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인사이트①] '폭풍의 언덕', 사랑의 기억에 갇힌 사람들
캐서린과 히스클리프의 첫사랑, 계급과 소유를 지나 다음 세대로 이어진 상처 1939년 영화의 황야와 앨프리드 뉴먼의 선율…오래된 장면 너머에서 다시 읽는 고전
[KtN 박준식기자]히스클리프는 캐서린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는다. 자신과 결혼하면 격이 떨어진다는 말에 자리를 떠난다. 캐서린이 뒤이어 털어놓는 마음, 히스클리프가 자신보다 더 자신과 같은 존재라는 고백은 듣지 못한다. 같은 집에서 자라 서로를 누구보다 잘 안다고 믿었던 두 사람은 정작 자신들의 운명을 바꿀 순간에 서로 다른 이야기를 품게 된다.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에서 사랑은 그렇게 어긋난다. 그러나 비극을 못다 들은 고백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캐서린은 히스클리프를 사랑하면서도 그와 결혼하는 삶은 받아들이지 못한다. 히스클리프는 캐서린을 잃은 뒤에도 다른 삶을 시작하지 못한다. 한 사람은 사랑과 생활을 나눌 수 있다고 믿었고, 다른 사람은 사랑을 잃으면 자신의 존재까지 사라진다고 여겼다.
1847년 출간된 소설은 어린 시절 시작된 사랑을 두 집안과 다음 세대의 운명으로 펼쳐놓는다. 황야를 함께 걷던 연인은 헤어지지만 그들의 감정은 끝나지 않는다. 결혼과 재산, 아이들의 교육과 앞날에까지 스며든다. 사랑이 오래 남는다는 사실이 반드시 아름다운 결과를 뜻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브론테는 남겨진 사람들의 삶으로 써 내려갔다.
고전영화 속 두 사람의 모습은 조금 다르게 남아 있다. 바람 부는 황야와 어두운 저택, 창밖을 바라보는 캐서린과 그를 안고 있는 히스클리프. 줄거리보다 먼저 돌아오는 장면들이다. 영화를 다시 보고 음악을 들으며 떠올리는 사랑과, 소설을 끝까지 읽고 마주하는 사랑 사이에는 적지 않은 거리가 있다.
함께 자란 두 사람, 같아지지 않은 자리
히스클리프는 언쇼가 리버풀 거리에서 데려온 아이다. 캐서린과 같은 지붕 아래 성장하지만 가족 안에서의 자리는 불안정하다. 언쇼가 죽고 아들 힌들리가 집안을 장악하자 히스클리프는 교육받을 기회를 빼앗기고 농장 일을 하게 된다. 함께 자란 아이들의 앞날은 누가 가문의 이름과 재산을 물려받는가에 따라 갈라진다.
캐서린과 히스클리프가 어울리던 황야에는 집 안과 다른 자유가 있다. 그곳에서는 정해진 자리와 규율을 잠시 벗어날 수 있다. 하지만 황야에서의 친밀함이 집 안의 차별까지 없애지는 못한다. 캐서린에게는 돌아갈 가족의 지위가 있고, 히스클리프에게는 자신을 밀어내는 사람들의 권력이 있다. 두 사람의 유년은 훗날의 기억처럼 온전히 평등하거나 평화롭지 않았다.
캐서린에게 히스클리프는 연인에 앞서 자신의 어린 시절을 함께 살아온 사람이다. 남에게 설명할 필요도 없이 자신을 알아주는 존재, 사회가 요구하는 모습으로 바뀌기 전의 자신을 아는 사람이다. 히스클리프를 자신과 같은 존재라고 말하는 고백에는 연애의 감정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결속이 담겨 있다.
첫사랑이 한 사람의 기억을 넘어서는 지점도 여기다. 사랑했던 사람에게는 그 시절의 자신이 함께 남아 있다. 상대를 잃는 일이 자신의 일부를 잃는 일처럼 느껴질 수 있는 까닭이다. 캐서린과 히스클리프에게 이별은 새로운 관계를 선택하는 문제가 아니라, 자신을 이루고 있던 세계가 갈라지는 사건에 가깝다.
그럼에도 캐서린은 부유한 에드거 린턴과의 결혼을 선택한다. 에드거와 결혼하면 히스클리프를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회적 지위와 안정된 생활을 얻으면서 히스클리프와의 관계도 지킬 수 있다는 기대다. 어느 쪽도 버리지 않겠다는 마음이지만, 두 남자의 삶을 자신의 뜻대로 조정할 수 있다는 믿음이기도 하다.
