시 트렌드의 변화를 보여준다. 경매사는 작품의 출처와 제작연도, 추정가처럼 거래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는 데 익숙한 공간이다. ‘PSYCHO’에서는 거기에 전시 제목과 문학, 설치, 공간 연출을 더해 작품의 시장 정보보다 먼저 하나의 이야기를 만든다.

서사와 시장도 완전히 분리되지 않는다. 나라의 ‘The Crated Room in Iceland / Drawing Room’과 로스코의 ‘Untitled (Plum and Dark Brown)’은 전시의 주요 작품이면서 이어지는 경매의 핵심 출품작이다. 기획전에서 작품의 문화적 맥락을 먼저 경험한 뒤 경매에서 시장 가치가 다시 제시되는 구조다.

전시가 하나의 이야기를 만든다는 것은 모든 작품을 같은 의미로 묶는다는 뜻과는 다르다. 오히려 차이를 남겨두면서 공통된 주제를 따라 이동할 수 있도록 관계를 설계하는 데 가깝다. 이시다의 사회적 소외와 나라의 사적인 고독, 로스코의 비구상적 긴장은 서로 같지 않다. 서로 다른 방식이기 때문에 정체성과 불안이라는 주제의 범위가 더 넓어진다.

‘PSYCHO’는 27일까지 홍콩 LANDMARK CHATER의 소더비 메종에서 이어진다. 회화와 설치, 드로잉에 문학까지 더한 구성은 최근 전시에서 장르보다 서사가 중요해지고 있는 흐름을 보여준다. 작품 한 점의 의미를 설명하는 데 머물지 않고 서로 다른 시대와 매체를 연결해 관객이 하나의 주제를 따라가도록 만드는 방식이다.

전시장에서 작품을 ‘보는 것’과 텍스트를 ‘읽는 것’의 경계도 그만큼 옅어진다. 로스코의 색면에서 시작한 시선이 소설과 고전 문헌으로 이동하고, 다시 나라의 드로잉으로 이어지면서 전시는 개별 작품의 나열보다 관계의 구조를 앞세운다. ‘PSYCHO’가 보여주는 서사형 큐레이션은 전시가 작품을 담는 공간에서 작품과 작품 사이의 의미를 설계하는 공간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흐름과 맞닿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