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능한 사랑②] 이창동 8년 만의 장편, 노동의 상처에서 ‘찍는 사람의 윤리’까지
2009년 대량해고와 파업 진압에서 출발한 구상, 한 차례 접었다 다시 영화로 다큐멘터리 감독 예지가 들어오며 노동·계급에서 창작자의 책임까지 서사 확장 ‘버닝’ 이후 8년, 넷플릭스 첫 협업에서도 감독 독립성 유지한 164분
[KtN 김동희기자]이창동 감독이 ‘가능한 사랑’을 처음 떠올린 출발점에는 대량해고와 노동자의 삶이 있었다. 직장을 잃은 최호석과 아내 안미옥의 생활을 따라가던 영화는 다큐멘터리 감독 이예지와 남편 상우를 만나면서 방향을 넓힌다. 노동자의 고통만 바라보던 카메라가 어느 순간 고통을 기록하는 사람에게도 향한다. 무엇을 찍을 것인지뿐 아니라 누가 누구를 찍고, 타인의 삶을 영화로 옮기는 사람은 어디에 서 있어야 하는지가 164분의 서사 안으로 들어왔다.
‘버닝’ 이후 8년 만의 장편이라는 시간도 단순한 공백으로 남지 않았다. 이창동 감독은 새 영화를 시작하기 전에 작품이 자신과 관객, 영화 자체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확신해야 한다고 밝혀왔다. 확신이 서지 않으면 각본이나 준비가 진행된 뒤에도 멈출 수 있다는 설명이다. ‘가능한 사랑’이 오래 걸린 이유도 같은 기준에서 찾았다.
1997년 ‘초록물고기’부터 이창동 영화의 인물들은 대체로 사회 변화의 가장자리에서 살아왔다. ‘박하사탕’은 한 남자의 무너진 생을 거꾸로 따라가며 개인의 파탄과 한국 현대사를 포갰고, ‘오아시스’는 장애와 빈곤 속에서 사회 밖으로 밀려난 두 사람을 바라봤다. ‘밀양’에서는 상실과 종교, 용서가 한 여성의 삶 안에서 충돌했고, ‘시’는 타인의 고통과 죄책감을 언어와 윤리의 문제로 가져갔다. ‘버닝’에서는 청년 세대의 불안과 계급 격차를 설명되지 않는 실종과 욕망 속에 놓았다.
‘가능한 사랑’에서도 개인의 감정과 사회적 조건을 분리하지 않는 방식은 이어진다. 달라진 부분은 감독과 카메라의 위치가 이전보다 노골적으로 이야기 안에 들어왔다는 점이다. 호석은 해고 노동자이고 미옥은 호석과 삶을 함께 견뎌온 아내다. 예지는 두 사람을 찍으려는 다큐멘터리 감독이다. 예지가 노동자의 삶에 접근하는 순간 영화는 계급의 문제와 함께 기록하는 행위 자체를 다루기 시작한다.
이창동 감독은 10여 년 전 대량해고와 파업, 강제 진압을 접한 뒤 노동자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려고 했지만 한 차례 중단했다고 밝혔다. 당사자들의 고통에 자신이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 그 고통을 극영화로 옮기는 일이 정직한지 확신하기 어려웠다는 이유였다. 베니스국제영화제에 제출한 감독의 글에도 대량해고와 파업 진압에 충격을 받은 뒤 영화화를 고민했지만 현실의 고통을 서사영화로 만드는 문제 앞에서 망설였다는 설명이 담겼다.
구상은 시간이 흐르면서 다시 움직였다. 해고와 파업만으로 이야기를 밀어붙이는 대신 노동자를 촬영하는 다큐멘터리 감독 부부를 집어넣었다. 이창동 감독은 예지와 상우가 들어오면서 비로소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타인의 삶을 비추는 감독이 얼마나 진실하게 상대를 말할 수 있는지, 영화를 만드는 사람의 태도와 윤리를 작품 안에서 함께 다룰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예지는 호석과 미옥을 착취하려고 접근하는 인물로만 그려지지 않는다. 노동자의 현실에 관심을 갖고 영화를 만들려 하며 미옥에게 친밀하게 다가간다. 다만 카메라를 든 순간 위치의 차이가 생긴다. 누구를 찍을지 선택하고, 질문을 고르고, 촬영한 시간을 다시 편집해 하나의 이야기로 만드는 권한은 예지에게 있다. 호석과 미옥에게는 살아낸 현실이지만 예지에게는 창작의 재료가 될 수 있다.
