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포르테'②] 빛·안개·정적, '포르테' 77분의 불안
박정민 촬영·프레데릭 알바레즈 음악, 숲과 콘크리트 사이에 놓인 공포 빠른 충격 대신 한 컷과 한 음에 머문 아트 호러의 감각
[KtN 박준식기자]짙은 숲을 등진 콘크리트 건물 안에서 피아노 연주가 이어진다. 통유리에는 나무와 사람이 겹치고, 안개가 내려앉은 수풀은 건물 가까이까지 밀려온다. 킴보킴 감독의 '포르테(FORTE)'는 공포를 서둘러 터뜨리지 않는다. 촬영과 음악이 먼저 공간의 온도를 낮추고, 정적이 길어질수록 다음 소리를 기다리게 한다. 사람이 사라지는 이야기를 77분 동안 끌고 가는 힘도 사건의 수보다 이런 감각의 배치에서 나온다.
촬영을 맡은 박정민 촬영감독은 물기를 머금은 숲의 초록과 콘크리트의 차가운 질감을 맞세웠다. 나무와 수풀은 빛과 안개에 따라 계속 색을 달리하지만 스튜디오의 벽과 기둥은 단단한 형태를 유지한다. 자연과 인공 구조물이 가까이 붙으면서 실내에 머무는 인물에게도 숲의 기운이 계속 따라붙는다.
통유리도 자주 쓰인다. 바깥의 숲을 그대로 들여다볼 수 있지만 반사된 사람과 나무가 겹치면서 시선은 오히려 복잡해진다. 건물 안에 있어도 외부와 완전히 분리되지 않고, 숲에 나가도 스튜디오의 기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폐쇄된 방과 탁 트인 자연을 단순하게 갈라놓지 않는 구성이 '포르테'의 불안을 오래 유지한다.
킴보킴 감독과 박정민 촬영감독은 촬영에 앞서 “컷 수의 욕심을 버리고 한 컷이라도 제대로 찍자”는 원칙을 세웠다. 짧은 컷을 연속해서 붙이는 대신 인물과 공간을 함께 두는 시간이 길어졌다. 공포가 벌어진 뒤의 반응만 좇지 않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몇 초를 남겨두는 방식이다. 박정민 촬영감독 역시 자극적인 장면보다 인물의 불안한 내면에 카메라를 두는 방향으로 촬영했다고 밝혔다.
숲속에 놓인 피아노에서는 영화의 시각과 음악이 가장 가까이 만난다. 연주를 위해 만들어진 악기가 수풀 사이에 놓이면 익숙함은 금세 낯섦으로 바뀐다. ‘아름다운 음악이 완성될수록 사람이 하나씩 사라진다’는 설정까지 더해지면서 피아노는 창작의 도구와 불길한 징후를 동시에 품는다.
프레데릭 알바레즈가 맡은 오리지널 스코어도 연주를 장식으로 남겨두지 않는다. 피아노 선율이 커지는 구간과 소리가 빠지는 구간의 차이가 크고, 음악이 멈춘 뒤에는 주변의 작은 소리가 더 또렷하게 들린다. 박정민 촬영감독은 음악이 카메라 위치를 정하는 데에도 영향을 줬다고 설명했다. 촬영과 음악을 따로 완성한 뒤 붙이는 방식보다 연주의 흐름에 맞춰 카메라의 거리와 위치를 함께 조정한 작업이었다.
피아노 위를 기어가는 뱀도 같은 맥락에서 들어온다. 음악을 만드는 익숙한 공간 안에 숲의 생물이 들어오면서 실내와 바깥의 경계가 한 번 더 흐려진다. 스튜디오라는 전문적인 작업 공간이 자연의 질서와 뒤섞이고, 피아노 역시 안전한 사물이 아닌 불안의 일부가 된다.
'포르테'는 공포의 대상을 크게 키우기보다 익숙한 것을 조금씩 낯설게 바꾸는 데 시간을 쓴다. 숲은 아름답지만 길을 잃기 쉽고, 피아노는 익숙하지만 연주가 이어질수록 불길하다. 콘크리트 건물은 단단하지만 통유리 너머의 숲과 완전히 분리되지 않는다. 이런 대비를 계속 겹치면서 직접적인 충격이 없는 순간에도 긴장을 유지한다.
최근 아트 호러가 잔혹한 장면의 강도보다 촬영과 미술, 음악과 사운드를 앞세워 공포의 범위를 넓혀온 흐름도 '포르테'와 맞닿는다. 작품의 해외 상영 과정에서 촬영과 색채, 카메라 움직임, 사운드트랙에 대한 평가가 반복된 것도 같은 맥락이다. '포르테'는 2025년 SXSW London ‘Shivers’ 섹션에서 처음 공개된 뒤 제58회 시체스국제판타스틱영화제 경쟁 부문 ‘Noves Visions’에 초청됐고, 올해 제30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국내 관객과 만났다.
연지를 맡은 임채영 역시 이런 촬영 안에서 과장된 반응보다 공간 속의 움직임과 시선으로 인물을 이어간다. 정화를 바라보는 위치, 혼자 남는 거리, 피아노와 마주하는 순간이 달라질수록 연지에게 쌓이는 긴장도 함께 변한다. 배우의 표정을 크게 밀어붙이기보다 주변 공간과 함께 두는 촬영은 인물의 불안을 영화 전체의 질감 속에 묻어두는 쪽에 가깝다.
불길이 번지는 순간에는 앞서 이어지던 색과 온도가 크게 달라진다. 짙은 초록과 회색이 이어지던 공간에 붉은 불이 들어오면서 억눌려 있던 긴장이 한꺼번에 올라간다. 불과 검은 형상은 초반부터 반복되지 않는다. 숲과 안개, 피아노와 정적을 충분히 끌고 온 뒤에야 강한 색과 형태가 등장한다.
시체스국제판타스틱영화제는 '포르테'의 촬영과 사운드트랙을 함께 언급했고, 해외 매체들도 색채와 카메라 움직임, 촬영을 주요 특징으로 짚었다. 공포의 사건과 촬영·음악을 분리하지 않은 제작 방식이 해외에서 먼저 평가받은 셈이다.
9월 30일 개봉하는 '포르테'의 77분은 숲의 초록에서 콘크리트의 회색으로, 다시 불길의 붉은색으로 이동한다. 피아노 연주는 커졌다가 멈추고, 음악이 사라진 자리에는 정적이 남는다. 박정민의 촬영과 프레데릭 알바레즈의 음악은 사람이 사라지는 사건을 설명하기보다 그 사건이 벌어질 공간과 시간을 먼저 만들어 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