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인사이트⑥] '밀회', 끝내 하지 못한 작별 인사
노엘 카워드의 희곡 '정물'에서 시작된, 역 구내 찻집의 짧은 사랑 데이비드 린의 흑백 화면과 라흐마니노프의 선율에 남은 기억의 자리
[KtN 박준식기자]노엘 카워드의 희곡 '정물'에서 로라와 앨릭은 역 구내 찻집에서 마지막으로 만난다. 앨릭은 남아프리카로 떠날 예정이다. 두 사람에게는 함께 앉아 있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러나 작별을 나눠야 할 자리에 로라의 지인이 끼어든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의 평범한 수다가 두 사람의 마지막 시간을 채운다.
1936년 무대에 오른 이 짧은 희곡은 사랑의 시작과 끝을 하나의 장소에 담았다. 가상의 밀퍼드 정거장에 있는 찻집이다. 다섯 장면이 이어지는 동안 계절이 바뀌고 인물들의 관계도 달라지지만, 무대는 그곳에 머문다. 손님들이 기차를 기다리고, 종업원은 주문을 받고, 누군가는 서둘러 자리를 뜬다. 두 사람이 겪는 변화는 그 일상 속에서 진행된다.
첫 만남의 계기도 작다. 기차를 기다리던 로라의 눈에 이물질이 들어가고, 의사인 앨릭이 이를 제거해준다. 도움이 필요한 순간과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우연히 만난다. 그때까지 두 사람은 서로의 다음 주를 기다리는 사이가 아니다.
이후의 만남이 처음의 우연을 바꾼다. 인사를 나누던 상대와 점심을 먹고 영화를 보게 되면서, 짧은 외출에 특별한 시간이 생긴다. 희곡은 그 모든 일을 무대 위에 펼쳐놓지 않는다. 찻집으로 돌아온 두 사람의 대화 속에 바깥에서 보낸 시간이 들어온다. 관객은 이전보다 가까워진 말투와 서로를 대하는 태도를 통해 관계의 깊이를 헤아린다.
한 장소를 거듭 보여주는 형식은 작은 차이를 크게 만든다. 처음에는 낯선 사람과 나누는 대화였던 것이 어느 순간 다음 만남을 약속하는 말이 된다. 다시 시간이 흐르면 헤어질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가 같은 자리에서 오간다. 배경이 익숙해질수록 그 안에서 달라진 마음이 선명해진다.
로라와 앨릭에게는 각각 배우자와 아이들이 있다. 이들의 관계를 생애 첫 연애라는 뜻의 첫사랑으로 부를 수는 없다. 다만 이미 익숙해졌다고 믿었던 생활 속에서 자신의 감정이 낯설게 깨어난다는 점은, 첫사랑을 회상할 때 떠올리는 감각과 닿아 있다. 누군가를 만나기 전의 시간이 길어지고, 짧은 대화를 오래 되새기며, 평범했던 장소에 혼자만 아는 의미가 생기는 경험이다.
그 감정에는 기쁨과 함께 부담이 따라온다. 두 사람이 만나기 위해 비워낸 시간의 바깥에는 가족의 생활이 계속되고 있다. 만남이 소중해질수록 그 생활에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도 분명해진다. 희곡 속 사랑은 다음 약속을 기다리는 마음과 그 약속을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 사이에서 흔들린다.
카워드는 찻집을 이 두 사람만의 공간으로 비워두지 않는다. 찻집을 관리하는 머틀과 철도 직원 앨버트의 말다툼과 농담이 주변을 채운다. 로라와 앨릭의 조심스러운 태도 곁에는 훨씬 거리낌 없이 호감을 드러내는 사람들도 있다. 같은 공간에서도 인물마다 감정을 표현하는 방식과 허용된다고 느끼는 범위가 다르다.
이런 주변 인물들이 있기에 찻집은 더욱 구체적인 장소가 된다. 두 사람에게는 잊을 수 없는 만남의 자리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생계를 이어가는 일터이며 기차를 기다리는 동안 잠시 앉는 곳이다. 하나의 탁자가 모든 사람에게 같은 의미를 갖지는 않는다.
