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나, 배우’, 30년 대학로의 시간을 한 사람의 생애로 기록하다

양창완·윤상현 실제 삶에서 출발한 자서전 연극…보르헤스의 겹친 시간과 만나 ‘배우로 산다는 것’으로 확장 “한 명의 노인이 숨을 거두는 것은 도서관 하나가 불타는 것과 같다.”

2026-09-20     박준식 기자
연극 '나, 배우' 보르헤스식 꿈꾸기.  사진=극단 MIR 레퍼토리 씨어터

[KtN 박준식기자]한 사람의 생애에는 연보만으로 남길 수 없는 시간이 쌓인다. 대학로에서 30년 넘게 연극배우로 살아온 사람의 삶도 그렇다. 출연작과 배역, 공연 날짜를 정리하면 이력은 남지만 무대에 오르기 직전의 두려움, 공연이 끝난 밤의 감정, 생계를 걱정하면서도 다음 작품을 선택했던 시간까지 기록되지는 않는다. 젊은 배우였던 자신과 나이를 먹은 배우가 같은 대사를 전혀 다르게 받아들이는 변화 역시 배우의 몸과 기억 속에 남는다.

극단 MIR 레퍼토리 씨어터가 9월 30일부터 대학로 스카이씨어터 2관에서 선보이는 ‘나, 배우-보르헤스식 꿈꾸기’는 바로 그 시간을 연극으로 옮긴다. 30년 이상 대학로에서 활동해 온 양창완과 윤상현의 실제 삶을 바탕으로 박희연이 대본을 쓰고 이재상이 연출한다. 양창완, 윤상현과 함께 김대흥, 유무선이 출연한다. 공연은 10월 18일까지 이어진다.

“연극 배우의 자서전은 연극으로 써야 한다”는 발상은 작품 전체를 관통한다. 소설가는 문장으로 삶을 기록하고 화가는 그림으로 시간을 남긴다. 배우에게 가장 오래 축적된 언어는 몸과 목소리, 무대다. 배우의 생애를 기록하는 방식도 결국 연극이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에서 출발했다.

“연극 배우의 자서전은 연극으로 써야 한다”  사진=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작품은 양창완과 윤상현의 30년을 연대순으로 재현하지 않는다. 2026년 가을, 텅 빈 소극장에서 대본을 읽던 노년의 배우가 30년 전 젊은 자신과 마주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미래가 막막한 청년 앞에는 이미 그 미래를 지나온 자신이 서 있다. 노년의 배우는 지나온 30년이 헛되지 않았음을 젊은 자신에게 설명하려 한다.

시간은 다시 2041년으로 넘어간다. 65세가 된 배우는 낡은 모텔에서 죽음을 앞둔 90세의 자신과 만난다. 젊은 자신에게 삶의 의미를 설명했던 사람은 이번에는 더 늙은 자신 앞에서 지금까지 붙잡고 온 연극과 자신의 삶을 다시 바라보게 된다. 30년 전의 자신과 현재의 자신, 죽음을 앞둔 미래의 자신이 같은 인물 안에서 서로를 마주하는 구조다.

과거의 열정과 미래의 허무가 만나면서 작품은 한 배우가 얼마나 성공했는지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연극을 선택하며 살아온 시간이 한 인간에게 무엇으로 남았는지를 들여다본다. 배우라는 직업이 결국 매번 사라지는 공연을 반복해서 만들어내는 일이라는 점도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한 작품이 끝나면 다른 대본을 펼치고, 젊은 배역을 맡았던 몸은 시간이 흐르면서 다른 인물을 받아들인다. 공연은 끝나지만 배우의 몸에는 지나온 작품들이 겹겹이 남는다.

‘보르헤스식 꿈꾸기’라는 부제도 작품의 시간 구조와 연결된다. 아르헨티나 작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는 서로 다른 시기의 자신이 만나는 설정을 작품에 여러 차례 사용했다. ‘타자(El otro)’에서는 나이 든 보르헤스와 젊은 보르헤스가 마주하고, ‘1983년 8월 25일(Veinticinco de agosto, 1983)’에서는 젊은 자신과 죽음을 앞둔 늙은 자신이 만난다.

‘나, 배우’는 보르헤스 작품을 무대로 옮긴 각색극이 아니다. 과거와 미래의 자신이 만나 서로를 바라본다는 구조를 실제 배우의 생애에 가져왔다. 이재상 연출이 지난해 쓴 ‘정류장’에서 저승의 문턱에 선 인물이 자신의 젊은 시절과 만나는 대목을 만든 뒤, 과거와 미래의 자신이 만나는 보르헤스의 단편들이 겹치면서 이번 작품의 형식으로 이어졌다.

