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이끼숲’④] 문장 속 인물에 얼굴과 목소리를…다섯 배우가 만드는 ‘이끼숲’

송유택의 마르코부터 윤지우의 은희까지…소설의 내면은 넘버로, 관계와 감정은 배우의 몸으로

2026-09-24     김동희 기자

[KtN 김동희기자]같은 인물을 서로 다른 배우가 연기하는 모습을 지켜본 천선란 작가에게는 뜻밖의 경험이었다. 얼굴도 목소리도 달랐지만 모두 소설에서 쓴 인물처럼 느껴졌다. 글 안에 머물던 캐릭터가 배우를 만나 구체적인 사람으로 바뀌는 과정이었다.

천선란은 뮤지컬 ‘이끼숲’ 데모 리딩 당시 한 캐릭터를 여러 배우가 맡는 모습을 보면서 “내 캐릭터한테 얼굴과 목소리를 준다는 것이 이런 기분이구나”라는 감각을 처음 경험했다고 말했다. 소설을 쓸 때 하나의 문장으로 존재했던 인물이 무대에서는 배우마다 다른 목소리와 움직임을 갖게 됐다.

21일 서울 강남구 최인아책방에서 열린 미디어 쇼케이스에는 마르코 역 송유택, 소마 역 전혜주, 유오 역 이주순, 의주 역 정다예, 은희 역 윤지우가 참석했다. 다섯 배우가 맡은 배역은 원작의 인물 관계를 공연에 맞게 다시 구성한 결과물이다. 송유택은 마르코, 전혜주는 소마, 이주순은 유오, 정다예는 의주, 윤지우는 은희를 맡는다.

마르코 역 송유택이 21일 서울 강남구 최인아책방에서 열린 뮤지컬 ‘이끼숲’ 미디어 쇼케이스에서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사진=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송유택이 가장 먼저 짚은 차이는 ‘내면을 보여주는 방식’이었다. 원작에서는 마르코의 생각과 시선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따라갈 수 있다. 마르코가 다른 사람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디로 가고 싶은지가 문장을 통해 이어진다. 여러 인물이 동시에 존재하는 무대에서는 같은 방법을 사용할 수 없다.

송유택은 뮤지컬에서는 인물을 상대적으로 객관적으로 바라보다가 넘버에 들어가는 순간 생각과 가치관, 속마음이 앞으로 드러난다고 설명했다. 노래가 시작되면서 관객이 “저 친구가 저런 생각을 하고 있구나”라고 알아갈 수 있도록 감정을 담는 데 무게를 두고 있다고 했다.

“소설을 찍고 나온 남자”가 되고 싶다는 송유택의 표현도 같은 맥락에서 나왔다. 원작 인물의 외형을 그대로 복제한다는 의미보다는 글을 읽으며 따라갔던 마르코의 생각을 무대 위에서 사람이 하는 말과 행동으로 연결하겠다는 쪽에 가깝다.

마르코는 인공 별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하고 친구의 죽음을 계기로 자신이 살아가는 세계에 질문을 갖게 되는 인물로 설정됐다. 송유택은 마르코가 세상을 더 넓게 탐구하고 의문을 좇는 인물이라고 설명했다.

소마 역 전혜주가 뮤지컬 ‘이끼숲’ 미디어 쇼케이스에서 질의응답을 듣고 있다. 사진=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전혜주가 맡은 소마에서는 한 사람의 감정 변화와 여러 친구의 관계가 함께 놓인다. 소마는 도시의 모든 소리를 듣는 감청팀에 속한 인물이다.

전혜주는 지상을 향해 가기로 마음먹기까지의 시간을 어떻게 보여줄지 계속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 인물의 변화만 따로 떼어놓기보다 친구들이 모여 있을 때 각 사람과 소마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달리 만드는 작업에도 비중을 뒀다. 같은 친구 집단 안에서도 관계의 거리와 감정이 모두 같을 수 없기 때문이다.

원작의 여섯 인물을 뮤지컬에서 네 명으로 통합한 각색은 배우의 연기에도 영향을 미친다. 별개의 인물에게 나뉘어 있던 성격이나 관계가 한 배역 안에서 다시 만나면서 한 캐릭터가 감당해야 하는 감정의 폭도 달라진다. 2편에서 살펴본 인물 재구성이 대본 단계에서 끝나지 않고 배우들의 관계 설정으로 이어지는 부분이다.

유오 역 이주순이 뮤지컬 ‘이끼숲’ 미디어 쇼케이스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다. 사진=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이주순이 맡은 유오는 지상의 숲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는 인물이다. 삭막한 지하 도시에서도 지상의 푸른 숲을 향한 생각을 놓지 않고, 친구들이 지상을 향해 움직이게 되는 데 영향을 주는 캐릭터로 설정됐다.

