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돌아온 이창동, 인간을 포기하지 않는 영화

‘버닝’ 이후 8년 만의 ‘가능한 사랑’…해고와 계급, 욕망과 카메라를 지나 인간이 타인에게 닿을 수 있는 거리 완전한 이해도 완전한 사랑도 허락되지 않는 세계에서 이창동이 다시 붙잡은 존엄과 자유

2026-09-21     김동희 기자
[칼럼] 돌아온 이창동, 인간을 포기하지 않는 영화. 사진=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KtN 김동희기자]21일 오후 서울 용산구 CGV 용산아이파크몰에 이창동 감독이 섰다. ‘버닝’ 이후 8년 만의 장편 ‘가능한 사랑’을 국내 언론에 공개하는 자리였다. 제83회 베니스국제영화제 은사자상-심사위원대상과 국제비평가연맹(FIPRESCI)상을 받은 직후였다. 설경구와 조인성, 조여정이 함께했고, 뉴욕에서 연극 ‘벚꽃동산’ 공연 중인 전도연은 화상으로 참여했다. 베니스에서 돌아온 감독의 손에는 트로피가 있었지만, 이야기는 수상보다 영화와 인간에게 오래 머물렀다.

8년이라는 공백을 숫자로만 읽기는 어렵다. 2018년 ‘버닝’ 이후 극장은 코로나19를 통과했고, 온라인동영상서비스는 영화 제작과 유통의 중심으로 들어왔다. 인공지능과 자동화는 인간의 노동을 다시 정의하기 시작했고, 다른 사람의 일상과 상처까지 실시간으로 촬영하고 소비하는 환경은 일상이 됐다. 이창동은 달라진 시대에 해고 노동자와 다큐멘터리 감독을 한 영화 안에 세웠다. 노동을 잃은 사람과 타인의 삶을 찍는 사람을 마주 보게 한 선택에는 2026년이라는 시간이 들어 있다.

‘가능한 사랑’에서 설경구가 연기하는 최호석은 직장을 잃었다. 전도연이 맡은 안미옥은 남편과 아들의 곁에서 생활을 이어간다. 조여정이 연기하는 다큐멘터리 감독 이예지는 해고 노동자들을 촬영하다 미옥 부부에게 다가오고, 조인성이 맡은 상우는 예지와 함께 호석 부부와는 다른 경제적 조건에서 살아간다. 164분 동안 네 사람은 가까워지고, 가까워진 만큼 상대가 가진 삶과 자신에게 없는 것을 의식한다.

이창동 신작, 베니스 은사자에서 아카데미 한국 출품작까지. 사진=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처음에는 계급이 선명하다. 일자리를 잃은 사람과 경제적 여유를 가진 사람이 있고, 카메라 앞에 서는 사람과 카메라를 드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이창동은 빈곤과 부유함을 선악의 자리로 옮기지 않는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이 언제나 선하지 않고, 돈을 가진 사람이 반드시 잔인하지도 않다. 노동자의 고통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라고 해서 상대를 온전히 이해하는 것도 아니다. 영화는 도덕적 판정을 미루고 네 사람이 서로에게 미치는 영향을 오래 바라본다.

호석에게 해고는 임금이 끊어진 사건으로 끝나지 않는다. 노동은 생계 수단이면서 한 사람이 사회 안에서 자신을 설명하는 언어이기도 하다. 직장과 직함, 함께 일하던 사람들, 하루의 시간표가 사라지면 자신을 설명하던 문장도 일부 무너진다. 호석에게 남은 분노와 수치심, 죄책감은 가난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노동할 수 있다는 사실과 인간으로서 존중받는다는 감각이 오랫동안 맞물려 있었기 때문이다.

‘박하사탕’의 김영호는 무너진 현재에서 과거로 돌아갔다. ‘가능한 사랑’의 호석에게는 돌아갈 시간이 없다. 이미 벌어진 일을 품고 아내와 아이 옆에서 다음 날을 살아야 한다. ‘초록물고기’의 막동, ‘오아시스’의 종두와 공주, ‘밀양’의 신애, ‘시’의 미자, ‘버닝’의 종수가 서로 다른 시대와 조건 속에서 그랬듯 이창동의 인물은 사회가 남긴 상처를 몸에 지닌 채 일상을 계속한다. 개인의 비극과 사회의 구조를 따로 놓지 않는 시선은 ‘가능한 사랑’에서도 이어진다.

[가능한 사랑③] 전도연·설경구, 다시 만난 이창동…미옥과 호석에 쌓인 시간. 사진=영화 스틸,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달라진 부분은 카메라가 향하는 방향이다. ‘가능한 사랑’은 고통받는 사람을 바라보는 데서 멈추지 않고, 고통받는 사람을 바라보는 사람까지 바라본다. 예지는 노동자의 현실에 무관심한 감독이 아니다. 오히려 관심을 갖고 가까이 다가가며 미옥에게 친구가 되자고 말한다. 선의가 있기 때문에 관계는 더 복잡해진다. 악의에서 시작된 착취라면 판단은 쉽지만, 인간관계에서 더 어려운 문제는 선의를 가진 사람이 상대에게 상처를 줄 때 생긴다.