배우의 삶과 보르헤스의 시간은 연극이라는 장르 안에서 자연스럽게 만난다. 배우는 현재의 몸으로 다른 시간을 살아가는 사람이다. 이미 죽은 인물을 다시 살아 있게 만들고, 수십 년 전의 시간을 오늘 관객 앞에 불러낸다. 실제 배우의 나이와 극중 인물의 나이, 과거와 현재가 한 무대에 동시에 존재한다. ‘나, 배우’는 연극이 본래 갖고 있는 시간의 성질을 배우 자신의 생애로 되돌린다.

TUKO! TUKO! ~トカゲの月の姫君~. 사진=THEATRE ATMAN,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이재상 연출의 최근 작업을 이어놓으면 이번 작품이 향하는 방향도 선명해진다. ‘AI 기도’에서는 인공지능과 인간 존재의 경계를 다뤘고, ‘전쟁터의 피크닉’에서는 전쟁의 무익함과 인간의 어리석음을 무대에 올렸다. 한국과 일본 배우들이 각자의 모국어로 공연하는 공동작업도 이어왔다. 지난해 ‘TUKO! TUKO!’는 인천과 서울, 일본 도쿄로 이어졌고, 올해 여름 ‘정류장-두 개의 이야기’에서는 현실과 저승의 두 정류장을 오가며 사랑과 선택, 운명을 블랙코미디로 풀었다.

전쟁과 인공지능, 국제협업과 사랑을 지나온 시선은 ‘나, 배우’에서 한 사람의 생애로 좁혀진다. 다루는 범위는 작아졌지만 질문은 오히려 깊어졌다. 세계의 폭력과 기술문명, 사랑과 죽음을 바라보던 연출이 이제 연극을 평생의 직업으로 선택한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간다. 결국 남는 것은 사람이 어떤 선택을 했고, 왜 그 선택을 오래 지속했는지에 관한 이야기다.

이재상 연출이 이번 작품을 두고 “미친 금권주의 시대라 할지라도 우리는 연극으로 말해야 한다”고 밝힌 것도 같은 맥락이다. 전쟁의 포격 속에서도 “나는 무용하는 사람이니까”라며 춤을 추던 우크라이나 무용수를 떠올리며, 연극인은 결국 연극으로 자신의 존재를 말해야 한다는 생각을 작품에 담았다.

배우들이 자신의 삶을 직접 꺼내놓는 부담에 대해서도 “작품의 책임은 오롯이 연출의 몫”이라고 했다. 실제 삶을 무대에 가져오는 작업에서는 한 개인의 기억을 극적 효과를 위한 재료로만 다룰 수 없다.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남길지, 기억과 허구 사이의 경계를 어디에 둘지는 자전적 공연이 반드시 감당해야 하는 부분이다.

연극 '나, 배우' 보르헤스식 꿈꾸기.  사진=극단 MIR 레퍼토리 씨어터

‘나, 배우’는 최근 공연예술에서 실제 삶과 기억을 창작의 중심으로 가져오는 흐름과도 맞닿는다. 허구의 인물을 만들어 배우에게 맡기는 전통적인 방식에서 벗어나 실제 인물의 증언과 기억, 개인사를 무대의 재료로 사용하는 다큐멘터리 연극과 자전적 공연은 국내외에서 꾸준히 확장돼 왔다. 다만 ‘나, 배우’는 실제 삶을 그대로 재현하는 방식과는 다르다. 양창완과 윤상현이 지나온 시간에서 출발하지만 보르헤스적인 시간의 교차와 미래의 자신이라는 허구를 적극적으로 끌어들인다.

실제 기억과 연극적 상상이 겹치는 지점에서 작품의 성격도 만들어진다. 30년 동안 배우로 살아온 사실은 작품의 뿌리지만 젊은 자신과 노년의 자신이 한 공간에서 만나는 순간은 연극만이 만들 수 있는 허구다. 기억을 그대로 복원하기보다 시간의 질서를 흔들어 한 사람이 자신의 삶을 다른 위치에서 바라보도록 한다.

MIR 레퍼토리 씨어터의 작업 흐름에서도 ‘나, 배우’는 새로운 방향을 만든다. 극단은 그동안 고전과 창작극, 국제 공동작업을 오가며 작품을 다시 무대에 올리고 변형하는 레퍼토리 작업을 이어왔다. 이번에는 레퍼토리의 대상이 작품에서 사람으로 넓어진다.

