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이끼숲’⑤] “어떻게든 살아보자”…거대한 구원 대신 버티는 사람들
행복을 약속하기보다 생존과 관계를 좇는 SF…통제된 지하도시에서 친구의 힘으로 지상까지
[KtN 김동희기자]“우리 모두 행복할 수 있을 거야”라는 말보다 천선란 작가가 ‘이끼숲’에서 붙잡은 문장은 살아남는 쪽에 가까웠다.
천선란은 21일 서울 강남구 최인아책방에서 열린 뮤지컬 ‘이끼숲’ 미디어 쇼케이스에서 각자가 치열한 현실을 살아가는 상황을 언급하며, 모두 함께 행복하자는 말보다 “어떻게든 한번 버텨서 살아보자”는 이야기가 지금과 맞닿아 있다고 설명했다. 한 사람을 구하고 싶어 시작했던 소설의 출발점이 지하도시라는 SF 세계를 지나 다시 생존의 문제로 이어진다.
천선란이 처음 소설을 쓰기로 마음먹었을 때 떠올린 대상도 많은 사람이 아니었다. 친구 한 명이었다. 멋지지 않아도 구질구질하더라도 이끼처럼 세상에 붙어 살아가자는 말을 전하고 싶었고, 한 줄의 편지가 될 수도 있었던 이야기는 한 권의 소설이 됐다.
‘이끼숲’의 미래에는 낙관적인 전망이 먼저 놓이지 않는다. 환경이 파괴된 뒤 사람들은 지상에서 살지 못하고 지하 도시로 내려간다. 생존을 위해 만들어진 질서와 규칙은 일상을 유지하는 장치인 동시에 개인의 감정과 선택을 제한한다. 인물들은 어릴 때부터 주어진 규칙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성장하고, 친구와의 약속과 상실을 거치면서 익숙했던 삶의 경로에서 벗어나기 시작한다.
오루피나 연출은 인물들이 친구들과의 약속을 계기로 자신들이 당연하다고 믿었던 질서를 조금씩 깨고 나가는 과정에 주목했다. 지상으로 향하는 길은 한 번의 결단으로 끝나지 않는다. 괴롭고 힘든 순간을 지나면서도 주변 사람에게 기대어 한 단계씩 움직이는 구조로 작품을 해석했다고 설명했다.
뮤지컬로 옮겨지면서 친구들의 존재는 원작보다 물리적으로 오래 남는다. 소설에서는 함께 출발했던 인물들이 각자의 선택과 희생을 거치며 하나씩 떨어져 나가고 마지막에는 소마가 홀로 지상을 향한다. 무대에서는 실제 사건 안에서 곁에 남지 않은 친구들도 움직임을 통해 여정에 다시 참여한다. 원작의 여섯 인물을 네 명으로 통합한 작업과 함께, 한 사람이 홀로 감당하던 길을 여러 배우의 몸으로 표현하는 변화가 더해졌다.
관계가 전면에 놓이면서 각 인물이 움직이는 이유도 서로 달라진다. 전혜주는 소마가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뒤 지상으로 향하기까지의 변화뿐 아니라 친구 한 명 한 명과 맺는 관계를 따로 고민했다고 말했다. 같은 무리에 속해 있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관계를 같은 온도로 만들지 않고, 누구와 어떤 감정을 주고받는지를 나눠 설정하는 작업이었다.
정다예가 맡은 쌍둥이 자매의 관계도 단순한 대립으로 처리되지 않는다. 정다예는 의조에게서 증오와 분노, 질투와 시기 같은 날 선 감정을 읽으면서도 차가움 자체보다 사랑받고 싶었던 마음에 더 가까이 가려고 했다고 설명했다. 서로를 미워할 수 있으면서 동시에 사랑할 수밖에 없는 자매의 감정을 함께 찾아가는 방식이다.
