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인사이트④] '안나 카레니나', 무도회가 끝난 뒤의 사랑
톨스토이가 나란히 놓은 안나의 열정과 키티의 실연 그레타 가르보의 흑백 영화에서 결혼 이후의 시간을 다룬 소설로
[KtN 박준식기자]키티는 무도회에서 다섯 청년의 춤 신청을 거절한다. 마주르카는 브론스키와 출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아직 신청을 받지는 않았지만, 이전에도 함께 춤을 췄던 만큼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브론스키의 시선은 안나에게 향한다. 레프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에서 두 사람의 사랑이 시작되는 저녁은 다른 한 사람의 기대가 무너지는 저녁이기도 하다.
키티는 검은 벨벳 드레스를 입은 안나를 바라본다. 처음에는 아름다움에 감탄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안나의 표정에서 특정한 한 사람을 향한 기쁨을 알아차린다. 브론스키의 얼굴에도 같은 감정이 떠오른다. 톨스토이는 연인들의 설렘을 두 사람 사이에만 가둬두지 않는다. 가까이에서 그 변화를 지켜보는 키티의 고통까지 함께 기록한다.
무도회에 앞서 키티는 레빈의 청혼을 거절했다. 브론스키와의 결혼을 기대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마음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여자는 자신 역시 다른 사람에게 선택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브론스키에게 보냈으나 돌아오지 않았던 눈길은 이후 여러 해가 지나도록 키티에게 수치와 아픔으로 남는다.
첫사랑을 기억하는 방식은 이 짧은 장면에서 이미 복잡해진다. 설레던 순간과 상처받던 순간은 같은 장소에 남을 수 있다. 안나와 브론스키의 만남만 따라가면 운명적인 사랑의 무대였을 무도회가 키티의 시선에서는 자기 확신이 무너진 장소가 된다. 누가 기억하느냐에 따라 같은 음악과 같은 춤의 의미가 달라진다.
그렇다고 '안나 카레니나'를 첫사랑의 실패담으로만 읽을 수는 없다. 안나는 이미 남편과 아들이 있는 인물이다. 브론스키와의 관계에는 새로운 감정의 발견과 함께 기존 가족의 삶을 바꾸는 선택이 놓여 있다. 톨스토이는 사랑이 시작됐다는 이유만으로 그 이전의 시간과 책임을 지우지 않는다.
소설의 첫 사건부터 가족의 균열이다. 안나의 오빠 스티바가 아이들의 가정교사와 관계를 맺은 사실이 드러나고, 아내 돌리는 남편과 더는 함께 살 수 없다고 생각한다. 안나는 두 사람을 화해시키기 위해 모스크바로 온다. 다른 부부의 결혼을 지키려 찾아온 여자가 자신의 결혼을 뒤흔들 사랑을 만나는 구조다.
스티바와 안나의 이후 삶에는 뚜렷한 차이가 생긴다. 스티바는 외도 뒤에도 사람들의 호의를 얻으며 사교생활을 이어간다. 돌리는 아이들을 돌보고 집안을 유지하는 부담을 떠안는다. 반면 안나가 브론스키와의 관계를 선택한 뒤에는 사교계의 배척이 따라온다. 남녀의 부정을 같은 잣대로 판단한다는 사회의 명분은 인물들이 치르는 대가 앞에서 흔들린다.
안나가 극장에서 모욕을 당하는 대목은 배척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구체적으로 드러낸다. 사람들 앞에 모습을 보이는 일 자체가 비난의 이유가 된다. 브론스키에게는 여전히 드나들 수 있는 사회가 있지만, 안나에게 허용되는 관계와 장소는 좁아진다. 함께 시작한 사랑이 두 사람에게 같은 생활을 남겨주지는 않는다.
안나는 아들 세료자와 떨어져 지내는 고통도 겪는다. 브론스키를 사랑하는 마음이 아들을 향한 마음을 대신하지 못한다. 아들의 생일에 찾아가는 장면에는 연애의 행복만으로 채울 수 없는 결핍이 담긴다. 한 사람과 함께 살기 위해 떠나온 뒤에도, 그전에 사랑했던 사람과의 관계는 계속된다.