브론테는 캐서린을 사랑을 배신한 여성이나 계급의 희생자로만 남겨두지 않는다. 깊은 감정과 허영, 애착과 자기중심성이 한 인물 안에 함께 있다. 히스클리프를 자신과 분리할 수 없는 존재로 여기면서도 그와의 결혼은 자신의 지위를 낮추는 일이라고 말한다. 사랑하는 마음속에도 자신이 속한 사회의 서열은 남아 있다.
사랑을 잃은 뒤에도 끝나지 않은 소유
재산을 갖고 돌아온 히스클리프는 더 이상 무력한 소년이 아니다. 하지만 새롭게 얻은 힘으로 다른 삶을 시작하지 않는다. 자신을 멸시했던 사람들 곁으로 돌아와 집과 재산, 관계를 차례로 장악한다. 과거의 굴욕을 벗어나는 대신 그 굴욕을 상대에게 돌려주는 쪽을 택한다.
캐서린을 향한 사랑은 변하지 않았지만 그 사랑을 품은 사람은 달라졌다. 에드거의 여동생 이사벨라와 결혼한 히스클리프는 그를 학대한다. 자신을 사랑한 사람을 또 다른 복수의 수단으로 삼은 것이다. 캐서린에게 바치는 절대적인 감정과 이사벨라에게 가하는 잔혹함은 한 사람의 삶 안에서 나란히 존재한다.
상처는 아이들에게도 이어진다. 히스클리프는 자신을 괴롭혔던 힌들리의 아들 헤어턴이 제대로 교육받지 못하도록 한다. 어린 시절 자신에게 가해졌던 박탈을 다음 세대에 되풀이한다. 캐서린의 딸과 자신의 아들 린턴의 결혼까지 재산을 차지하는 수단으로 이용한다. 아이들이 선택하지 않은 과거가 아이들의 미래를 결정한다.
히스클리프에게 캐서린의 기억은 위안만이 아니다. 그는 주변 사물과 사람에게서 끊임없이 캐서린의 흔적을 발견한다. 사랑했던 사람은 부재하지만 그 부재가 오히려 모든 것을 지배한다. 현재의 사람들은 독립된 존재로 받아들여지기보다 과거의 누군가를 닮았거나, 과거의 누군가에게 복수할 수 있는 대상으로 취급된다.
브론테는 히스클리프의 상처를 이해하게 하면서도 그가 가한 상처에서 눈을 돌리지 못하게 한다. 독자는 멸시받던 소년에게 연민을 느끼지만, 그 연민만으로 성인이 된 히스클리프의 행동을 받아들일 수는 없다. 잊지 못한 사랑의 세월과 타인을 대하는 태도는 별도로 바라봐야 한다.
소설의 이야기가 두 사람의 죽음에서 곧바로 끝나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들이 얼마나 사랑했는지뿐 아니라 그 사랑과 증오가 다른 사람들에게 무엇을 남겼는지까지 읽어야 비극의 전모가 드러난다.
영화가 남긴 황야, 음악이 불러오는 얼굴
윌리엄 와일러 감독의 1939년 영화는 소설의 긴 가족사를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의 관계에 집중시켰다. 로런스 올리비에가 히스클리프를, 멀 오베론이 캐서린을 연기했다. 다음 세대의 이야기를 제외하면서 영화는 복수의 긴 후유증보다 두 사람이 함께할 수 없었던 사랑에 무게를 실었다.
죽음을 앞둔 캐서린을 히스클리프가 안아 창가로 데려가는 장면은 그 선택을 응축한다. 창밖에는 두 사람이 함께했던 황야가 있다. 캐서린은 바라볼 수 있지만 돌아갈 수는 없다. 어린 시절의 장소와 마지막 순간의 몸이 한 화면 안에 놓인다. 긴 설명 없이도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의 거리가 드러난다.
영화의 마지막에는 두 사람의 영혼이 함께 황야를 걷는 모습이 등장한다. 살아서 이루지 못한 결합을 죽음 이후에 완성한 이미지다. 소설에서 다음 세대가 살아갈 자리를 마련하는 서사가 영화에서는 죽은 연인들의 재회로 옮겨간다.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덜어냈는지에 따라 사랑의 의미도 달라진다.
앨프리드 뉴먼의 영화음악은 배우의 얼굴과 황야의 풍경에 감정을 더한다. 화면을 떠난 선율을 다시 들을 때는 집안의 계보와 재산을 둘러싼 갈등보다 두 사람이 함께했던 순간이 먼저 떠오를 수 있다. 음악은 작품의 모든 사정을 설명하지 않으면서도 한 장면을 다시 바라보게 한다.