윤지우가 연기하는 은희 역시 슬픔 하나로 규정하지 않는다. 윤지우는 특정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인물의 이야기를 놓치지 않으면서도, 슬프지만 건강하고 밝은 에너지를 가진 사람이라는 데 초점을 맞췄다고 말했다. 깊은 감정을 다루면서도 모든 인물을 상실과 고통의 무게로만 묶지 않는 접근이다.
창작뮤지컬에서 다루는 인물과 소재의 범위도 넓어지고 있다. 뮤지컬 전문지 ‘더뮤지컬’은 2025년 창작 신작을 약 70~90편으로 추산하면서 당시 작품 경향을 ‘작품 편수와 소재의 확장, 새로운 주체의 탄생’으로 정리했다. 제10회 한국뮤지컬어워즈 대상 출품작도 45편으로 과거 20~30편 수준을 넘어섰다.
‘이끼숲’은 확장된 소재의 한쪽에 SF를 놓는다. 그러나 미래 기술을 해결할 특별한 영웅을 앞세우지는 않는다. 통제된 도시에서 정해진 삶을 살아온 젊은 인물들이 중심이고, 지상으로 나아가는 동력도 압도적인 능력보다 약속과 기억, 사랑과 우정에서 나온다. 거대한 세계관 안에 평범한 인물들의 관계를 놓는 방식이다.
오루피나 연출은 작품의 자극 강도가 높지 않다고 설명했다. 따뜻하고 잔잔한 흐름을 갖고 있으며, 등장인물의 나이가 낮은 만큼 이해득실을 계산하기보다 감정에 따라 움직이는 과정을 따라가게 된다고 봤다. 공연 전체를 하나의 강한 감정으로 밀어붙이기보다 배우의 감정 표현이나 대사, 노래 한 소절 가운데 짧은 순간이라도 관객 개인의 경험과 맞닿는 방식을 염두에 뒀다.
따뜻한 관계만 강조하는 구성은 아니다. 지하 도시는 초반부터 삭막하고 정형화된 공간으로 설정된다. 오루피나 연출은 관객이 지하 사회의 규칙을 다소 이상하게 느끼면서도 동시에 생존을 위해 필요했을 수 있다는 감각을 함께 갖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규칙 자체를 단순한 악으로 처리하지 않고, 사람을 살리기 위해 만든 질서가 사람의 삶을 옥죄는 상태를 함께 놓는다.
송유택은 작품 속 ‘이끼’의 이미지를 배우로 살아가는 자신의 시간과 연결했다. 빠르게 이름을 알리는 것보다 오래 버티면서 계속 연기하고 싶다는 바람을 이야기했다. 화려하게 뻗어 나가기보다 한곳에 붙어 생명을 이어가는 이끼의 성질을 자신의 배우 생활과 겹쳐 설명한 대목이다.
천선란에게 무대는 소설을 쓸 때 직접 볼 수 없었던 독자의 얼굴을 마주하는 장소가 됐다. 책을 읽는 독자의 표정을 작가가 지켜보기는 어렵지만 공연에서는 이야기를 받아들이는 관객의 반응이 같은 공간에서 이어진다. 천선란은 객석을 바라보면서 관객의 얼굴이 바뀌는 모습에서 책장이 넘어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윤지우는 마지막 인사에서 북풍과 태양의 우화를 떠올렸다. 강한 자극으로 밀어붙이기보다 따뜻하고 은은하게 살아보자는 말을 건네는 작품으로 ‘이끼숲’을 받아들였다고 설명했다.
지하 도시에서 출발한 인물들은 친구를 잃고, 서로 다른 관계를 통과하고, 주어진 규칙에서 벗어나 숲과 지상을 향한다. 누군가가 세상을 단번에 바꾸는 구조보다 떨어져 나간 친구들의 기억까지 안고 남은 사람이 계속 걷는 쪽에 무게가 실린다.
뮤지컬 ‘이끼숲’은 10월 1일부터 12월 13일까지 서울 백암아트홀에서 공연된다. 초반의 차갑고 정형화된 지하 도시에서 숲과 지상으로 이동하는 흐름을 따라 인물들의 관계와 선택도 차례로 달라진다.