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이끼숲’③] 지하도시는 소리부터 다르다…SF를 무대 감각으로
삭막한 통제사회에서 숲·지상으로…세트·조명·음악·움직임으로 다시 짠 ‘이끼숲’의 세계
[KtN 김동희기자]지하 도시의 풍경을 설명하는 일보다 먼저 시작된 작업은 소리였다. 사람이 살아남기 위해 만들어진 통제 사회와 그 안에서 감정을 키워가는 인물들이 같은 음악으로 존재해서는 안 된다는 판단에서다.
오루피나 연출은 21일 서울 강남구 최인아책방에서 열린 뮤지컬 ‘이끼숲’ 미디어 쇼케이스에서 지하 도시를 구현하는 과정에 청각적 요소를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밝혔다. 세계 자체를 표현하는 음악과 인물들의 감정을 따라가는 음악에 차이를 두고, 미래 사회의 구조를 긴 설명으로 풀어내기보다 관객이 감각적으로 받아들이도록 구성하는 방식이다.
천선란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끼숲’에서 공간은 인물들의 삶을 결정한다. 환경이 파괴된 뒤 사람들은 지상에서 살지 못하고 지하 도시로 내려간다. 생존을 위해 만들어진 사회에는 규칙이 있고, 효율을 앞세운 질서는 사람들의 감정과 선택에도 영향을 미친다. 등장인물이 지상을 향하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공간의 이동은 기존 질서에서 벗어나는 과정과 맞물린다.
오루피나 연출은 미래의 환경과 사회 구조가 관객에게 먼저 전달돼야 인물들의 선택과 감정도 이해될 수 있다고 봤다. 세트와 조명, 배우의 움직임에 음악과 음향까지 겹치는 이유도 지하 도시를 단순한 배경으로 남겨두지 않기 위해서다. 사람이 살기 위해 만든 도시가 동시에 사람을 통제하는 공간이라는 양면성이 무대 구성의 출발점에 놓였다.
공간의 성격도 이동에 따라 달라진다. 극 초반 인물들이 생활하는 곳은 삭막하고 정형화된 형태로 구성된다. 이후 인물들이 숲을 지나 지상을 향하면서 앞부분과 다른 공간을 만들어간다. 세트와 조명은 장소를 구분하는 장치에 머물지 않고 인물들이 속해 있던 사회와 벗어나려는 세계 사이의 차이를 나누는 역할을 맡는다.
소설 원작을 무대로 옮기는 최근 공연에서도 원작의 줄거리를 압축하는 데서 한발 더 나아가 소설이 가진 시공간과 장르를 극장에 맞는 표현 방식으로 다시 만드는 작업이 이어지고 있다. 올해 하반기 소설 원작 공연에서는 세트와 음악, 영상, 배우의 발화 방식 등을 달리 활용해 원작의 장르적 성격을 무대로 옮기는 시도가 잇따랐다. 단요의 SF 소설을 원작으로 한 창작뮤지컬 ‘다이브’ 역시 침수된 미래 서울이라는 설정을 음악과 무대 장치로 전환했다.
‘이끼숲’은 같은 SF에서도 청각과 공간의 대비를 앞세운다. 미래 기술을 눈앞에 그대로 재현하기보다 지하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매일 접하는 소리와 음악, 정형화된 공간부터 세계의 성격을 쌓는다. 숲과 지상으로 이동하면서 같은 요소들의 쓰임도 달라지는 구조다.
배우들의 연습도 완성된 세트를 전제로 진행됐다. 실제 세트가 들어올 수 없는 연습실에서는 무대 조감도와 3D 모형을 바탕으로 이동 위치와 동선을 익혔다. 배우 이주순은 극장에 들어간 뒤 실제 세트를 밟으면서 지하 도시의 공간에 맞춰 움직임을 다시 맞추게 된다고 설명했다.
무대 기술이 많아지는 흐름을 곧바로 공연의 성취로 연결할 수는 없다. 지난 6월 ‘2026 K-뮤지컬 국제마켓’에서는 국내 창작뮤지컬 시장이 커지는 과정에서 작품에 필요하지 않은 음악적·무대적 요소까지 확대되는 ‘스펙터클 우선주의’가 위험 요인 가운데 하나로 거론됐다. 중대형 극장과 상업적 성과를 염두에 둔 제작 환경이 작품보다 규모를 먼저 키울 가능성에 대한 업계의 경계였다.
‘이끼숲’에서 세트와 음향의 역할은 규모보다는 공간의 차이를 만드는 데 놓여 있다. 지하 도시가 왜 삭막해야 하는지, 숲과 지상으로 이동했을 때 무엇이 달라져야 하는지가 인물들의 이동과 연결된다. 같은 이유로 처음부터 따뜻한 분위기로 작품 전체를 감싸는 방식도 피했다.
오루피나 연출은 작품에 따뜻한 정서가 있지만, 따뜻함이 살아나기 위해서는 반대되는 감각도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처음 극장에 들어왔을 때 지하 도시를 다소 차갑고 낯설게 받아들이고, 그 사회의 규칙을 이상하게 느끼거나 한편으로 필요성을 이해하는 경험을 함께 가져가기를 바란다고 했다. 인물들이 지상으로 향하는 과정에서 공간과 감정이 동시에 바뀌도록 한 배경이다.
음악도 같은 대비를 담당한다. 지하 도시의 체제와 규칙을 나타내는 소리가 있고, 인물이 자신의 감정을 밖으로 꺼내는 순간의 넘버가 따로 놓인다. 앞선 회차에서 송유택이 설명했듯 소설에서는 문장으로 읽을 수 있었던 인물의 생각이 뮤지컬에서는 넘버가 시작되면서 목소리와 감정으로 드러난다. 세계를 설명하는 소리와 사람을 설명하는 노래가 서로 다른 층을 만드는 셈이다.
천선란의 소설에서 지하와 지상 사이에는 물리적인 거리만 놓여 있지 않다. 익숙한 규칙을 받아들이며 살아온 인물들이 다른 삶을 선택하기까지의 변화가 그 사이에 있다. 뮤지컬은 문장으로 이어지던 이동을 배우가 걷는 거리와 음악의 변화, 세트와 조명의 차이로 나눠 맡는다.
뮤지컬 ‘이끼숲’은 10월 1일부터 12월 13일까지 서울 백암아트홀에서 공연된다. 초반의 정형화된 지하 도시에서 숲과 지상으로 이어지는 공간 변화와 함께, 통제된 세계를 표현하는 음악과 인물들의 감정을 담은 넘버가 서로 다른 층으로 배치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