카메라는 말할 기회를 주면서 동시에 권력을 만든다. 촬영되는 사람에게는 자신의 삶이지만 촬영하는 사람에게는 작품이 될 수 있다. 질문을 고르고, 촬영을 끝내고, 남길 장면과 버릴 장면을 결정하는 권한은 카메라를 쥔 쪽에 있다. 서로 친구가 되고 같은 식탁에 앉아도 위치의 차이까지 사라지지는 않는다. 이창동 감독이 기자간담회에서 타인의 고통을 재료로 소비하지 않을 방법을 오랫동안 고민해왔다고 말한 이유도 예지라는 인물과 맞닿아 있다.

예지의 카메라는 결국 이창동 자신의 카메라로 돌아온다. 노동자의 고통을 기록해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예지와 해고 노동자를 주인공으로 극영화를 만드는 감독 사이에는 피할 수 없는 닮음이 있다. 타인의 고통을 다루면서도 착취하지 않을 수 있는지, 공감하면서도 상대의 삶을 자신의 이야기로 소유하지 않을 수 있는지에 대한 의심을 감독 자신에게까지 돌린다. ‘가능한 사랑’에서 가장 깊은 윤리는 약자를 연민하는 데 있지 않다. 약자를 바라보는 자신의 위치까지 의심하는 데 있다.

영화진흥위원회의 미국 아카데미영화상 국제장편부문 한국 출품작 선정 심사에서 등장한 ‘친절한 폭력’이라는 표현도 같은 문제를 건드린다. 심사위원들은 계급 차이가 있는 두 부부를 통해 친절과 폭력, 자유와 행복을 생각하게 한다고 평가했다. 입체적인 인물과 관계의 다층성, 노동과 사랑을 함께 바라보는 시선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창동 감독 ‘가능한 사랑’, 베네치아 은사자상에 이 대통령 축하  사진=2026. 09.13. labiennale , @jacopo_salvi

친절과 폭력은 현실에서 언제나 반대편에 있지 않다. 상대를 이해한다고 믿는 마음,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태도, 다른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대신 판단하는 순간에도 힘의 차이는 작동한다.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사람이 베푸는 친절과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이 건네는 친절은 같은 문장으로 표현돼도 무게가 다르다. 이창동은 폭력을 악인의 행동으로만 찾지 않고 관계 안에서 발생하는 미세한 비대칭까지 들여다본다.

영화 첫머리에 놓인 “남의 것을 탐하지 말라”는 계명도 사람 사이의 욕정만 가리키지 않는다. 미옥은 자신이 살아보지 못한 생활을 바라보고, 예지는 다른 사람의 삶을 자신의 영화에 담으려 한다. 상우는 이미 많은 것을 가졌지만 욕망에서 자유롭지 않다. 호석에게는 남이 가진 것을 빼앗으려는 욕망보다 자신에게서 사라진 노동과 존엄을 되찾고 싶은 마음이 먼저 놓인다. 사람만이 아니라 돈과 직업, 생활의 안정, 관계, 자유, 타인의 경험까지 욕망의 대상이 된다.

욕망을 죄악으로만 처리하지 않는 데 ‘가능한 사랑’의 또 다른 깊이가 있다. 인간은 자신에게 없는 것을 바라보면서 자신이 원하는 삶을 발견한다. 다른 삶을 상상할 수 있다는 사실은 불행의 시작이면서 자유의 시작이기도 하다. 문제는 욕망할 수 있는 조건마저 평등하지 않다는 데 있다. 돈을 가진 사람에게 선택은 하나의 가능성이지만 생존의 여유가 없는 사람에게 같은 선택은 삶 전체를 걸어야 하는 위험이 될 수 있다. 계급은 가진 것의 양만 나누지 않고 욕망을 실행할 수 있는 범위까지 나눈다.

사랑도 계급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제목은 ‘사랑’이 아니라 ‘가능한 사랑’이다. ‘가능한’이라는 말에는 이미 세계의 조건이 들어 있다. 돈이 있고 노동이 있으며 결혼이 있고 욕망이 있다. 각자의 상처와 과거도 지워지지 않는다. 모든 장애물이 사라진 뒤 완전한 사랑에 도달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장애물이 남아 있는 현실에서 다른 사람에게 얼마나 가까이 갈 수 있는지를 바라본다.