‘가능한 사랑’에서 감독의 자기반성은 그래서 영화 밖 해설에 머물지 않는다. 노동자 부부를 관찰하는 예지를 등장시킨 뒤 관객이 예지의 시선까지 다시 바라보게 만든다. 관객은 호석과 미옥의 삶을 보는 동시에 누군가의 삶을 본다는 행위에 포함된 거리와 권력을 함께 의식하게 된다. 뉴욕영화제도 작품을 소개하면서 경제적 불안뿐 아니라 논픽션 영화 제작의 윤리를 주요한 축으로 짚었다.
노동에 대한 시선도 10여 년 전 처음 구상했을 때와 달라졌다. 이창동 감독은 해고와 파업의 문제를 넘어 노동 자체를 바라보는 사회의 방식이 바뀌었다고 설명했다. 기술 변화가 빠르게 진행되는 시대에는 직업이 사라지는 문제가 생계에 그치지 않고 개인이 자신을 인식하는 방식까지 흔든다는 판단이다. 8월 제작보고회에서도 직업이 정체성을 형성하기 때문에 해고가 일상과 정체성을 함께 바꾼다고 말했다.
호석의 상태는 이런 변화가 한 사람의 몸과 관계에 남긴 결과에 가깝다. 해고 뒤에도 노동자의 이름으로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남편과 아버지, 친구와 한 개인으로 생활해야 한다. 미옥 역시 ‘해고 노동자의 아내’라는 한 줄 안에 갇혀 있지 않는다.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도 자신의 욕망을 갖고 다른 사람의 삶을 바라본다. 사회구조가 인간을 압박하지만 인물을 사회구조의 표본으로만 처리하지 않는 이창동 영화의 방식이 두 사람에게 그대로 적용된다.
예지와 상우 역시 계급을 대표하는 기호에 머물지 않는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다고 해서 갈등과 결핍에서 자유롭지 않고, 타인의 고통에 관심을 갖는다고 해서 상대를 완전히 이해할 수도 없다. 이창동 감독은 21일 기자간담회에서 작품을 해고 노동자의 이야기, 계급 갈등, 영화를 만드는 사람의 윤리와 태도,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로 모두 읽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현실을 한 가지 주제로 단순하게 정리하는 대신 서로 다른 층위가 동시에 움직이는 상태를 담으려 했다는 설명이다.
‘가능한 사랑’의 사랑도 남녀 간 감정에만 놓이지 않는다. 이창동 감독은 노동과 자본 같은 힘이 삶을 규정하더라도 인간이 자유를 향해 움직일 수 있으며, 그런 욕망 자체를 사랑의 한 형태로 생각했다고 밝혔다. 삶에서 마주하는 사랑과 결국 타인에게 건네야 하는 사랑까지 영화 안에 담고자 했다는 설명이다.
감독의 전작을 돌아보면 사랑은 늘 다른 조건과 부딪쳤다. ‘오아시스’의 사랑에는 장애를 둘러싼 사회의 시선이 있었고, ‘밀양’에서는 상실과 신앙이 사랑과 용서의 가능성을 압박했다. ‘시’에서는 아름다움을 말하는 언어와 타인의 고통을 외면할 수 없는 윤리가 충돌했다. ‘가능한 사랑’에서는 노동과 계급, 돈과 카메라가 관계의 조건으로 들어온다. 사랑만 따로 떼어 순수한 감정으로 보지 않고 사랑이 놓인 경제적·사회적 위치까지 함께 따라가는 방식이다.
164분이라는 상영시간도 이런 접근과 연결된다. 사건을 빠르게 전진시키기보다 네 인물의 관계가 조금씩 달라지는 시간을 길게 축적한다. ‘가능한 사랑’의 촬영은 김지용, 편집은 김다원, 미술은 장민우, 음악은 정재일이 맡았다. 베니스 공식 경쟁부문에 제출된 작품은 이창동 감독과 오정미 작가가 공동으로 각본을 썼다.
미장센과 영화의 공기는 미국 아카데미영화상 국제장편부문 한국 출품작 선정 과정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심사위원단은 영화 전체를 누르는 공기를 만들어내는 톤과 미장센, 노동운동의 한 단면을 복합적으로 다룬 연출, 입체적인 인물과 관계의 다층성을 선정 이유로 들었다. 이창동 감독의 시선과 고민이 집약됐다는 평가도 포함됐다.