양창완과 윤상현으로 시작하는 배우 자서전 연극은 앞으로 30년 이상 현장을 지켜온 대학로 배우와 연극인의 삶을 차례로 무대에 올리는 장기 프로젝트로 이어질 예정이다. 한 작품을 반복하는 레퍼토리를 넘어 한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의 생애를 축적하는 방식이다.

첫 주인공이 대중적 유명세를 앞세운 배우가 아니라 오랫동안 대학로 현장을 지켜온 배우들이라는 점도 눈여겨볼 부분이다. 공연예술의 역사는 대개 작품과 극작가, 연출가를 중심으로 기록된다. 그러나 공연이 실제로 지속된 시간에는 배우와 스태프의 생애가 함께 들어 있다. 작품 목록만 남고 사람의 기억이 사라지면 연극사의 상당 부분도 함께 비게 된다.

양창완과 윤상현의 개인사가 대학로의 기록으로 확장되는 지점도 여기서 나온다. 1990년대부터 2026년까지 한 사람이 연극배우로 살아왔다면, 그 생애에는 30년 동안 달라진 대학로의 환경도 함께 들어 있다. 극장이 사라지고 새로 생겼고, 제작 방식과 관객의 소비 방식도 크게 바뀌었다. 영화와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가 거대한 영상 시장을 형성하는 동안 소극장 연극은 배우와 관객이 같은 공간에서 같은 시간을 공유하는 오래된 방식을 여전히 유지한다.

최근 공연계에서 자전적 서사와 실제 인물의 경험이 자주 무대에 오르는 흐름도 결국 ‘누구의 이야기를 기록할 것인가’와 연결된다. 거대한 역사보다 한 개인의 경험을 통해 시대를 읽고, 유명한 사건보다 한 사람이 살아낸 시간을 세밀하게 따라가는 방식이다. 개인의 기억을 공연으로 남기면서 동시에 그 사람을 둘러싼 시대와 사회를 기록한다.

‘나, 배우’가 배우의 성공담에 머물지 않으려면 실패와 망설임,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까지 함께 들어가야 한다. 30년 동안 연극을 했다는 사실만으로 지나온 모든 선택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젊은 자신 앞에서는 왜 그 길을 계속 걸었는지 설명해야 하고, 90세의 자신 앞에서는 지금 소중하게 붙잡고 있는 연극도 언젠가 내려놓아야 한다는 사실과 마주한다.

세 시기의 자신을 한 무대에 세운 이유도 결국 삶의 결과보다 과정에 있다. 젊은 사람에게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이고, 나이 든 사람에게 과거는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이다. 현재는 두 시간 사이에 잠시 놓여 있다. 배우는 그 짧은 현재를 무대 위에서 반복해 살아가는 사람이다.

공연은 막이 내리는 순간 사라진다. 영화에는 필름과 영상이 남고 책에는 문장이 남지만, 배우와 관객이 같은 공간에서 만든 시간은 같은 형태로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기록 영상이 있어도 그날 객석의 침묵과 배우의 호흡까지 복원할 수는 없다.

그래서 연극의 역사는 사람의 기억에 더 많이 의존한다. 오래전 공연에서 객석이 언제 웃었는지, 한 배우가 어느 순간부터 달라졌는지, 어떤 작품이 공연되던 시절 대학로가 어떤 곳이었는지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사라지면 함께 없어지는 기록도 많다.

이재상 신작 ‘정류장’, 한일 배우의 모국어로 풀어낸 사랑과 선택. 사진=Theatre M.I.R X THEATRE ATMAN ,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MIR 레퍼토리 씨어터가 배우들의 삶을 계속 자서전 연극으로 만들겠다는 계획은 한 사람의 기억을 무대 위에 보존하는 작업에서 출발한다. 양창완과 윤상현 다음에 또 다른 배우의 30년이 이어지고, 서로 다른 사람의 시간이 축적된다면 개인의 생애는 자연스럽게 대학로 연극의 집단기억으로 넓어진다.

한 배우가 무대를 떠날 때 사라지는 것은 배역 하나가 아니다. 실패와 선택, 함께했던 동료와 사라진 극장, 한 시대의 관객과 공연 방식까지 한 사람의 기억 속에 들어 있다.

‘나, 배우-보르헤스식 꿈꾸기’는 그 시간을 책장에 꽂는 대신 다시 무대에 세운다. 배우가 살아온 시간을 배우의 몸과 목소리로 기록하고, 개인의 기억을 연극의 언어로 다음 시간에 넘긴다. 양창완과 윤상현의 30년에서 시작한 자서전이 여러 배우의 삶으로 이어질 때, 한 사람의 개인사는 대학로 연극의 또 다른 역사로 남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