이주순은 살아 있는 현실의 사람이라기보다 소설에서 만들어진 존재를 실제 무대 위 인물로 세우는 과정에 대해 이야기했다. 오루피나 연출이 그린 유오의 방향을 먼저 받아들인 뒤 내부를 채워가는 데 집중하고 있으며, 원작도 계속 다시 읽고 있다고 말했다.

유오는 ‘이끼숲’의 공간 이동과도 직접 맞물리는 인물이다. 지하에 머물러야 한다는 현실과 지상의 숲이 있다는 믿음 사이에서 후자를 놓지 않는다. 배우가 만들어야 할 것은 단순한 낙관성이 아니라, 다른 인물들이 움직일 이유가 될 만큼 지속되는 믿음이다. 마르코가 세계에 질문을 던지는 쪽이라면 유오는 존재한다고 믿는 장소를 향해 실제 이동을 촉발하는 쪽에 놓인다.

 의주 역 정다예가 뮤지컬 ‘이끼숲’ 미디어 쇼케이스에서 작품 속 인물을 설명하고 있다. 사진=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정다예에게는 다른 배우들과 구별되는 조건이 하나 더 있다. 의주와 쌍둥이 자매 의조를 1인 2역으로 연기한다. 정다예는 외형적으로 닮고 목소리도 크게 다르지 않을 두 사람을 어떻게 구별할 것인지부터 고민했다고 말했다. 정다예가 맡은 의주는 도시의 계획이 모두를 위한 것이라고 믿는 원칙주의자로 설정돼 있다.

정다예가 의조를 읽으면서 먼저 만난 감정은 증오와 분노, 부러움과 질투처럼 날이 선 감정들이었다. 그러나 무대에서는 차갑고 서늘한 성격만 강조하기보다 의조가 받고 싶었던 사랑으로 시선을 옮겼다. 서로 미워할 수밖에 없으면서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쌍둥이 자매의 관계를 함께 찾고 있다고 설명했다.

한 배우가 두 사람을 맡는 만큼 의주와 의조의 차이를 과장된 목소리나 외형 변화만으로 구분하기보다 각각 무엇을 원하고 누구를 바라보는지를 달리 설정해야 한다. ‘이끼숲’의 인물 재구성이 가장 직접적으로 배우의 연기 방법과 만나는 배역이다.

은희 역 윤지우가 뮤지컬 ‘이끼숲’ 미디어 쇼케이스에서 마이크를 들고 있다. 사진=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윤지우가 맡은 은희는 다른 네 인물과 등장 방식부터 다르다. 은희는 원작의 ‘바다눈’에 등장하고, 깊고 아름다운 목소리를 지닌 인물로 설정됐다.

윤지우는 은희가 특정 이야기 안에 등장하는 만큼 자신의 이야기를 잃지 않고 가져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작품이 지닌 깊은 감정 안에서도 슬픔에만 머무르지 않고 건강하고 밝은 에너지를 가진 인물에 집중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은희가 등장하는 대목에서 관객이 잠시 다른 호흡을 만날 수 있도록 인물의 에너지를 조절하는 작업도 이어지고 있다.

마르코·소마·유오·의주·은희는 같은 지하 도시에 놓이지만 세계를 받아들이는 방법이 서로 다르다. 의문을 품는 사람, 끝까지 이동하는 사람,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르는 숲을 믿는 사람, 사회의 원칙을 받아들이는 사람, 제한된 이야기 안에서 자신의 감정을 남기는 사람이 같은 공간에 선다. 배우가 캐릭터를 구축하는 과정도 결국 이런 차이를 대사와 넘버, 관계의 거리로 나누는 작업에 가깝다.

원작을 가진 창작뮤지컬에서 배우에게는 이미 독자가 만들어 놓은 인물의 이미지와 무대에서 처음 세워지는 캐릭터 사이를 연결해야 하는 조건이 붙는다. ‘이끼숲’은 여기에 인물 통합까지 더했다. 소설의 여섯 인물이 네 명으로 재구성되면서 일부 관계와 성격이 새로운 배역 안에서 다시 배열됐고, 배우들은 원작을 출발점으로 삼되 공연 안에서 작동할 감정의 순서와 관계를 따로 만들어가고 있다.

천선란이 리딩 과정에서 발견한 것도 하나의 캐릭터가 하나의 얼굴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같은 인물을 맡은 배우들의 얼굴과 목소리가 달라도 자신이 쓴 마르코와 소마처럼 느껴졌다는 경험이다. 소설에서 독자가 각자 상상했던 인물들은 초연 무대에서 배우의 목소리와 움직임을 거쳐 여러 모습으로 구체화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