사랑에 더 많은 것을 걸수록 상대의 작은 변화가 위협으로 느껴지는 과정도 소설은 놓치지 않는다. 안나에게 브론스키의 관심은 점차 생활 전체를 지탱하는 근거가 된다. 브론스키는 사랑하면서도 자신의 활동과 시간을 원한다. 기다리는 사람과 밖에서 시간을 보내는 사람 사이에 같은 하루가 서로 다르게 쌓인다.
이 갈등을 안나의 질투나 브론스키의 변심 가운데 하나로만 설명하기는 어렵다. 두 사람의 감정에는 사회적 고립과 불안정한 가족관계가 들어와 있다. 사랑이 진실하다는 확신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일들이 늘어난다. 처음 서로에게 끌렸던 순간이 강렬할수록, 이후의 일상이 그 순간과 달라졌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도 어려워진다.
톨스토이는 이러한 관계 옆에 레빈과 키티의 시간을 길게 놓는다. 무도회에서 좌절한 키티는 그날의 수치심만으로 규정되는 인물로 남지 않는다. 청혼을 거절당한 레빈에게도 이후의 삶이 있다. 두 사람은 다시 만나 과거에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던 지점을 마주한다.
마음을 확인하는 장면에서 레빈과 키티는 분필로 단어의 첫 글자들을 적는다. 직접 말하기 어려운 질문과 답을 상대가 알아맞힌다. 한때의 거절이 영원한 거절이었는지, 지나간 일을 받아들일 수 있는지 조심스럽게 뜻을 주고받는다. 무도회에서 타인의 시선을 좇던 키티가 이번에는 눈앞에 있는 사람의 말을 읽는다.
다만 결혼이 두 사람을 완성된 인간으로 만들지는 않는다. 레빈은 질투하고 성급하게 판단하며, 키티와의 생활이 자신이 상상했던 모습과 다르다는 사실에 당황한다. 서로 사랑한다는 데 동의한 뒤에도 생활의 습관과 감정의 속도는 맞춰야 한다. 소설은 청혼의 성공 이후에도 상당한 시간을 남겨둔다.
레빈의 형 니콜라이가 위독해졌을 때 그 차이가 선명해진다. 레빈은 형의 고통 앞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괴로워한다. 키티는 의사를 부르고, 침구를 바꾸고, 병실을 정돈하며 환자가 조금이라도 편안하게 누울 수 있도록 움직인다. 죽음을 이해하려 애쓰는 남편 곁에서 당장 줄일 수 있는 불편을 찾아낸다.
레빈이 키티를 새롭게 알아가는 순간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잘 안다고 생각했던 확신은 함께 어려운 일을 겪는 동안 수정된다. 무도회의 매력과 청혼의 기쁨만으로는 알 수 없었던 성품이 돌봄의 과정에서 드러난다. 첫인상 이후에 쌓이는 시간이 관계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키티의 돌봄을 여성의 당연한 역할로만 칭송하면 돌리가 감당하는 생활의 무게를 다시 놓치게 된다. 소설에는 가족을 유지하는 노동이 여성에게 집중되는 모습도 담겨 있다. 레빈과 키티의 결혼을 안나의 삶과 나란히 읽되, 한쪽의 행복을 근거로 다른 쪽의 파국을 개인의 잘못으로만 돌릴 수 없는 이유다.
1935년 클래런스 브라운 감독의 영화 '안나 카레니나'는 그레타 가르보의 안나와 프레드릭 마치의 브론스키를 중심으로 이 방대한 이야기를 압축한다. 모린 오설리번이 키티를 연기한다. 원작의 여러 가족을 따라가던 시선은 안나의 사랑과 상실에 집중되고, 관객에게 남는 기억도 가르보의 얼굴을 중심으로 모인다.