전도연·설경구·조인성·조여정, 이창동 신작 ‘가능한 사랑’ 캐스팅 확정 사진=2025 08.05   넷플릭스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사랑은 해고를 취소하지 못한다. 가난을 없애지 못하고 계급의 차이를 지우지도 않는다. 상대의 고통을 완전히 이해하게 해주는 능력도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를 줄 수 있고, 선의를 품은 채 상대를 대상화할 수도 있다. ‘가능한 사랑’은 사랑을 구원의 만능어로 사용하지 않으면서도 사랑이라는 말을 포기하지 않는다.

이창동 영화의 휴머니즘도 인간을 선하게 믿는 낙관과는 거리가 있다. 사람은 이기적이고 모순되며 때로 비겁하다. 욕망하고 질투하며 자신을 지키기 위해 다른 사람을 밀어낸다. ‘밀양’의 용서도 쉽게 완성되지 않았고, ‘시’의 아름다움도 현실의 폭력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가능한 사랑’ 역시 인간을 정화한 뒤 사랑하지 않는다. 결함을 그대로 둔 상태에서 사람이 다시 다른 사람에게 갈 수 있는 여지를 남긴다.

8년 동안 타인을 바라보는 방식은 더 쉬워졌다. 휴대전화 하나면 다른 사람의 생활과 고통을 언제든 기록할 수 있고, 플랫폼은 타인의 사적인 경험까지 콘텐츠로 유통한다. 그러나 더 많이 본다고 더 깊이 이해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다른 사람의 얼굴을 수없이 보면서도 한 사람의 삶을 너무 빠르게 판단할 수 있는 시대가 됐다. ‘가능한 사랑’의 카메라가 낡은 윤리적 문제처럼 보이지 않는 이유다.

164분이라는 러닝타임도 같은 맥락에서 읽을 수 있다. 빠르게 판단하지 않으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한 사람을 노동자, 자본가, 피해자, 가해자,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이라는 단어 하나로 정리하지 않으려면 오래 바라봐야 한다. 이창동은 효율과 속도가 지배하는 시대에 다시 긴 시간을 요구한다. 네 사람이 말하고 침묵하고 오해하고 상대를 다시 바라보는 시간을 줄이지 않는다.

영화가 만들어진 과정은 작품 바깥에서 또 다른 층위를 남긴다. 국내 투자시장에서는 제작비 확보가 쉽지 않았고, 넷플릭스가 제작에 참여했다. 노동과 자본을 다루는 작가영화가 글로벌 플랫폼 자본을 통해 완성됐다는 사실에는 한국 영화산업의 현재가 겹쳐 있다. 넷플릭스 제작작이지만 164분의 길이를 유지했고, 베니스 경쟁부문에서 은사자상-심사위원대상과 FIPRESCI상을 받은 뒤 한국 극장을 먼저 거쳐 11월 6일 세계에 공개된다.

자본 없이 영화가 존재하기 어렵다는 현실과 자본만으로 좋은 영화가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은 모순처럼 함께 있다. 인간 역시 완전히 자유로운 조건에서 사랑하지 않는다. 경제적 조건과 사회적 위치, 기억과 욕망 안에서 다른 사람을 만나고 관계를 만든다. ‘가능한 사랑’은 자유를 모든 조건에서 벗어난 상태로 그리지 않는다. 조건에 묶여 있으면서도 다른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는 힘에 가깝게 바라본다.

[가능한 사랑⑥] 국내 투자 막힌 이창동 신작, 베니스 은사자에서 아카데미 한국 출품작까지. 사진=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21일 용산에서 돌아온 이창동 감독에게 8년이라는 시간은 이전 작품의 명성을 다시 확인하기 위한 공백이 아니었다. 노동의 가치가 흔들리고 인간관계가 달라진 시대, 타인의 고통마저 너무 쉽게 이미지가 되는 세계에서 다시 인간을 바라볼 방법을 찾는 시간에 가까워 보인다. 베니스의 은사자상은 이미 하나의 기록이 됐지만 ‘가능한 사랑’에서 더 오래 남는 것은 수상보다 인간을 바라보는 방식이다.

이창동은 사랑이 세상을 구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인간이 타인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고도 믿지 않는다. 오히려 이해의 한계를 인정하고, 선의 안에도 폭력이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직시하며, 사랑에도 계급과 욕망이 스며든다는 현실을 끝까지 남겨둔다. 그러면서도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포기하지 않는다.

‘가능한 사랑’에서 가장 무거운 단어는 어쩌면 ‘사랑’보다 ‘가능한’이다. 불완전한 인간이 불완전한 조건 속에서도 타인에게 조금 더 가까이 갈 수 있다는 가능성, 상대를 완전히 소유하거나 이해하지 못해도 관계를 이어갈 수 있다는 가능성이다. 8년 만에 돌아온 이창동의 영화에는 인간에 대한 낙관보다 더 오래 버티는 태도가 있다. 인간을 쉽게 믿지는 않지만, 끝까지 인간을 포기하지 않는 시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