이창동 영화에서 미장센은 인물을 대신해 의미를 설명하는 장식보다 사람이 놓여 있는 조건을 오래 바라보는 수단에 가깝다. ‘가능한 사랑’도 해고 노동자의 현실을 거친 이미지로 밀어붙이거나 부유한 부부의 공간을 단순한 과시의 대상으로 만들지 않는다. 경제적 차이는 인테리어와 옷차림 같은 외형만이 아니라 이동할 수 있는 범위, 시간을 사용하는 방식, 타인을 대하는 태도와 선택의 폭에 스며든다.
‘버닝’에서도 계급 격차는 종수와 벤의 재산 차이를 설명하는 대사보다 두 사람이 살아가는 공간과 생활 방식에서 더 직접적으로 드러났다. ‘가능한 사랑’에서는 두 부부가 실제로 가까워지고 같은 공간에서 시간을 보내기 때문에 차이가 더 복잡해진다. 멀리 떨어져 있을 때 선명했던 계급선이 친밀해질수록 흐려지는 듯하다가 예상하지 못한 순간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
이번 작업에는 제작 방식의 변화도 있었다. 이창동 감독에게 넷플릭스와의 첫 영화 작업이다. 애초 극장영화 방식의 투자를 모색했지만 국내 투자 확보가 쉽지 않았고, 제작사 파인하우스필름 이준동 대표는 지난해 국내 투자자들이 관심을 보이면서도 투자를 결정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한국 영화 투자시장의 위축을 배경으로 설명했다.
넷플릭스는 초기부터 작품에 관심을 보였고 극장영화 투자를 찾는 동안 기다린 뒤 제작에 참여했다. 이창동 감독은 제작 전 과정에서 넷플릭스가 별도의 간섭이나 요구를 하지 않았고 감독의 독립성을 인정했다고 밝혔다. 이전 작품들과 비교해 가장 편하게 작업할 수 있었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넷플릭스 제작이라는 형식이 이창동의 연출 방식을 짧고 빠르게 바꾸지는 않았다. 164분이라는 길이부터 일반적인 스트리밍 콘텐츠의 속도감과 거리가 있다. 이야기를 단순한 계급 갈등으로 압축하지 않고 노동자의 긴 증언과 부부 사이의 침묵, 상대의 표정을 살피는 시간을 남겼다. 플랫폼이 달라졌지만 이창동 영화가 인물을 기다리는 방식은 유지됐다.
8년이라는 시간 동안 영화 바깥의 환경도 크게 달라졌다. 코로나19를 거치며 극장과 관객의 관계가 흔들렸고, 인공지능과 자동화가 일자리와 노동의 의미를 빠르게 바꾸고 있다. 이창동 감독은 베니스에서 지난 8년 동안 인간관계 자체가 근본적으로 변했다고 말했고, 노동의 가치가 점점 낮아지는 시대에 노동자의 삶과 영화 만드는 사람의 일이 서로 떨어져 있지 않다고 설명했다.
1990년대 후반 ‘초록물고기’가 도시 개발과 조직의 폭력 속에서 밀려나는 개인을 바라봤다면, 2026년의 ‘가능한 사랑’은 노동을 잃은 사람이 자본과 기술, 카메라와 만나는 자리까지 이동했다. 사회가 달라졌고 인물의 직업과 생활도 달라졌지만, 이창동 감독은 다시 한 개인이 사회의 변화와 맞부딪칠 때 무엇을 잃고 무엇을 끝까지 붙잡는지를 따라간다.
베니스국제영화제는 ‘가능한 사랑’에 은사자상-심사위원대상을 수여했고 국제비평가협회는 경쟁부문 FIPRESCI상 수상작으로 선정했다. 공식 경쟁부문 심사 결과와 별개로 비평가들이 같은 작품을 선택했다는 점도 이창동 감독의 복귀작에 붙은 국제적 평가를 확인하게 한다.
이창동 감독은 베니스 수상 뒤에도 상 자체보다 영화가 처음 관객과 만났다는 사실을 앞세웠다. 21일 서울 기자간담회에서도 수상은 결과이고 관객이 작품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쉽게 소비되는 영화가 아닌데도 관객들이 작품이 건네는 문제의식에 반응한 데 안도했다고 밝혔다.
‘가능한 사랑’이 8년 만의 신작이라는 사실보다 더 긴 시간은 처음 영화를 구상한 순간부터 완성까지 이어진 망설임에 놓여 있다. 노동자의 고통을 영화로 만들 수 있는지 주저했던 감독은 결국 카메라를 든 사람까지 이야기 안에 집어넣었다. 호석과 미옥만 바라보지 않고 예지가 두 사람을 바라보는 방식까지 함께 놓으면서, 노동과 계급을 다룬 영화는 창작자의 위치까지 포함하는 작품으로 넓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