마지막 만남을 방해하는 돌리 역시 그 차이 안에 있다. 그는 두 사람의 사정을 모른다. 반가운 지인을 발견해 말을 걸었을 뿐이다. 로라가 침묵 속에서 견디는 감정과 돌리가 이어가는 이야기는 같은 시간에 놓여 있으면서도 좀처럼 만나지 않는다.
이 장면의 아픔은 악의를 가진 사람이 없어도 작별이 어긋날 수 있다는 데 있다. 마지막이라는 사실이 두 사람에게 충분한 시간을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기차는 정해진 때에 떠나고, 돌리의 대화는 계속된다. 희곡에서 앨릭은 형식적인 악수를 남기고 자리를 떠난다.
'정물'이라는 제목을 이 공간에 겹쳐 읽으면, 겉으로 드러나는 풍경과 그 안에서 벌어지는 변화 사이의 간격이 떠오른다. 찻집은 여전히 찻집이다. 그러나 처음 만났을 때와 마지막으로 헤어질 때, 두 사람에게 그 장소는 전혀 다른 곳이 되어 있다. 사랑은 공간을 바꾸지 않고도 그 공간을 다시 바라보는 사람을 바꾼다.
데이비드 린은 이 희곡을 1945년 영화 '밀회'로 옮기며 시간의 순서를 바꿨다. 영화는 두 사람의 마지막 만남을 먼저 보여준다. 관객은 아직 그들이 누구이며 어떤 시간을 함께 보냈는지 알지 못한다. 어딘가 불편해 보이는 남녀와 말을 멈추지 않는 지인을 바라볼 뿐이다.
이후 영화는 로라의 회상을 따라 처음으로 돌아간다. 셀리아 존슨이 연기하는 로라의 목소리가 만남의 과정을 들려주고, 트레버 하워드가 연기하는 앨릭과 함께 보낸 시간이 화면에 펼쳐진다. 찻집에 모여 있던 희곡의 이야기는 거리와 극장, 식당과 가정으로 넓어진다.
그러나 공간의 확장보다 더 큰 변화는 로라의 마음속으로 들어가는 목소리다. 로라는 남편에게 모든 일을 털어놓는 모습을 마음속에서 그린다. 관객이 듣는 긴 이야기는 실제로 남편 앞에서 이루어진 고백이 아니다. 말하고 싶은 사람이 가까이 있는데도 말할 수 없는 사정이, 화면의 일상과 목소리의 격차를 만든다.
셀리아 존슨의 얼굴에는 그 격차가 남는다. 대화를 이어가면서도 시선이 잠시 머뭇거리고, 상대를 바라보다가 눈을 내린다. 앨릭이 자신의 의료 활동을 이야기할 때 로라가 그를 바라보는 장면에서는, 무슨 말을 나누느냐만큼 그 말을 듣는 얼굴이 중요해진다. 상대의 일에 귀 기울이던 시간이 그 사람 자체에 마음을 기울이는 시간으로 바뀐다.
영화가 마지막 만남으로 돌아오면 처음의 장면도 달라진다. 앞서 보았던 어색한 침묵에는 이제 함께 보낸 시간이 들어 있다. 돌리의 말이 계속되는 동안 두 사람이 무엇을 잃고 있는지 관객은 안다. 같은 장면을 두 번째로 보면서, 첫 번째에는 알아듣지 못했던 침묵을 읽게 된다.
영화에서 앨릭은 떠나며 로라의 어깨에 잠시 손을 얹는다. 길게 붙잡거나 작별의 말을 충분히 나눌 수 없는 자리다. 손이 머무는 시간은 짧지만, 관객은 그 손길에 앞서 있었던 만남들을 기억한다. 작은 몸짓이 한 관계의 마지막 장면이 된다.