무도회에서 안나와 브론스키가 춤추는 장면은 그 기억의 한가운데 있다. 검은 드레스를 입은 안나, 가까이에서 마주 보는 두 사람, 그 관계를 바라보는 키티가 같은 공간에 놓인다. 춤은 감정을 말로 고백하기 전에 서로의 관심을 드러내는 행동이 된다. 누가 누구와 춤추는지가 곧 누가 누구를 기다리게 하는지를 결정한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영화 전체의 줄거리는 희미해져도 두 사람이 춤추던 모습은 먼저 떠오를 수 있다. 가르보의 안나가 지닌 매력은 비극의 결말을 알고 있는 관객에게도 그 순간의 설렘을 전달한다. 다만 원작을 함께 읽으면 기억 속 화면의 바깥에 서 있던 키티도 다시 보인다. 아름다운 만남을 바라보던 또 한 사람의 저녁이 복원된다.
영화는 안나와 아들의 관계에도 무게를 둔다. 생일을 맞은 아들을 찾아갔다가 다시 떠나야 하는 안나의 모습에는 연인을 선택한 뒤 감당해야 했던 상실이 응축된다. 가르보의 안나는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린 여인이라는 설명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떠나온 관계를 여전히 붙잡고 싶어 하는 어머니의 얼굴이 함께 남는다.
영화음악은 허버트 스토다트가 맡았다. 차이콥스키의 '예브게니 오네긴'에서 가져온 음악도 사용됐다. 원작 소설의 인물들이 영화로 옮겨오는 과정에 러시아 음악의 선율이 더해진 셈이다. 음악은 시대와 장소의 분위기를 형성하면서, 대사로 설명되지 않는 기대와 불안을 화면에 이어 붙인다.
특히 무도회의 춤곡은 등장인물들이 실제로 듣고 몸을 움직이는 음악이다. 키티에게 마주르카는 브론스키의 마음을 확인할 기회이고, 안나와 브론스키에게 춤은 서로에게 가까워지는 시간이다. 같은 음악이 흐르는 동안 세 사람은 전혀 다른 일을 겪는다. 장면을 다시 떠올릴 때 춤곡은 사랑의 시작과 기다림의 실패를 함께 불러낸다.
첫사랑을 한 곡의 음악이나 한 장소로 기억하는 일도 이와 닮아 있다. 함께 있었던 사실은 분명해도 그때의 의미까지 같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키티가 확신했던 미래는 브론스키에게 같은 무게의 약속으로 존재하지 않았다. 처음의 설렘을 되짚는 기억에는 당시에는 알아채지 못했던 감정의 차이도 남아 있다.
고전을 짧은 영화 장면이나 분위기별 음악 재생목록으로 접하면 무도회의 아름다움이 작품 전체를 대표하기 쉽다. 강렬한 만남과 이별은 짧게 떼어놓아도 감정이 전달된다. 반면 결혼 뒤의 다툼, 병실에서의 돌봄, 아이를 키우며 생기는 변화는 앞뒤의 시간을 함께 읽어야 의미가 쌓인다.
'안나 카레니나'를 다시 읽는 일은 그렇게 기억에서 생략된 시간을 되찾는 일이 된다. 안나와 브론스키의 열정만 남아 있던 독자는 키티의 실연을 만나고, 키티의 결혼을 행복한 결말로 기억하던 독자는 그 뒤에도 계속되는 갈등을 읽는다. 처음 사랑한 순간의 강도와 오래 함께 살아가는 능력은 서로 다른 시간 속에서 드러난다.
톨스토이는 안나의 죽음에서 소설을 끝내지 않는다. 마지막 제8부에는 남겨진 브론스키의 모습과 함께 레빈의 생활과 사유가 이어진다. 누군가의 사랑이 파국에 이른 뒤에도 다른 집에서는 아이가 자라고, 부부가 다투고, 하루의 일이 계속된다. 비극의 충격이 다른 삶의 시간을 모두 멈추게 하지는 않는다.
소설 말미에서 키티는 아이를 목욕시키다가 레빈을 부른다. 아이가 부모를 알아본다는 작은 변화에 두 사람이 함께 기뻐한다. 무도회에서 브론스키의 시선을 기다리던 키티는 이제 남편과 아이의 반응을 살피고 있다. 마지막에 레빈은 앞으로도 화를 내고 아내를 이해하지 못하는 순간이 있으리라고 생각하면서, 자신의 일상에 선한 의미를 더할 수 있다는 믿음에 도달한다. '안나 카레니나'의 마지막 문장은 그 생각에 놓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