고전영화의 기억에는 작품을 보던 시간도 겹친다. 영화 속 연인의 얼굴과 관객 자신의 경험이 만나는 것이다. 다만 황야와 선율이 남긴 애틋함만으로 히스클리프의 생애 전체를 설명할 수는 없다. 영화가 응축한 감정을 간직한 채 소설로 돌아가면, 그 장면 바깥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시간이 다시 나타난다.
문학과 영화의 차이는 어느 쪽이 더 깊거나 정확하다는 순위로 정리되지 않는다. 영화는 두 사람의 비극을 오래 기억할 얼굴과 풍경으로 남겼다. 소설은 그 얼굴 뒤에 가려진 관계와 선택을 끝까지 따라간다. 함께 읽고 볼 때 익숙한 사랑의 이야기는 더 복잡해진다.
오래 기억하는 사랑과 함께 살아가는 사랑
'폭풍의 언덕'의 이야기는 처음부터 누군가가 전하는 과거이기도 하다. 낯선 방문자 록우드는 가정부 넬리 딘의 이야기를 통해 집안의 역사를 듣는다. 독자는 인물들의 삶을 곧바로 들여다보기보다, 그들을 보았던 사람의 설명과 기억을 거쳐 만나게 된다. 같은 사건에서도 누가 말하고 누가 듣는가에 따라 이해가 달라질 여지가 생긴다.
첫사랑을 추억하는 일 역시 당시의 감정만 보존하는 작업은 아니다. 시간이 지난 자신이 그 관계를 다시 해석하는 일이 함께 일어난다. '폭풍의 언덕'에서 못다 들은 고백과 전해 들은 이야기가 중요한 것은 사랑의 크기만큼이나 서로를 이해하는 방식이 관계를 바꾸기 때문이다.
고전의 명문장과 영화 장면, 음악을 따로 감상할 때는 그 가운데 가장 강렬한 부분이 남기 쉽다. 절대적인 사랑의 고백은 오래 기억되지만, 그 고백을 한 사람이 다른 이들에게 어떻게 행동했는지는 흐려질 수 있다. 작품을 다시 읽는 일은 아름다운 추억을 부정하는 일이 아니다. 처음에는 보이지 않았던 사람과 관계를 함께 바라보는 일이다.
소설 후반부의 젊은 캐서린과 헤어턴은 그런 재독에서 새롭게 다가오는 인물들이다. 캐서린의 딸과 힌들리의 아들인 두 사람도 처음에는 상대를 상처 입힌다. 젊은 캐서린은 글을 제대로 읽지 못하는 헤어턴을 비웃고, 헤어턴은 모욕감에 마음을 닫는다. 교육과 말씨의 차이가 인간의 가치를 가르는 기준이 된다는 점에서 부모 세대와 닮았다.
그러나 젊은 캐서린은 자신의 조롱이 헤어턴에게 상처를 주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책을 건네며 읽는 법을 가르쳐주겠다고 제안한다. 헤어턴도 거부하던 마음을 조금씩 거둔다. 두 사람의 관계는 자신들의 감정이 얼마나 강한지 확인하는 대신, 상대에게 했던 행동을 바꾸면서 달라진다.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에게 사랑이 서로는 하나라는 확신에 가까웠다면, 젊은 캐서린과 헤어턴에게는 서로의 차이를 알아가는 시간이 필요하다. 처음부터 완벽하게 이해하는 사람이 아니라, 잘못을 인정하고 다시 말을 건넬 수 있는 사람이 곁에 남는다. 함께 책을 읽는 일상은 황야의 격정보다 조용하지만 다른 미래를 가능하게 한다.
'폭풍의 언덕'은 죽어서도 잊지 못한 사랑만 남긴 소설이 아니다. 같은 집에서 같은 모욕을 물려받은 사람들이 다른 관계를 만들어가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브론테는 죽은 이들의 흔적을 지우지 않으면서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 흔적 밖으로 나갈 길을 남겼다.
영화가 두 연인을 황야에 남겨놓았다면, 소설에는 책을 사이에 두고 가까워진 두 젊은이가 남는다. 젊은 캐서린과 헤어턴은 새해 첫날 결혼해 스러시크로스 그레인지로 옮겨갈 계획을 세운다. 이전 세대가 끝내 벗어나지 못한 집을 떠나, 함께 살아갈 곳을 정하는 결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