오래된 영화를 떠올릴 때 줄거리보다 이런 순간이 먼저 돌아오는 일이 있다. 역의 이름이나 대화의 순서는 흐려져도 어깨 위에 잠시 머물렀던 손은 남는다. '밀회'는 그 짧은 동작을 이해하기 위해 한 사람의 시간을 따라가게 한다. 장면의 크기는 동작의 크기보다 그 앞에 쌓인 시간에서 생긴다.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은 그 시간에 또 하나의 층을 만든다. 영화가 사용한 것은 이미 존재하던 협주곡이며, 피아노 연주는 아일린 조이스가 맡았다. 로라와 앨릭이 대화 속에서 조심스럽게 눌러두는 감정 곁으로 피아노와 관현악의 큰 흐름이 밀려온다.
음악은 인물들의 단정한 차림과 절제된 말투 속에 담기지 않는 동요를 들려준다. 표정은 가라앉아 있어도 마음속에서는 훨씬 많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관객은 소리로 경험한다. 로라의 회상과 음악이 포개지면서, 평범해 보이는 하루에 그 자신만이 아는 강도가 생긴다.
영화 밖에서 같은 곡을 다시 듣는 순간에는 기억의 방향이 바뀐다. 음악을 따라 역 구내 찻집이 떠오르고, 그 장면을 통해 오래전의 누군가나 미처 끝내지 못한 대화가 생각날 수 있다. 작품 속 인물의 기억을 따라갔던 관객이 자신의 기억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첫사랑에 관한 기억도 이런 식으로 남는다. 한 사람의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또렷하게 보존하기보다, 몇 가지 장면과 소리에 오랜 시간이 모인다. 함께 앉았던 자리, 헤어지기 직전의 말투, 그 무렵 들었던 음악이 뒤늦게 한 시절의 표정이 된다.
추억을 사진이나 짧은 영상, 선곡 목록으로 간직할 때에도 그 조각 앞뒤의 시간은 대부분 생략된다. '밀회'의 첫 장면은 그렇게 남겨진 조각을 닮았다. 영화는 그 장면으로 돌아오기까지 두 사람의 시간을 들려준다. 고전을 다시 읽고 보는 일에는, 익숙한 이미지 뒤에 어떤 삶이 있었는지 천천히 되찾는 과정도 들어 있다.
이 지점에서 역 구내 찻집은 오늘의 카페와 이어진다. 한 사람이 오래 기억하는 자리에서도 다른 사람은 아무 일 없이 커피를 마시고 떠난다. 공간에는 서로 다른 사연이 겹쳐 있지만, 그 사연은 누군가 말하기 전까지 드러나지 않는다. 문학의 한 장면이나 함께 듣는 음악은 그 말을 시작할 작은 계기가 될 수 있다.
같은 작품을 읽었다고 같은 기억을 나누게 되는 것도 아니다. 누군가는 로라의 망설임에, 누군가는 집에서 기다리는 남편에게 마음이 머물 수 있다. 마지막 인사를 방해한 돌리를 보며 자신이 미처 알아채지 못했던 타인의 사정을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나의 작품을 사이에 두면 서로 다른 경험이 대화를 시작할 자리를 얻는다.
구띠커피갤러리가 문학과 고전영화, 음악의 모티프를 바탕으로 문화 플랫폼을 개발하려는 구상도 이러한 만남과 맞닿아 있다. 한 작품을 함께 읽고 그 안의 장면과 선율을 나누는 동안, 각자의 기억이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되는 공간이다.
그 자리에서 '정물'을 다시 읽는다면 영화의 마지막 손길과 함께 희곡의 짧은 악수도 떠오를 것이다. 표현은 달라도 두 작품에는 끝내 충분히 말하지 못한 시간이 남아 있다. 독자와 관객은 그 빈자리를 저마다 다른 경험으로 이해한다.
'밀회'의 마지막에 로라는 집에 있다. 남편 프레드는 아내가 마음속으로 먼 곳에 다녀왔음을 느끼고, 돌아온 그를 맞는다. 그가 모든 사정을 알고 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두 사람 사이에는 여전히 말로 설명되지 않은 시간이 놓여 있다.
로라는 남편의 품에서 운다. 역에서 다 하지 못한 작별과 다시 이어가야 할 생활이 그 한 장면에 함께 머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