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이끼숲’①] 천선란 SF ‘이끼숲’, 한 사람을 향한 소설에서 무대까지

“친구 한 명을 구하고 싶었다”에서 출발한 이야기…원작 IP 무대화가 늘어난 창작뮤지컬 흐름 속 SF의 선택

2026-09-21     김동희 기자

[KtN 김동희기자] “친구 한 명을 좀 구하고 싶었어요.”

천선란 작가는 21일 오후 서울 강남구 최인아책방에서 열린 뮤지컬 ‘이끼숲’ 미디어 쇼케이스에서 소설을 쓰기 시작했던 순간을 이렇게 설명했다. 처음부터 많은 사람을 향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가까운 친구 한 사람에게 멋지지 않아도, 구질구질하더라도 이끼처럼 세상에 붙어서 살아가자는 말을 전하고 싶었다. 한 줄짜리 편지로 끝날 수도 있었던 말은 한 권의 SF 소설이 됐다.

천선란 작가가 21일 오후 서울 강남구 최인아책방에서 열린 뮤지컬 ‘이끼숲’ 미디어 쇼케이스에서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사진=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뮤지컬로 옮겨진 ‘이끼숲’은 지상이 멸망한 뒤 지하 도시에서 통제된 삶을 살아가는 인물들을 따라간다. 살아남기 위해 만들어진 질서 안에서 성장한 사람들이 친구와의 관계를 통해 익숙했던 세계를 다시 바라보고 지상을 향한다. 미래 사회라는 설정보다 그 안에서 사람들이 맺는 관계와 선택이 이야기를 움직인다.

오루피나 연출이 주목한 부분도 지하 도시의 양면성이었다. 환경 파괴로 지상에서 살 수 없게 된 사람들이 지하로 내려간 것은 누군가를 억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많은 사람을 살리기 위한 선택이었다. 효율을 위해 만들어진 질서는 생존을 가능하게 하지만 동시에 사람들의 감정과 선택을 제한한다. 오 연출은 미래 사회의 조건이 관객에게 전달돼야 그 안에서 살아가는 인물들의 행동과 감정도 이해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소설에서는 문장을 따라 인물의 생각과 기억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무대에서는 같은 역할을 배우의 몸과 목소리, 음악과 공간이 나눠 맡는다. ‘이끼숲’은 세트와 조명에 더해 청각적 요소를 사용하고, 지하 도시를 표현하는 음악과 인물들의 감정이 드러나는 음악 사이에도 차이를 둘 계획이다. 미래사회를 설명하는 대사를 늘리기보다 공간과 소리의 대비로 관객이 세계의 성격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방식이다.

SF를 뮤지컬로 옮기는 작업은 천선란에게도 익숙한 선택은 아니었다. 천 작가는 SF가 연극이나 뮤지컬, 특히 뮤지컬로 구현하기 어렵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고 했다. 여러 차례 자신의 작품이 무대로 옮겨지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오히려 새롭게 발견한 부분은 인물이었다. 소설 속 캐릭터마다 비교적 뚜렷한 성격과 주체성이 있다는 점이 배우에게 하나의 인물을 맡기는 공연 구조와 맞닿아 있다는 설명이다.

배우가 들어오자 문장 속에 있던 인물도 다른 형태를 갖기 시작했다. 천 작가는 ‘이끼숲’ 데모 리딩에서 같은 배역을 맡은 여러 배우를 보면서 각기 다른 얼굴과 목소리인데도 자신이 쓴 캐릭터처럼 느껴졌다고 말했다. 작가가 글로 정해 놓은 인물이 배우 한 사람의 해석으로 고정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몸과 목소리를 통과하면서 다시 만들어지는 과정이었다.

2026년 국내 창작뮤지컬에서는 기존 소설과 웹툰을 무대로 옮기는 작업이 이어지고 있다. 웹툰을 바탕으로 한 ‘유미의 세포들’은 원작에 없던 캐릭터를 새로 만들었고, SF 소설을 원작으로 한 ‘다이브’도 공연으로 제작됐다. 이미 알려진 이야기를 공연으로 가져오는 데서 그치지 않고 원작의 인물과 관계, 서사 구조를 무대 형식에 맞춰 다시 짜는 작업이 함께 나타나고 있다.

창작뮤지컬의 외형도 커졌다. 공연예술통합전산망(KOPIS)은 2025년 창작뮤지컬 티켓판매액이 라이선스 뮤지컬을 처음 넘어섰다고 분석했다. 공연 건수와 회차가 늘어난 가운데 창작뮤지컬이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달라졌다. 다만 공연 수 증가와 개별 신작의 흥행은 같은 의미가 아니다. 작품이 늘어날수록 새 인물과 세계를 처음 소개해야 하는 초연 작품 사이의 경쟁도 함께 커진다.

‘이끼숲’은 이런 흐름 안에서도 무대에 옮기기 간단한 원작은 아니다. 지하 도시와 숲, 지상이라는 서로 다른 공간을 갖고 있고 미래사회의 제도와 규칙이 인물의 행동에 직접 영향을 준다. 소설의 설명을 그대로 가져오는 대신 공연 시간 안에서 세계관과 인물 관계를 동시에 세워야 한다.

21일 오후 서울 강남구 최인아책방에서 열린 뮤지컬 ‘이끼숲’ 미디어 쇼케이스에 천선란 작가와 오루피나 연출, 배우 송유택·전혜주·이주순·정다예·윤지우가 참석했다. 진행은 방송인 유재필이 맡았다.  사진=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원작이 있다는 사실은 출발점을 제공하지만 이미 책을 읽은 독자의 기억도 함께 따라온다. 천선란은 뮤지컬 제작 소식을 들은 뒤 ‘이끼숲’을 읽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접했다고 밝혔다. 책을 먼저 읽은 독자가 공연장으로 이동하는 것뿐 아니라 공연 소식이 다시 원작으로 사람을 보내는 흐름도 나타난 셈이다.

천선란에게 공연장은 소설을 쓸 때 경험할 수 없었던 방식으로 독자를 만나는 공간이기도 했다. 책을 읽는 독자의 표정은 작가가 직접 보기 어렵지만 공연장에서는 이야기를 받아들이는 관객의 얼굴을 실시간으로 볼 수 있다. 천 작가는 무대를 보는 관객의 표정을 보면서 책장이 넘어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이끼숲’의 시작에는 지하 도시도, 미래 기술도 없었다. 한 사람에게 어떻게든 살아보자는 말을 건네려던 마음이 먼저 있었다. 소설에서는 여섯 인물과 여러 에피소드로 펼쳐졌던 이야기가 공연으로 옮겨지면서 인물과 관계, 공간을 다시 묶는 작업이 뒤따랐다.

오루피나 연출은 초반 지하 도시를 삭막하고 정형화된 공간으로 구성하고, 인물들이 숲과 지상으로 이동하면서 공간의 성격도 달라지도록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뮤지컬 ‘이끼숲’은 10월 1일부터 12월 13일까지 서울 백암아트홀에서 공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