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이끼숲’②] 6명에서 4명으로, 혼자 걷던 길을 함께 걷는 무대로
인물 통합부터 이동 방식까지 바꾼 각색…원작 재현보다 공연의 시간과 관계에 맞춘 재구성
[KtN 김동희기자]천선란의 소설 ‘이끼숲’에서 여섯 명으로 나뉘었던 주요 인물은 뮤지컬에서 네 명으로 다시 묶였다. 인물 수만 줄어든 것은 아니다. 함께 길을 떠난 친구들이 하나씩 떨어져 나가고 마지막에는 소마가 혼자 지상을 향하던 원작의 이동 방식도 무대에서는 달라진다. 실제로 곁에 남아 있지 않은 인물들의 마음까지 배우들의 움직임에 함께 놓는다. 소설을 압축해 공연시간에 맞춘 정도를 넘어, 혼자 남는 이야기를 무대 위에서는 함께 움직이는 이야기로 바꾼 각색이다.
오루피나 연출은 원작의 인물들이 함께 출발한 뒤 각자의 선택과 희생을 거치며 하나씩 떨어져 나가는 구조를 무대에서 그대로 반복하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길을 가는 소마가 홀로 남더라도 친구들의 마음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점을 공연의 움직임으로 남기려 했다. 원작에서 독자가 머릿속으로 연결했던 부재한 인물과 소마의 관계를 무대에서는 배우들이 함께 움직이는 방식으로 밖에 드러내는 선택이다.
여섯 인물을 네 명으로 통합한 작업도 같은 방향에서 이뤄졌다. 등장인물을 줄이면 공연 안에서 한 사람에게 돌아가는 시간은 길어지고, 따로 흩어졌던 관계와 성격은 한 인물 안에 겹쳐진다. 오 연출은 인물을 합치는 과정을 거치면서 여러 방향으로 생각하고 반응하는 모습을 한 캐릭터 안에서 볼 수 있게 됐다고 설명했다. 원작에서 분산됐던 기능을 삭제하기보다 일부 성격과 관계를 다시 배치한 셈이다.
소설과 뮤지컬의 시간 차이도 이런 선택에 영향을 준다. 소설은 한 인물의 생각에 오래 머물거나 사건 사이의 기억과 설명을 문장으로 연결할 수 있다. 공연에서는 여러 인물이 같은 공간에 서고, 제한된 시간 안에서 대사와 노래, 움직임을 통해 관계 변화를 보여줘야 한다. 원작의 인물 수와 사건 배열을 모두 유지할 경우 각 인물에게 주어진 감정의 시간이 짧아질 수 있다. ‘이끼숲’은 인물을 통합하는 대신 관계를 전면에 두는 쪽을 택했다.
송유택이 맡은 마르코에서도 소설과 공연 사이의 차이가 드러난다. 송유택은 원작의 첫 번째 이야기에서 마르코의 생각과 시선을 중심으로 독자가 인물을 따라갈 수 있지만, 뮤지컬에서는 여러 사람이 무대에 동시에 존재하기 때문에 한 인물의 내면이 같은 방식으로 직접 드러나지는 않는다고 설명했다. 대신 넘버가 시작되면 마르코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무엇을 향해 가고 싶은지가 가사와 감정을 통해 앞으로 나온다.
소설의 서술자가 맡았던 일부 역할을 노래가 가져오는 구조다. 객관적으로 인물을 바라보던 관객이 넘버에 들어가면서 인물의 내면으로 가까이 이동한다. 송유택이 “소설을 찍고 나온 남자”를 목표로 삼았다고 표현한 것도 원작의 외형을 흉내 내겠다는 뜻보다는, 문장으로 존재했던 마르코의 생각을 공연 안에서 얼마나 구체적인 사람으로 만들 것인가에 가까웠다.
올해 창작뮤지컬에서 국내 소설과 웹툰을 무대로 옮기는 작업이 이어지는 가운데 원작과의 차이를 공연 자체의 문법으로 만드는 방식도 나타나고 있다. 웹툰을 원작으로 한 ‘유미의 세포들’은 원작에 없던 캐릭터를 추가했고, SF 소설에서 출발한 ‘다이브’도 무대 형식에 맞춰 원작을 다시 구성했다. 국내 IP를 활용한 작품이 늘면서 이미 알려진 서사를 그대로 재현하는 것보다 무대에서 새롭게 작동할 인물과 구조를 만드는 작업이 함께 중요해진 흐름이다.
‘이끼숲’은 인물을 추가하는 대신 합치는 방향을 택했다. 여섯 명을 네 명으로 줄이고, 소마가 홀로 감당하던 이동에는 다른 인물들의 움직임을 남긴다. 같은 원작 IP를 활용하더라도 무대에서 취하는 방식은 반대일 수 있다. 원작과 다른 설정 자체보다 무엇을 남기기 위해 무엇을 바꿨는지가 각색의 성격을 가른다.
천선란 작가 역시 공연화 과정에서 인물이 달라지는 모습을 직접 경험했다. 데모 리딩에서는 하나의 배역을 여러 배우가 맡았는데, 얼굴과 목소리가 서로 달라도 모두 자신이 쓴 캐릭터처럼 느껴졌다고 했다. 소설에 적힌 인물의 성격이 하나의 정답으로 고정되는 대신 배우의 몸과 목소리를 만나면서 서로 다른 모습으로 확장된다는 얘기다.
배우들의 역할 구축에서도 관계가 비중 있게 다뤄지고 있다. 전혜주는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뒤 지상까지 가기로 마음먹는 시간과 친구들과 맺는 관계를 함께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친구들이 한데 모일 때에도 각각 어떤 관계를 갖고 있는지 세밀하게 정하는 과정이 필요했다고 설명했다.
정다예가 맡은 인물에서는 통합과 대비가 다른 형태로 나타난다. 정다예는 쌍둥이 자매를 1인 2역으로 연기하면서 외형과 목소리가 비슷한 두 사람을 무대에서 어떻게 구분할지를 고민했다고 밝혔다. 원작에서 강하게 드러나는 증오와 분노, 질투 같은 감정만 좇기보다 사랑받고 싶었던 마음과 서로 미워하면서도 떨어질 수 없는 자매 관계를 함께 찾고 있다고 말했다.
인물의 수를 줄였다고 해서 관계까지 단순해지는 것은 아니다. 한 사람 안에 여러 성격과 관계가 모이면 배우가 표현해야 하는 변화의 폭은 오히려 넓어진다. 원작 독자에게 익숙한 인물을 유지하면서도 소설에서 나뉘어 있던 기능을 하나의 무대 인물 안에서 설득해야 한다. 여섯 명을 네 명으로 줄인 숫자 뒤에는 공연시간의 압축과 캐릭터 재배치, 배우의 해석이 동시에 놓여 있다.
오루피나 연출이 원작에서 가장 크게 바꾼 부분도 결국 ‘누가 끝까지 무대에 남아 있는가’에 연결된다. 소설에서는 친구들이 떠난 뒤 소마가 마지막 길을 홀로 감당한다. 뮤지컬에서는 떨어져 나간 인물들이 실제 사건 안에서는 함께하지 못하더라도 무대의 움직임에는 남는다. 원작에서 부재로 표현했던 관계를 공연에서는 존재하는 몸으로 바꾸는 셈이다.
뮤지컬 ‘이끼숲’은 10월 1일부터 12월 13일까지 서울 백암아트홀에서 공연된다. 원작의 여섯 인물을 네 명으로 묶은 각색과 함께, 소마가 혼자 남는 후반의 여정에는 다른 인물들의 움직임이 더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